제195화 유명인 (2)
강우의 목표를 들은 사람들은 나이 어린 고등학생의 치기 어린 발언이라 생각했다.
꿈은 크고 웅장해야 하는 법이니 노벨상을 목표로 한다고 이상할 게 없다. 실제로 이 땅에는 노벨상을 목표한 학생들이 많다. 아마 이 고려 과학고에도 손에 꼽기 힘들 만큼 많은 학생이 한 번쯤은 노벨상을 꿈꾸지 않았을까.
그래서 강우의 노벨상 목표는 딱히 특이하지 않다.
게다가 부부라니? 노벨상을 받은 부부 과학자가 역사적으로 보자면 없지 않다. 유명한 마리 퀴리도 노벨상을 받은 부부 과학자니까.
사람들은 강우가 똑똑한 부인을 맞이하여 뛰어난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라는 바람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아직 어린 청소년다운 발상이다.
“하하! 노벨상이라…… 참 좋지요. 열심히 하면 가능성이 있어요. 아직 우리나라에는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가 없지만 언젠가는 나오지 않겠어요? 강우 군이 그 첫 주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백두섭이 적당히 수습했다.
강우는 미소를 지으며 잠시 말을 끊었다.
이들은 모른다. 이 목표가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 그의 인생에서 만일 그가 상온핵융합 개발에 크게 이바지한다면 노벨상은 어렵지 않다.
수첩에 메모한 김승범이 다시 화제를 돌렸다.
“이건 순전히 기삿거리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강우 군이 논문을 쓰고 프로젝트를 따 왔으며 올림피아드에서도 최고상을 받았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없었던 인재란 것도요. 그런데 뭔가 대중에게 더 어필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솔직히 논문, 프로젝트는 대중에겐 뜬구름 잡기이거든요.”
올림픽 금메달에는 열광하지만 올림피아드 금메달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실제로는 특정 종목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딴 스포츠인이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보다 올림피아드 금메달을 딴 과학자가 훗날 이 사회를 훨씬 크게 변화시킨다. 비록 그 개인의 영광과 수입은 견줄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만큼 이 사회에서 과학자는 유리되어 있다. 사실 과학 자체가 그러하다.
그래서 과학 꿈나무들은 자라면서 과학자가 아닌 의사 쪽으로 목표를 바꾼다.
강우는 과학자이기에 김승범 기자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차도도 또한 마찬가지.
“기사 내용에 일반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조금은 자극적인 내용이 필요하다는 말씀이겠지요?”
차도도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흥밋거리로 관심을 유도해서 올림피아드 두 종목에서 최상의 성적을 거둔 천재, 항공모함을 제작한 미국 방산업체에서 프로젝트를 체결…… 이런 식으로 기사를 쓰면 좋을 것 같거든요.”
“음, 그러면요.”
잠시 고심하던 차도도가 방안을 꺼냈다.
“지금 강우 군이 수행하는 프로젝트 가운데 프로야구단에서 받은 게 있어요. 그걸로 대중의 호기심을 유도하면…….”
“아! 그런 것도 있어요?”
애초에 김승범이 강우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국가에서 추진하는 고속전철 성능개선 사업 때문이었다. 과학 전문기자로서 국가 과학기술 발전을 취재하다가 이 사업을 파고들었고 그 덕분에 카이스트 한태규와 만났다.
그 자리에서 강우를 알게 됐다. 마침 강우가 올림피아드에서 성적을 냈다고 하니 취재하러 온 것이다.
“강우가 몇 달 전에 DD 파이터즈의 야구선수 두 사람에게 물리학을 응용해서 코치를 해줬었는데…….”
차도도가 열심히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김승범이 재빨리 휴대폰으로 프로야구 상황을 확인했다. 프로야구는 지금 전반기를 끝내고 올스타전 이후 후반기 레이스를 진행 중이었다.
“공정혁과 신재균 선수라…… 지금 성적이 공정혁은 구원투수이고 홀드 6위, 신재균은 선발투수인데 다승 4위이자 팀 내에서는 2위……. 둘 다 잘하네요. 그런데…….”
두 선수의 뉴스 기사를 검색하던 김승범의 눈이 번쩍 떠졌다.
예상외로 기사가 넘쳤다. 원래 유명선수라면 기사가 많아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이 둘의 기사는 조금 달랐다. 인생역전, 투혼의 상징…… 그런 내용이 대다수였다.
