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유명인 (3)
- Passion for a better world.
-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정!
벽에 걸린 커다란 문구 앞에서 모두 다섯 사람이 웃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해맑았고 눈빛 가득 열정을 담고 있었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정!
바로 차도도를 비롯하여 고곽천재 네 사람이었다.
강우는 MIT에서의 마지막 날에 윌리엄 로저스 빌딩을 다시 방문했고 바로 이 문구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이 지금 강우의 노트북 바탕화면을 장식했다. 이전까지 이 노트북 바탕화면은 카이스트에서 찍은 단체 사진이었는데 이번에 교체했다.
“MIT 사진이네?”
“좋죠? 이 문구.”
“나도 가고 싶다.”
신새벽은 진심으로 부러웠다. 저 사진 속에 자신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저 사진 속의 인물이 차도도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면! 차도도에게 패배한 기분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강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쌤도 가실 수 있어요.”
“나도 알아. 비행기 푯값이야 얼마 하겠니?”
“그게 아니라…… 열정이 있으면.”
“아!”
신새벽은 강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챘다.
“강우야! 넌 MIT로 갈 거니?”
“확정은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죠.”
“흐음, 그래?”
이 순간 신새벽은 차도도를 영원히 앞지를 방법이 떠올랐다.
강우는 불과 2년 후면 미국으로 떠난다. 차도도가 아무리 선점해봐야 2년일 뿐이다. 그때부터 강우는 완전히 자유의 몸이다. 강우와 차도도가 아무리 가까워 봐야…….
“강우야? 나도 지금부터 열정을 불태우면…… MIT로 갈 수 있을까?”
“가능하겠죠?”
신새벽은 한국대 석사과정을 졸업한 후 MIT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자신을 그려봤다. 뭔가 그림이 나온다.
‘그래! 바로 이거다!’
강우가 MIT로 건너갈 때 자신도 유학 가면 된다. 그곳에서는, 차도도가 없을 그곳에서는 강우와 그녀는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수 있다. 나이? 그게 장애가 될까.
신새벽은 꿈에 부풀었다. 이를 현실화하려면 그녀가 MIT에 입학할 자격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부터 2년간 수준 높은 논문을 많이 쓴다면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신새벽은 주먹을 꾹 쥐었다.
“그래! 열정! 사람이라면 열정이 있어야지! 강우야? 앞으로 나 게으름 피우면 마구마구 굴려줘.”
강우도 신새벽의 다짐을 알아들었다. 방금 신새벽에게 연구자로서의 꿈이 피어난 듯했다.
“그래요? 그럼 오늘부터. 지금부터 굴러 볼래요?”
“헉!”
순간 신새벽은 안면을 콱 일그러트리고 강우를 노려봤다.
굴리는 날은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일단 공부부터. 강우는 노트북에 자료를 띄우고 설명을 시작했다.
“플라스마 내부에서 수소 원자핵의 거동을 분석해서 논문을 한 편 쓰자고요. 쌤과 쌤 지도교수 이름으로. 아마 지도교수님이 무척 좋아하실 거예요. 공짜로 연구실적이 하나 생기니까. 그래서…….”
상담실 탁자에 나란히 앉아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연구를 시작했다.
* * *
윤수아가 돌아오자 고곽천재는 다시 세미나실에 모였다.
방학 중에도 학생들을 위해 자습실과 도서관을 개방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학기 중에 비하면 도서관은 매우 조용했고 세미나실 예약도 여유로웠다. 그들은 이런 학교 분위기가 좋았다.
커다란 책상 위에 과자를 올려놓고 마주 앉아 공부하는 모습은 그들이 그리는 가장 이상적인 장면이었다.
물론 최대우와 윤수아의 손이 연필보다 과자를 더 자주 집고 있어 문제이긴 했지만.
강우는 헌팅턴 프로젝트의 연구 과정을 요약하여 짧은 지침서를 만들었다. 앞으로 2년간 그들의 지위를, 이 세계를 바꾸어 놓을 작업이다.
상온핵융합 기술이 2년 만에 상용화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토대를 확실하게 마련해야 한다. 과거에는 손강우 혼자만의 작업이었다면, 최근에는 강우 홀로 꿈꾸던 미래였다면, 이제는 그들 모두의 미래가 됐다.
더 많은 사람이 연구하면 더 크게 이룰 수 있다고 믿기에 강우는 아낌없이 내놓을 생각이다.
