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화 방송 섭외 (2)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녀석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수학여행을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에게 대들고 학회장에서 차도도 앞을 막아서던 녀석이다.
지금 다시 돌이켜보니 고등학생답지 않은 녀석의 행동에 헛웃음이 났다.
“웃긴 녀석이군. 고등학생 주제에.”
오래전 그가 녀석의 병문안을 갔던 이유도 떠올랐다.
“가난한 흑수저였지. 어떻게 그런 놈이…… 천재일 리가 없어. 녀석이 핵융합 논문을 썼다니? 말이 안 되지.”
마도환은 부친이 장관을 지낸 전형적인 금수저 집안이다. 재벌은 아니어도 권력으로 따지면 연줄이 절대 꿀리지 않는다. 반면 강우는 시골에서 간신히 끼니를 때우는 집안 출신 아닌가.
자존심이 팍 상했다. 그런 녀석이 차도도 곁을 어슬렁거리니 더 기분이 나빴다.
“이 기사의 진실은…… 차도도인가? 그 여자가 대단한 건가 보군. 그녀가 핵융합 분야에서 독자적인 성취를 이뤘고 이를 제자와 함께 연구했다고 했나? 착하기도 하지. 고등학생이 해외 학술지에 논문을 낸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일이 맞아떨어졌다. 고등학생보다 고등학교 선생님의 업적이라고 해야 그나마 사리에 맞았다. 수시입학을 위해 학생 이름을 끼워 넣은 것뿐.
차도도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 연예인을 능가하는 외모가 시선을 끌었었다. 그래서 연락을 유지하며 찝쩍대고 있었는데…….
“설마 나와 같은 분야를 연구하고 있었다니…….”
이건 인연이었다.
그는 한국대 교수다. 이 나라에서는 최고 지성이다. 당연히 고등학교 교사에 불과한 차도도는 그를 동경할 것이다.
“차도도가 한국대 학부 출신이었지? 대학원 석박사과정에 지원하라고 해야겠군.”
실력파인 차도도를 아래로 받아들이면 헌팅턴 프로젝트도 순항할 것이다. 그가 탄탄대로를 걷기 위해서라도 그녀를 끌어들여야 한다.
그 이후 어떻게 할지는 뻔하다.
대학원에서 교수와 대학원생은 주인과 머슴의 관계이니 차도도가 그의 밑에서 학위 과정을 밟으면 그의 마수를 절대 피할 수 없다. 차도도가 학위 논문을 쓸 때쯤 함정에 빠트린다면 지난 세월이 억울해서라도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여차하면 결혼해도 되고. 차도도 같은 미인에 지성인이라면 배우자감으로서도 완벽하다. 다만…….
- 넌 재벌집 딸과 결혼하거라.
유달리 돈에 집착하던 아버지의 지시가 떠올랐다.
“차도도네 집안이?”
그 부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교사라면 그저 그런 집안일 것이다. 그의 아버지의 욕심을 충족할 배경은 아닐 가능성이 컸다.
모든 것을 다 만족할 수는 없다.
마도환은 휴대폰을 들어 차도도를 찾았다. 역시 예전에 전화번호를 교환해둔 적이 있었다.
통화음이 끝날 때까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자꾸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라서다.
- 마 교수님?
차도도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마저 감미로웠다.
마도환은 음흉한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차도도 선생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이번에 근사한 논문을 내셨더군요. 뉴클리어 퓨전과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요. 축하드립니다.”
마도환은 차도도를 축하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상대방이 그에게 예의를 다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면 일을 진척하기 더 쉽다.
한참 잡소리를 늘어놓은 마도환은 마침내 핵심을 꺼냈다.
“혼자 핵융합 연구를 수행하려니 힘드시죠? 말씀드릴 일이 있어 한 번 뵈었으면 합니다만…….”
다소 떨떠름한 반응이 전해졌으나 마도환은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대로 한번 오시지요, 나눌 의견이 많습니다. 아! 바쁘시다고요? 방학이라도 연구에 집중하시니 시간이 부족하긴 하시겠지만…….”
전화하던 마도환의 안색에 먹구름이 끼었다.
“그러면 제가 그쪽으로 가지요. 학교로 찾아뵐까요? 아…… 알겠습니다. 가우스 카페요? 거기로 가지요. 그렇죠, 얼굴을 봐야 정도 생기는 거니까요.”