“왜요? 뭔가 이상한가요?”
“아뇨, 잠시만요. 이거 뭔가 있어 보이는데요?”
김승범이 기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보는 순간 기자로서의 직감을 얻었다.
‘이건 기사가 된다!’
공정혁은 작년 말에 입단한 육성선수 출신. 서클 커브라는 마구로 필승조에 진입해서 지금은 구원 투수진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는 내용이다. 신재균은 작년까지 직구만 좋은 구원투수였고 구종이 단조로웠다. 그런데 새로운 구종을 장착하면서 올해부터 선발투수로 전업했고 예상외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현재 성적으로 보면 신재균 선수는 올해 갑자기 출현한, 최고의 히트 상품이란 평가였다.
“이 두 선수가 작년에는 별로였나 본데요?”
“아마 그랬을 거예요. 저희도 잘은 모르지만요.”
차도도가 성심껏 대답했다.
“이 성과가 고려 과학고와의 프로젝트로 나왔다는 거죠?”
“그렇게 볼 수 있어요. 강우가 코치해준 거니까요.”
“아! 이거 대박인데?”
일반인에게는 과학보다 프로야구가 훨씬 친숙하다. 즉 강우를 선전하기에 매우 좋은 소재다.
“아, 좋네요. 제가 DD 파이터즈를 취재해서 기사를 추가하도록 하지요.”
긴 취재가 끝났다.
김승범은 이 기사가 일간지와 과학 잡지 두 군데로 나갈 예정이라고 했다. 물론 내용은 독자가 다른 만큼 조금 달라지겠지만.
* * *
“교장 선생님이 기숙사 사용을 허락하셨으니 앞으로 기숙사에 머무를 거니?”
“그래야죠.”
B동 상담실로 돌아오면서 차도도는 강우에게 어떻게 할지 물었다.
다행히 기숙사 사용이 가능해졌으니 신새벽이나 차도도 집을 전전할 이유가 사라졌다. 한편으로는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인 결과였다.
“그래도 가끔 쌤 집에 놀러 갈게요.”
“그래, 언제든지 와.”
일단 허락한 후 차도도는 옆에서 걷는 강우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건드리는 것이 있었다. 인터뷰에서 강우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넘어갔지만 예리한 그녀는 쉽게 넘길 수 없었다.
‘부부가 함께 노벨상을 탄다고…….’
그 부부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무척 궁금했다.
그냥 막연한 미래의 배우자일 수도 있지만 특정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면…….
‘강우가 가까운 여학생이 누가 있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고곽천재 멤버인 손차희와 윤수아 외에는 떠오르는 여학생이 없다. 이 둘은 예쁘기도 하고 똑똑하기도 해서 강우와 잘 어울린다. 또 그들끼리 잘 지내니까 어쩌면 천생연분일지도 모른다.
아직 윤수아는 이렇다 할 실적이나 두드러짐이 없으니…… 그럼 손차희인가? 물론 손차희는 어떤 남학생이라도 좋아할 요소가 다분하게 많다.
문득 강우가 그 말을 하기 직전에 자신을 빤히 쳐다봤던 행동이 떠오른다.
‘설마 나?’
차도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강우와 그녀의 나이 차는 10년. 솔직히 너무 멀다. 남자가 10년 위라도 차이가 큰 판에 여자가 10년 위라니. 아무리 인심을 쓰더라도 여자가 2년 이상 많으면 어려운 게 현실 아닌가.
설사 강우가 정말 그녀를 의식하고 언급했더라도 그것은 사춘기 시절 남학생의 단순한 치기 어린 행동일 뿐이다.
사춘기 남학생이, 또는 여학생이 예쁜, 멋진 이성 선생님을 좋아하는 일이야 흔하니까. 지금 강우에게도 그런 시절일 뿐이다.
강우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까지 해결하고 나면 그녀는 나이 마흔을 바라보게 된다. 그런 자신을 기억이나 해줄까.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고 슬픔이 밀려왔다.
그런데 미국 보스턴에서의 마지막 밤이 떠오른다.
그때 강우는 그녀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만졌었는데……. 지금도 강우의 손이 닿은 눈과 입술에 그 느낌이 남아있다.
‘그날 왜 그랬지?’
