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방송 섭외 (3)
강우는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든 착잡함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 상황은 사실 양날의 검이었다. 차도도가 마도환 밑으로 진학하지 않아 만족스럽지만, 훗날 차도도와 MIT에 함께 가고 싶은 강우는 그녀의 진학에 장애물이 많다고 직감했다.
하지만 지금 닥친 일이 아니어서 차후에 고민할 생각이다. 지금은 그녀가 한국대 대학원 진학을 고려하지 않아서 무척 기뻤다.
“왜?”
차도도가 그의 태도에서 수상함을 느꼈나 보다.
“아뇨.”
“음, 혹시 마도환 교수를 싫어하니?”
“왜요?”
“예전에 제주도에 갔을 때도 그랬던 것 같아서. 하긴 이번에 요셉 교수가 안 좋은 말을 하긴 했지만…….”
지금 당장에는 마도환 교수와의 반목을 이야기할 수 없다. 말한다고 이해할 내용도 아니고. 고등학생 주제에 한국대 교수의 수준을 논하는 것도 어불성설이고.
“하여튼 혹시라도 대학원 생각하시면 꼭 저에게 먼저 말씀해주셔야 해요.”
“알았어.”
대충 그렇게 넘겼다.
둘이서 벤치에 앉아 있으니 괜히 어색해서 강우는 커피를 연속으로 마셨다.
차도도도 분위기를 바꾸려고 화제를 돌렸다.
“아! 방송 작가에게서 간략한 대본이 넘어왔어. 이메일로 보내줄게.”
“언제라고 했죠?”
“이번 금요일. 개학하기 전에 찍어야 하니까. 온종일 녹화해야 해. 대우에게도 말했지?”
“이제 말해야죠.”
요즘 최대우도 별로 할 일이 없으니 언제로 잡히든 상관없다.
“그래도 티비니까 전날 미리 준비해.”
“뭘 준비해요?”
“옷이랑, 머리도 하고…….”
“흠, 저야 뭐, 하나 마나 똑같은데……, 쌤도 해요?”
“나도 헤어숍은 가야겠지?”
강우는 새삼 차도도를 다시 훑었다. 그녀가 어떻게 단장하든 그의 눈에는 예쁘게만 보인다.
“이야! 우리 쌤 더 예뻐지겠네!”
“어휴, 장난꾸러기.”
차도도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강우가 커피를 모두 비우자 차도도가 일어났다.
“자, 그만 가자. 그리고 네 옷은 내가 적당히 준비해줄게.”
“고마워요.”
그러잖아도 방금 옷을 준비하라는 말에 걱정했었다.
방송은 적당히 연출만 잘하면 되니까…… 편하게 찍을 생각이다. 괜히 잘 보이려고 애쓰면 더 어색해지니까. 어차피 그는 연예인도 아니고 방송으로 승부를 볼 이유도 없다. 그냥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평범한 고등학생으로서 과학에 몰두하는 학생도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차도도와 함께 출연하니 다행이다. 그렇지 않으면 거절했을 것이다.
* * *
방송 녹화는 무난하게 끝났다.
솔직히 강우는 이게 재미있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찍다가 다시 찍고, 찍다가 끊어지니 재미가 있는지 아닌지 방송 초짜인 그는 구분이 어려웠다.
오후 늦게까지 녹화가 이어지자 온몸이 파김치가 되어 힘들기도 했고. 하지만 시청률이 제법 잘 나오는 예능 프로라니까 이런 장면을 잘 편집하면 꽤 재미있어진다나.
연예인을 만난다는 기대도 거의 없었다. 사실 강우는 아는 연예인도 없고 관심도 없으니까.
메인 MC는 가끔 티비에서 봤기에 얼굴이 익숙했고 이름도 낯이 익은데 보조 패널로 출연한 다른 연예인은 전부 처음 보는 사람뿐이었다. 그래서 별다른 흥미를 얻지 못했다.
물론 주연과 대화하느라 넋이 나갔던 최대우는 완전히 달랐지만.
그렇게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가장 큰 행사를 무사히 보냈다.
2학년 2학기를 시작했다.
“우와! 강우 유명해졌더라?”
다시 만난 반 친구들이 하나같이 공통 인사를 보냈다.
뉴스에 잠시 올랐던 기사를 본 학생이 제법 많았다. 이것들이 공부는 안 하고 인터넷만 하는지.
“대한민국의 새로운 천재! 수학과 물리 석권! 캬! 누가 썼는지 몰라도 기사 잘 썼더라!”
“강우야! 올림피아드 금메달 축하해!”
“방학 내내 고생했겠다.”
반 친구들이 환호하며 그를 반겼다.
그 와중에도 만나자마자 시비를 터는 녀석이 있었다. 바로 고현성이다.
“어이, 브라더! 미국 대학 구경 잘했어?”
“잘했지.”
“차희랑?”
“그래, 차희도 같이 갔었으니까.”
고현성의 인상이 콱 찌그러졌다. 손차희가 나오면 항상 저렇다.
“나도 같이 가고 싶었는데…… 으으, 내가 수학을 못 해서 한이다.”
“MIT는 볼 만하더라.”
“넌 하버드는 안 가봤어? 차희 인스타에 MIT랑 하버드 둘 다 올라왔던데.”
“난 하버드는 관심 없어서.”
“차희는 하버드를 더 많이 찍어놨던데…… 설마? 차희가 혹시 하버드로 유학 가려나?”