약속을 잡은 마도환이 흡족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여자가 꽤 앙칼지군. 그래야 제맛이지.”
마도환은 차도도와의 관계를 어떻게 끌어갈지 머리를 굴렸다.
* * *
강우는 따가운 햇볕을 손으로 가리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 더운 날에 커피 심부름이라니!”
“그래도 내가 같이 가잖아?”
최대우가 나란히 보조를 맞추며 강우를 위로했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건만 여전히 날씨는 더웠다.
오늘도 세미나실에 모인 고곽천재는 과자가 떨어지자 사다리를 타고 음료를 마시기로 했다.
하필이면 운이 나쁘게도 강우가 딱 걸렸다.
강우는 편의점에서 탄산음료를 살 생각이었다. 편의점이 그나마 학교에서 제일 가까우니까.
그때 신새벽이 등장했고 그녀는 커피를 사 오라고 주문했다. 갑자기 손차희와 윤수아의 메뉴도 바뀌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통일. 더운 여름에는 아아가 최고라나? 그것도 편의점 아아는 사절이란다.
커피도 브랜드를 따지는 여자들 때문에 강우는 더 멀리 교문 밖까지 나가야 했다. 다행히 착한 최대우가 동행해서 외로움을 면했지만.
“신 쌤만 아니었어도 편의점에서 싸게 끝낼 수 있었는데.”
“여자들은 커피를 너무 좋아해.”
강우와 최대우는 투덜거리며 교문을 나섰다.
이 동네에서 그나마 가까운 브랜드 아메리카노는 한 곳뿐이다. 학교로 들어오는 입구에 가우스 카페가 보였다. 요즘은 방학 때라 저 카페도 비교적 한산하다.
“강우야, 그래서 화이트 엔젤은 어떻게 됐어?”
며칠 전 학교를 찾아와 소동을 벌였던 방송 섭외 결말이 최대우는 궁금했다. 그날 차도도가 주연을 데리고 간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방송에 나가기로 했어.”
“너만?”
최대우의 최대 관심사는 자신도 방송국을 구경할 수 있을지였다. 정확하게는 방송국에서 화이트 엔젤을 볼 수 있는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그에게 인생의 꿈이었다.
“아니, 나랑 너랑 쌤이랑.”
“세 사람?”
“응, 그렇게 됐어.”
강우가 탐탁지 않은 듯 투덜댔다.
애초에 차도도는 방송 출연을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주연의 간곡한 부탁과 담당 피디와 통화한 후 프로그램의 취지에 공감했다.
그렇다고 모든 관심이 강우에게 쏟아져 강우가 흔들리기를 원치 않았다. 게다가 강우 혼자서는 제대로 방송에 적응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고곽천재를 모두 붙이려 했다.
방송국 측에서는 다른 학생의 출연을 완곡하게 거절했고 밀당 끝에 최대우를 옆에 붙였다. 그마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녀도 함께하겠다고 주장했다. 방송에서 담임 선생님의 견해도 필요하다고 우겼다.
그렇게 강우, 최대우, 차도도가 예능 프로에 출연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으아! 그럼 이번에는 화이트 엔젤을 제대로 볼 수 있겠네?”
“아니, 그날 왔던 주연인가 조연인가 하던 애만.”
“으아! 나도 드디어 연예인과 대화해 보는구나!”
“그날 한 거 아니었어?”
강우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최대우에게 핀잔을 줬다. 언제는 MIT에 가겠다고, 고곽천재가 우선이라고 화이트 엔젤 사진을 몽땅 버리더니 다시 걸그룹으로 옮겨갔다.
“어쨌든! 주연은 예쁘잖아?”
“차희가 더 예쁜데?”
강우는 내심 차도도가 최강이라고 평가했다. 예쁘다던 걸그룹도 실제로 보니 손차희나 별반 차이가 없었으니까.
“에이, 그래도 그건 아니지.”
“너 언제는 애나 좋다며? 애나한테 확 일러버린다?”
“으아! 안돼!”
“이 자식이, 욕심은.”
최대우의 반응은 사춘기 청소년이니 이해할만하다.
