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197화 (197/325)

제197화 유명인 (4)

멀리 숨어서 지켜보던 강우는 대략적인 상황을 이해했다.

그날 중앙 사이언스 기자가 취재한 뉴스가 기폭제가 됐다. 기삿거리가 된다고 예상한 언론사에서 몰려온 것이다. 게다가 프로야구에 과학을 적용한 기사도 있었으니 프로야구단에서 그를 내버려 둘 일이 없다. 프로젝트로 괜찮은 투수 한 명만 키워도 이득이니까.

역시 언론의 힘이 무섭다고 실감하면서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했다.

지금 그가 저 앞에 나서면 모두 해결되겠지만…….

“……시달리기 싫다.”

새삼 저런 식의 주목을 받고 싶지 않다. 적어도 지금 이 자리만은 피하고 싶다. 그리고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가십성 뉴스에는 그만 나가고 싶다.

강우는 반대편 복도 계단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뒤쪽에서 다시 고함이 들려왔다. 괜히 차도도를 고생시키는 기분이다.

건물 밖으로 나와 하릴없이 운동장을 걸었다.

여름의 푸르름이 온몸을 적신다. 작열하는 태양 빛에서 그는 수소 핵융합 에너지를 몸소 체험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과학자의 직업병일지도 모르겠다.

- 오늘 기숙사에 들어가지 마. 우리 집에 가 있으렴.

차도도의 톡이 날아왔다.

기숙사 길목에 기자들이 잠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다.

강우도 그게 나을 것 같아 교문을 나섰다. 고곽천재 친구들에게 소지품을 챙겨달라고 톡을 넣었다.

* * *

강우는 차도도의 서재에 걸린 캐리커처 그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차도도와 그가 마주 보는 두 그림이다. 각자의 인상이 선명하다.

서재에서 참고논문을 뒤적이며 연구에 몰두하다가 가끔 고개를 들어 캐리커처를 쳐다봤다. 그를 향해 웃음 짓는 차도도의 캐리커처가 편안함을 안겨줬다.

“예쁘다…….”

강우는 벌떡 일어나 캐리커처 앞에 섰다. 그리고 천천히 손으로 캐리커처를 쓰다듬었다. 물론 부드러운 도화지 촉감이라 별다른 느낌이 있을 리 없지만.

그의 손가락이 차도도의 눈썹과 코, 입술 부분을 천천히 만졌다.

불현듯 미국에서의 마지막 날 밤이 떠올랐다.

그날 무슨 용기가 났던 걸까. 감히 하늘 같은 선생님의 입술을 만지다니.

평소라면 생각지도 못할 행동을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그도 잘 모른다. 다분히 충동적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지금도 그날의 감촉이 손가락에 살아있다.

차도도는 그에게 어떤 존재일까.

단순한 담임 선생님을 벗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그냥 그녀가 예뻐서? 그녀의 미모가 대단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그와 그녀의 나이 차를 고려하면 그와 그녀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을 설명하기 쉽지 않다.

“손강우였어도 그랬을까…….”

답은 ‘그렇다’였다. 요즘 들어 차도도와 자신 사이에 연결된 운명적인 끈을 직감한다. 단순히 그의 정신연령 나이가 많아서 손차희 같은 또래 여학생과 이성적인 교감을 얻지 못하고 나이가 많은 차도도에게 끌리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차도도보다 신새벽에게 더 끌렸겠지. 차갑고 이성적인 차도도에 비하면 뜨겁고 부드러운 신새벽이 훨씬 접근하기 쉬우니까. 신새벽의 외모도 충분히 만족스러우니까.

강우는 차도도를 선택하는 그 마음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앞으로 차도도는 그와 함께하는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천재성의 교감 때문인가…….”

차도도와 함께 연구하면 심적으로 편안하다. 그녀는 그의 의도를 잘 받아들인다. 천재들 사이에서만 서로 통하는 뭔가가 있다.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강우는 다시 캐리커처를 쓰다듬었다. 지금 이 그림이 실물이라면 더 좋겠다.

아래층에서 북적이는 소음이 들려왔다.

거실로 내려가 보니 차도도가 들어와 있었다.