사실 별 의미가 없음을 그녀도 안다. 야밤이라 갑자기 그녀가 여자로 보였을지도. 하지만 딱 그뿐이다. 그런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신이 괜히 쪽팔렸다.
차도도는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에서 고민을 지웠다.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작 그녀는 옆에서 강우가 그녀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음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 * *
귀국한 후에도 강우는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갔다.
잠시 고향에 다녀온 후에 기숙사와 세미나실, 상담실을 오갔다.
오늘은 상담실에서 신새벽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차도도는 오늘 학교에 출근하지 않았다. 다른 일이 있다나.
“쌤! 그래서 제가 미국에 있는 동안 쌤이 한 일이…… 논문을 딱 두 페이지 쓴 게 전부예요?”
“아! 그게…… 이 두 페이지가 그냥 두 페이지가 아니야. 엄청 어려운 부분이라고.”
신새벽의 변명에 강우의 눈썹이 더욱 올라갔다.
신새벽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나, 나도 개인적인 일이 있고…….”
“남자 친구 생겼어요?”
“아, 아니. 큰일 날 소릴!”
“그러면 뭐 하느라 이것밖에 못 했어요?”
여름방학 때 논문을 많이 써두어야 한다.
물론 신새벽은 지난 학기로 학점을 모두 채웠고 다음은 논문 학기라서 딱히 방학이 의미가 없지만, 강우와 함께하려면 아무래도 방학 때 열심히 해야 한다.
“그냥 방학이라고 놀다 보니…….”
지금 모습은 공부 안 하고 노는 학생을 꾸짖는 장면이다. 물론 선생님과 학생이 뒤집힌 모양새였지만.
“어휴 안 되겠네. 혼을 내던지…….”
강우가 신새벽을 쓱 훑어봤다.
“헉!”
신새벽이 얼른 두 팔로 몸을 가리며 하소연했다.
“가, 강우야, 나 지금 치마 입었는데…….”
“치마 입었다고 구르지 못할 이유가…….”
“야! 너 그러기 있어? 내가 너 주기율표 못 외운다고 굴린 적 있냐고!”
“많이 굴렸잖아요?”
“헉!”
풀이 죽어 힐끔거리는 그녀를 보니 차마 굴리지는 못하겠다. 실제로 굴린 적도 없지만.
“쌤! 지금부터 일 년 내로는 졸업하셔야 하잖아요?”
“응, 그렇지.”
“그럼 올해 연말까지는 논문을 끝내는 게 편해요. 논문 다 쓰고, 학회지에도 한두 편 보내고. 그래야 졸업 학기 때 논문 심사를 편하게 받을 수 있어요. 특히 지금 쌤의 처지라면…….”
강우가 말을 줄였다.
신새벽도 무슨 뜻인지 금방 눈치챘다.
그녀의 논문 심사단에 노창열 화학과 교수가 포함될 것이 뻔했다. 심사 교수가 딴지를 걸기 시작하면 졸업이 늦어진다. 이를 방어할 유일한 방법은 그 전에 학회지에 논문을 실어서 증명하는 방법뿐이다.
즉 신새벽은 반년 이내로 학회지에 논문을 실어야 하는 처지다.
물론 강우라면 1주일 만에 논문 한 편을 뚝딱하겠지만, 평범한 대학원생이자 직장인인 신새벽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몇 년이 지나도 논문 한 편이 어려운 학생도 많다.
“아, 알았어. 열심히 할게. 그런데 넌 어떻게 이쪽 사정을 그렇게 잘 아니?”
강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신새벽은 자신이 논문에 집중하지 못했던 이유를 떠올렸다.
‘아아! 차 쌤 때문에…….’
다른 이유는 아니다. 강우와 함께 미국에 간 차도도가 신경 쓰여서다. 수시로 날아오는 차도도의 여행 일정과 사진, 강우의 시험 준비 및 결과 등을 확인하다 보니 논문에 손이 가지 않았을 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녀도 차도도를 따라 미국에 가는 편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차도도의 흉계에 빠진 셈인데 어쩌겠는가. 그것도 그녀 본인 탓인 것을.
“그래서 말인데요. 오늘부터는 고생 좀 하셔야…….”
강우가 자신의 노트북을 신새벽 앞으로 밀었다.
노트북 바탕화면을 본 그녀의 입이 쩍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