탁- 탁-
가벼운 키보드 소리가 울렸다.
손차희의 손놀림이 빠르다. 그녀는 지금 고속전철 관련 논문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강우야, 여기 괜찮을까?”
손차희가 자신의 노트북 화면을 강우에게 돌렸다.
강우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그게 우리가 주장하는 핵심이니까.”
카이스트 프로젝트 연구 보고서는 미국에 가기 전에 제출해서 프로젝트를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후속 작업은 남았다. 연구결과를 정리하여 논문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이제 손차희도 국내 학술지에 제출할 논문을 처리할 만큼 실력이 올라왔다. 이것은 강우도 예상하지 못하던 놀라운 일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손차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지만.
“거의 마무리 되겠네?”
“한두 시간 더 작업하면 끝날 것 같아. 이것은 물리학회지에 보낼 거지?”
“그래야지. 국내용이니까.”
논문 저자에 고곽천재 모두가 포함되어 있어서 저자 이름만 무려 6명이나 되는 논문이다. 국내 학술지에 발표하는 논문으로는 이번이 두 번째다.
다시 논문으로 시선을 집중하는 손차희를 물끄러미 관찰하면서 강우는 예전에 의문을 품었던 천재성이 진실이라고 확신했다.
그와 함께 연구했던 차도도의 능력이 점점 피어났듯이 이제는 함께하는 친구들도 그의 영향을 받고 있다. 가장 많이 바뀐 사람이 손차희와 최대우다.
지금 논문을 읽고 해석하는 손차희의 수준을 보면 절대 고등학생이라 할 수 없다. 대학생 아니 대학원생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다.
그녀가 이렇게 변한 이유는 그동안 고속전철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열심히 노력한 탓이 가장 크지만 다른 원인도 있지 않을까.
강우는 그 이유를 자신의 천재성에서 찾았다.
강우로 빙의한 후 그에게 생긴 능력이다. 다른 학생의 재능을 알아볼 수 있고, 이해력, 응용력 등의 천재성 속에 남을 가르치는 능력, 또는 남의 천재성을 끌어내는 능력이 숨어있었다.
그 덕분에 차도도와 신새벽, 지금은 손차희와 최대우가 영향을 받고 있었다.
손차희도 그의 가르치는 천재성에 영향을 받아 본인의 능력이 개화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남을 가르치는 천재성으로 고곽천재가 발전한다면 동료들이 그가 수행할 연구를 조금씩 덜어주고, 어깨의 짐을 함께 받쳐주기에 그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아낌없이 동료들과 공동연구를 수행한다.
“흐아암!”
최대우의 하품 소리가 들려왔다.
먹을 것이 떨어졌다는 소리다.
“막혔어?”
“배도 고프고…….”
강우의 질문에 최대우가 자신의 노트북을 그에게 보여줬다.
물리 문제풀이 센터. 바로 최대우의 블로그다. 놀랍게도 블로그에는 이전과 달리 영어가 잔뜩 적혀 있었다. 시리우스와 여신이 논쟁 중이다.
“애나가 또 질문을 쏟아놓고 갔나 보네.”
강우는 애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 최대우의 노트북 바탕화면은 애나와 최대우 둘이서 찍은 사진으로 바뀌었다. 입학 때부터 화면을 점거했던 걸그룹이 버려졌다.
“엄청 어려운 걸 던져놓고 갔어. 미국 고등학교에서는 이런 것도 배우나?”
“그 학생들은 AP 과정을 수료하니까. 애나라면…… 일반 물리까지는 오래전에 배웠겠지.”
물리 올림피아드에 출전한 것만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나도 일반 물리책을 봤는데…….”
고등학교에 들어온 후 최대우도 대학과정 물리책을 몇 번이나 봤다. 올림피아드를 준비하면서, 또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자연스럽게 공부하게 됐다. 이제는 최대우도 물리 전공자 수준에 들어섰다. 무려 국제 물리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 아닌가. 그것도 무려 만점인.
최대우의 시선이 애나가 올린 문제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최대우와 애나가 이런 식으로 선의의 경쟁을 펼친다면 두 사람에게 큰 발전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최대우도 애나 때문에 미국 유학을 고민할지도.
“안 풀리면 잠시 머리를 식혀. 네가 즐겨 보던 그 걸그룹 영상도 있잖아?”
“그거 지웠는데…….”