“아아! 기자들이 엄청 성가시네.”

“돌아갔어요?”

“일단은. 학교로 공식적으로 인터뷰를 요청하라고 했어.”

“그럼 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 교장 선생님이 알아서 잘라 주시겠지.”

대충 수습했다는 뜻이다. 과학 기사라면 이렇게 난리가 날 일이 없다. 대중은 과학에 무관심하니까. 단순히 천재라는 타이틀을 붙인 흥밋거리 접근일 뿐이다.

“밥은 먹었어?”

“네. 오다가.”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여기에서 자야겠네.”

“그래야겠죠?”

“열심히 공부하면서.”

차도도가 미소를 지었다.

서로 마음이 통한 듯 그들은 함께 서재로 올라갔다.

* * *

프린트물을 넘기면서 차도도가 만족감을 표시했다.

“차희도 많이 늘었어. 강우 네가 도와준 건 아니지?”

“전 방향만 제시했는데요?”

“그럴 것 같더라. 고속전철 관련 논문, 고곽천재 모두의 이름이 들어가는 이 논문도 내용이 괜찮아. 차희의 발상이 신선하거든. 특히 이 부분은…….”

“그렇죠?”

부쩍 커버린 제자를 자랑스러워하는 선생님의 표정이 보인다. 뛰어난 고등학생에서 어느 틈에 독자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과학자로 바뀐 제자가 그녀의 자부심으로 변했다.

강우는 선생님이 아니지만 그녀의 기분을 알 것 같다.

차도도의 반짝이는 눈빛에서 강우는 새로운 점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차도도도 논문을 평가할 줄 알게 됐다. 간단한 일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남의 논문을 평가하려면 적어도 그 저자보다 더 높은 경지에서 내려다봐야 하니까.

예전의 그녀라면 절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차도도는 성장했다. 본인도 느끼지 못하는 시간 동안.

“우리 논문은 어떻게 되었죠?”

“그때 헌팅턴에서 장담했던 세 번째 논문이…… 사실상 초안은 완벽하게 잡혔는데…….”

차도도가 몸을 일으켜 투명칠판으로 걸어갔다.

“이 식을 보면…….”

그녀의 손이 미끄러지면서 복잡한 수식이 칠판에 그려졌다. 수식을 쓰고 간략한 설명을 곁들인 그녀는 강우와 눈을 맞춘 후 다시 식을 전개했다.

칠판을 들여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수식을 써 내려가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다.

수식이 몇 줄 더 추가되자 어느새 칠판의 절반이 수식으로 덮였다.

“이 부분에서 약간 어려워지긴 했는데…….”

차도도의 손이 머뭇거렸다. 막혔다기보다는 전개가 매끄럽지 않아 고민하는 표정이다.

강우는 몸을 일으켜 그녀의 옆에 섰다.

그리고 그녀가 손에 쥔 흰색 마카를 잡았다. 두 사람의 손이 부드럽게 스쳤다.

“이 부분은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죠.”

강우는 수식에 새로운 가정을 추가하고 다른 방향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설명하면서 강우는 차도도를 유심히 관찰했다.

마치 목이 마르던 차 샘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차도도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 그렇구나.”

차도도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강우는 손에 쥔 마카를 다시 그녀에게 넘겼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스치면서 부드러운 감각이 전해지자 몸이 움찔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당황한 눈빛으로 차도도를 바라보자 그녀도 같은 기분이었던 듯 그와 눈을 맞히고 있었다.

동시에 웃음을 터트린 후 차도도가 다시 수식을 풀었다.

“이 부분이 해결되면 그다음부터는 정석 그대로야. 조금 복잡해 보이지만 특별한 건 없고…….”

스윽- 스윽-

마카가 투명칠판 표면에서 미끄러지는 소음이 귓전을 나지막하게 울렸다.

어느새 칠판이 채워지자 절반가량을 지운 차도도가 계속 수식을 써 내려갔다.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으면서 차도도는 마침내 수식 풀이를 끝냈다.

“자, 여기까지. 이 부분이 결론이야.”

차도도가 마지막 부분을 두 줄로 쭉쭉 그어 강조했다.

“내 생각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논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강우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차도도가 그에게 감사했다.