어쨌든 정신연령이 남다른 강우는 걸그룹이든 연예인이든 발에 채는 돌멩이처럼 보여 전혀 흥미가 없었다.
가우스 카페에 도착했다.
계산대에서 아메리카노를 5잔 주문했다. 평소 핫초코를 먹던 강우도 오늘같이 더운 날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바꿨다.
커피가 나올 때를 기다리며 최대우와 장난치고 있자니 창가에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차도도다.
“어? 쌤?”
무심코 다가가던 강우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 차도도의 맞은 편에 차도도만큼이나 익숙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마도환! 차도도와 마찬가지로 눈을 감고도 알아볼 사람이다.
‘저 자식이 여긴 왜? 하필이면 차도도를 만나?’
저 둘을 떨어트려 놓아야 하는데, 가서 깽판을 칠지 아니면 일단 기다려볼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분위기가 심상찮다. 마도환은 평소처럼 자신감에 찬 표정이었고 차도도는 어딘지 모르게 굳어 있었다. 둘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보다 백 배 낫지만 저 둘이 함께 있는 자체만으로도 강우는 심기가 뒤틀렸다.
어쨌든 못 봤으면 몰라도 봤으니 저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커피 3잔을 캐리어에 담고 최대우와 한 잔씩 손에 든 강우는 차도도에게 다가갔다.
“쌤?”
차도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마도환은 심기가 불편한 듯 그를 노려봤다.
“여기서 뭐 하세요?”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옆에서 마도환이 끼어들었다.
“혹시 강우 군인가?”
“누구세요?”
당연히 누구인지 알지만 강우는 모르는 척 불량스럽게 물었다.
기분이 팍 상한 마도환이 찜찜한 표정으로 소개했다.
“나, 한국대 물리학과 교수 마도환이네. 예전에 비행기에서 봤었지.”
“아, 네. 동네 아저씨는 아니시네요. 근데…… 무슨 일이세요?”
강우는 건성으로 고개만 까닥였다.
“아, 잠시 일이 있어서…….”
그때 차도도가 마신 음료를 정리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님, 전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무심코 손을 뻗어 차도도를 붙잡으려던 마도환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손을 거두었다.
“쌤, 가요!”
강우는 커피 캐리어를 최대우에게 넘긴 다음 빈손으로 차도도의 팔을 보란 듯 붙잡았다.
마도환이 멍한 표정으로 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 * *
커피를 최대우에게 들려 보내고 강우는 차도도화 함께 학교 운동장 가장자리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다행히 나무 그늘인 데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 더위가 한결 가셨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후 강우는 차도도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쌤, 무슨 일인데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녀요? 말씀해보세요.”
차도도가 강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에서 의문이 감지되었으나 강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마도환이 개입되면 이성적이지 못한 경향이 있음을 알지만 상관없었다. 무엇보다 마도환이 차도도를 찝쩍대는 것만은 참을 수 없으니까.
“마 교수가 2학기 때 여기에서 강연하시겠다네.”
마도환의 강연은 예전부터 말이 나온 터라 새삼스럽지 않았다.
“그것 말고요.”
“음, 마도환 교수가 나보고 한국대 석박사과정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갑자기 그 말이 왜 나오는데요?”
“이번에 발표한 논문 때문인가 봐. 마 교수 연구 분야랑 겹친다고, 내게 딱 적합하다고…….”
보통의 경우라면 마도환의 제의는 타당하다. 차도도가 대학원 과정을 다니겠다면 최상의 케이스다.
하지만 강우는 마도환의 속셈이 훤히 보였다. 마도환은 차도도의 능력을 이용해 헌팅턴 프로젝트를 돌파하겠다는 의도를 품고 있다. 마도환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다.
“그래서 쌤은 대학원 진학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그럴 리가 있겠니?”
일전에 한태규도 차도도에게 카이스트 석박사과정을 권했던 기억이 났다. 차도도는 카이스트와 한국대 양쪽에서 제안을 받았다.
강우는 일전에 들었던 차도도의 과거를 떠올렸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할 수 없었다고. 당시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었다.
다만 그 대화에서 강우는 그녀의 과학자 꿈을 읽었었기에 그녀가 마도환의 제안에 혹하지 않을지 걱정했다.
아직 흔들리지 않은 듯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