애나에게 완전히 밀려버린 걸그룹의 말로다.
대신에 최대우는 뉴스를 띄워 설렁설렁 읽기 시작했다.
“어?”
뉴스를 살피던 최대우가 모두에게 화면을 보여줬다.
“강우가 뉴스에 났어! 그때 인터뷰한다더니 그거야!”
최대우의 화면에 시선이 몰렸다.
“별다른 기사야 있으려고.”
강우는 피식 웃으면서도 친구들 틈에 끼어 기사를 읽었다.
- 천재 고등학생 등장! 미국에서 연구를 의뢰한 천재! 올림피아드 우승자!
온갖 수식이 붙은 타이틀과 제법 긴 기사가 쭉 나타났다.
“고려 과학영재고 2학년인 강우 군은 최근 미국 MIT에서 열린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와 물리 올림피아드에서…….”
윤수아가 기사를 또박또박 읽었다.
예상보다 훨씬 금칠하긴 했지만 강우의 입장에 맞게 잘 쓴 기사였다.
“이야! 이 기사로 보면 강우는 아인슈타인급의 천재야!”
“실제로도 아인슈타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친구들의 평가에 실소를 머금으면서 강우는 오랜만에 비행기를 탄 기분을 느꼈다.
이 기사로 과학고 학생들의 공부 여건이 조금 더 좋아진다면, 과학자의 꿈을 꾸는 학생들에게 희망을 준다면 충분하다.
그들은 기사에 올라온 반응을 확인했다. 예상외로 댓글이 많았다.
- 우리나라에도 이런 천재가 있었다니!
- 고려 과학고? 거기 좋은 데냐?
- 수학 하나만 만점도 대단한 건데. 물리도 만점이야!
- 우리 형이 고려 과학고 다니는데 학교서도 유명인사래.
- 우와! 학생이 연봉이 얼마야?
- 나도 고려 과학고 가야지!
“이 자식들 절반이 우리 학교 애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과학 문맹이야.”
좋은 댓글도 있었으나 눈을 찌푸리게 하는 댓글도 있긴 했다.
- 다 학원빨이야, 학원빨!
- 지금까지 천재라고 떠들다가 사라진 사람이 한둘이 아님.
- 빌 게이츠도 우리나라에 오면 용산에서 용팔이 한다더라.
- 이거 구라야, 구라. 고등학생이 어떻게 프로젝트를 하냐?
- 미국 항공모함 침몰하겠네 ㅋㅋㅋ
- 내년 연말 되면 의대 진학했다고 뉴스에 나올 거다.
“어휴! 너무 하네.”
윤수아가 댓글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원래 댓글이라는 곳이 저런 법이니 강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댓글 사이에서도 더 열심히 해서 노벨상을 타오라는 응원이 보여 강우는 마음이 흐뭇해졌다.
이래저래 뉴스를 넘기고 있자니 휴대폰이 울렸다. 차도도였다.
- 강우야, 지금 어디 있어?
“세미나실요.”
- 응? 그래? 그럼 얼른 거기에서 피해.
“네?”
- 얼른! 혼자서!
차도도의 말이 다급해 보여 강우는 세미나실을 튀어 나갔다.
복도에 나오는 순간 저쪽 계단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강우는 얼른 반대편 자습실로 숨어 무슨 일인지 지켜봤다.
방금 그가 있던 세미나실 앞에 몰려든 사람들이 대략 십여 명이었다. 그들은 자습실임에도 소리를 높였다.
“강우 학생 어딨어요?”
“강우 학생 찾으러 왔습니다만.”
“여기 있다는 소문 다 듣고 왔습니다!”
“학생이 강우 군인가요?”
졸지에 강우로 지목당한 최대우가 손을 젓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얼핏 보니 기자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고 마치 조폭처럼 덩치가 큰 사람도 있다. 도무지 정체가 짐작되지 않았다.
한바탕 난리가 일고 있을 때 차도도가 그제야 뛰어 올라왔다.
“여러분! 여기에서는 조용히 하셔야 해요!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잖아요!”
차도도가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
“대체 왜 이러세요? 어디에서 오셨어요?”
“저는 고려일보 기자입니다. 강우 군을 취재하려고…….”
“저는 인터넷 신문 월드 뉴스 기자이고요. 강우 군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자…….”
“우리는 프로야구단 피닉스에서 왔습니다. 강우 군과 프로젝트를 체결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