“요즘 새삼 느끼는 건데…… 내가 정말 많이 늘었어. 예전에는 단지 고등학교 물리를 조금 잘 이해한다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이 어려운 첨단 물리학을 풀고 있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이게 되기 시작했거든. 요즘은 예전에 네가 이 칠판에 정신없이 수식을 전개하던 그 기분을 이해할 것 같고……. 이 모든 게 너 덕분이야.”

“말로만요?”

갑자기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사실은 수식을 전개하면서 설명하는 그녀의 자태가 너무 우아하고 예뻐서였다. 티비에서 아름다운 연예인을 보지만 그녀처럼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생각에 잠겨 수식을 노려보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미모를 풍긴다.

그의 돌발적인 반응에 차도도가 놀란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연구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나 보네.”

차도도가 조용히 그와 눈을 마주쳤다.

강우는 그녀의 중얼거림이 그를 향한 말이 아니라 그녀 자신을 향한 말이었다고 이해했다. 과학은, 미지의 호기심을 풀어나갈 때 커다란 희열을 전해주지만 반대로 풀 수 없는 장벽에 부딪혔을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커다란 고통을 안겨준다. 그 스트레스는 첨단을 걷는 과학자일수록 심하고 어떨 때는 생명을 갉아먹는 고통을 수반한다.

차도도도 연구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을수록 그런 과학자의 삶에 빠져들 것이다. 지금은 초입 단계일 뿐이지만.

그런 스트레스에 몸이 잠식당하다 보면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저지르기도 한다. 일반인에 비하면 지극히 이성적인 과학자 가운데 유달리 자살한 사람이 많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그를 쳐다보는 차도도의 눈빛은 당황스러움을 품으면서도 입가에는 살짝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소 이중적인 표정으로 그를 향해 다가온 차도도가 두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순간 강우는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억이 난다. 아니,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보스턴에서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을 때 느꼈던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을.

“이거면 될까…….”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면서 차도도의 손가락이 가볍게 강우의 눈과 입술을 쓸었다. 눈을 감자 그녀의 향기가 예민해진 코로 스며들었다.

강우는 흡사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됐지?”

불과 찰나의 시간이 지나가고 차도도의 손이 떨어졌다. 아쉬움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놀랍게도 그녀의 손이 닿은 그 찰나의 시간에 강우는 내면에 쌓여 있던 스트레스가 확 풀리고 마음의 평화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 어떤 비타민제나 피로회복제보다 월등한 효과였다.

마음과 달리 강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동시에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로 가져갔다.

방금 그녀가 한 것처럼 그녀의 눈썹에서 시작해서 천천히 코로 미끄러진 다음 붉은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순식간에 바뀌는 그녀의 눈빛이 드라마틱했다.

“욕심은!”

당황한 차도도가 한 발 뒤로 물러서면서 그녀의 얼굴에서 손이 떨어졌다.

그녀도 그 짧은 순간에 그처럼 평화를 얻었을까. 아니면 더 큰 혼란을 얻었을까.

차도도가 그의 눈을 피하면서 탁자에 앉았다.

머쓱해진 강우도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침묵이 내렸다.

“논문은 이런 식으로 마무리 지으면 되겠지?”

어색한 표정으로 차도도가 프린트한 논문 초안을 내밀었다.

“네, 충분해요. 그러면 우리 둘이 쓴 핵융합 논문과 차희가 쓴 고속전철 논문이 곧 끝나겠네요.”

“늦어도 방학 끝날 때까지는 제출 가능할 거야.”

다시 차도도의 표정이 평소처럼 돌아갔다.

두 사람의 공통 작품인 핵융합 세 번째 논문이 기지개를 켜고 모습을 드러냈다. 학계에서 두 사람의 존재를 공고히 만들어줄 논문이.

실내를 채웠던 따뜻한 감성은 사라지고 다시 그들 사이에 수식으로 포장된 이성적인 공간이 자리 잡았다. 그 어느 곳에도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감성적인 공간은 남지 않았다.

서재 탁자에는 참고논문과 책자가 쌓였고 칠판은 다시 수식으로 채워졌다. 벽에 걸린 두 사람의 캐리커처가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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