고현성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이 녀석은 손차희가 한국대로 진학하리라 예상하고 자신도 한국대를 목표로 공부 중이었다. 목표인 한국대가 갑자기 하버드로 바뀔 판이니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다.
“아직 별말 없던데? 하지만 미국 대학을 둘러봤으니 보는 시야가 더 넓어졌겠지.”
손차희의 꿈은 아직 모른다. 하지만 이번 미국 여행이 그녀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은 분명하다.
유학을 고려하는 강우에게는 절대 나쁘지 않다. 손차희가 같은 학교로 유학 가지 않더라도 그녀에게는 유학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니까.
어쩌면 고곽천재 멤버들은 여름방학을 지나면서 모두 유학의 꿈을 키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윤수아는 아버지가 이미 미국에 있으니 가장 여건이 좋다. 손차희는 집이 부유해서 유학이 부담스럽지 않다. 최대우는…… 단순하게 주변 환경만 보면 유학이 사실상 어렵지만, 헌팅턴 프로젝트를 잘 이용하면 의외로 쉽게 유학의 길을 뚫을 수 있다.
모두 본인이 하기 나름이다.
“브라더! 내가 부탁하는데…… 차희에게 유학 바람 넣지 마. 응?”
“그게 마음대로 될까? 그건 차희가 알아서 결정하겠지.”
“으아, 큰일인데.”
고현성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고민에 빠졌다.
녀석이 하는 짓을 보니 올해 겨울 축제에서도 또 발라드 노래를 부른다고 떼를 쓸 것 같다.
* * *
기숙사에서는 티비를 보기 힘들어서 강우는 최대우와 함께 차도도의 거실을 점령했다.
녹화했던 예능 ‘찾아라, 인물!’은 개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토요일 이른 오후에 방송 전파를 탔다.
벽에 걸린 대형 티비 앞에 나란히 앉아 시청했다. 강우와 최대우, 차도도까지. 모두 티비에 출연한 사람들이었다.
손차희와 윤수아가 합류하겠다고 했으나 거절했다. 타인이 같이 보면 괜히 쑥스러워서.
그런데 막무가내로 차도도의 집에 쳐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바로 신새벽이었다.
결과적으로 네 사람이 같이 어깨동무하고 티비를 시청하게 됐다. 최대우 덕에 과자를 푸짐하게 쌓아놓고.
본인의 얼굴이 크게 나온 화면을 본 강우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하필이면 티비마저 엄청 컸다.
‘내가 저렇게 생겼었나?’
아직도 강우는 스스로의 얼굴이 낯설었다.
- 대한민국을 빛낼 천재를 소개합니다! 고려 과학영재고 2학년인 강우와 최대우 학생입니다.
메인 MC가 두 사람을 소개했고 국제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라는 자막이 떴다.
이어서 MIT의 자료 화면이 나오고 올림피아드가 무엇인지, 역대 한국 팀의 수상 실적이 소개됐다.
예능 프로그램이라 딱딱하지 않고 적절하게 화면을 배치했다.
- 자! 강우 군은 수학과 물리 양쪽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거죠? 이게 축구에서도 금메달, 야구에서도 금메달! 이런 성과와 같은 거죠?
- 아, 거기까진 아니고요, 육상 100m에서 금, 200m에서도 금, 이런 거랑 비슷하죠.
강우가 재치 있게 MC의 질문에 답변했다.
- 그것보다는 100m 금, 마라톤 금. 이거랑 더 비슷할 겁니다.
이번에는 최대우가 끼어들었다.
- 어쨌든 대단하다는 거네요. 역대 그런 천재가 있었습니까?
- 수학과 물리에서 금메달을 딴 학생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과목에서 동시에 만점으로 최우수상을 받은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 역시 천재가 맞네요. 어쨌든 수학과 물리 두 과목에서는 전 세계 어떤 학생보다 잘한다는 뜻 아닌가요?
- 그렇죠.
- 아! 저랑 완전히 반대네요. 전 고등학생 때 수학 과학 시간에는 잠만 잤거든요.
메인 MC가 감탄사를 연발했고 옆에서 뻘쭘하게 서 있던 주연이 추임새를 넣었다.
- 저도 그 시간에는 잠만 잤어요.
- 그럼 이 두 학생이 천재가 맞는지 테스트해볼까요? 자! 구구단 게임부터 시작합니다. 구구단 틀리면 벌칙 있어요!
예능답게 갑자기 구구단 게임이 시작됐다. 정작 강우와 최대우는 잘하지 못해 웃음을 남발했다. 천재라고 계산을 빨리하는 것은 아니니까. 사칙연산 실력은 평범했다.
중간에 각종 예능을 섞어 재미를 더하면서 고등학생의 현실과 공부법까지 정보를 전달했다. 나아가 대한민국 과학의 현실과 과학고 학생의 미래를 적절하게 포함했다.
다큐멘터리처럼 진지하지 않고 그렇다고 일반 예능처럼 웃음을 남발하지도 않은, 중심 잡힌 프로그램이었다.
강우와 최대우가 열심히 대화하는 사이에 차도도도 가끔 등장하여 두 사람의 학교생활을 이야기로 풀었다. 거기에 이번에 워싱턴에서 프로젝트를 딴 일화까지.
예상외로 차도도의 분량이 꽤 많았다.
강우는 이것이 차도도의 미모 때문이 아닐까 추측했다.
웃고 떠들며 보다 보니 어느새 예능 프로가 끝났다. 최대우의 앞에 있던 과자도 바닥났다.
“그럭저럭 재밌는데요?”
강우의 첫 소감에 모두가 한마디씩 보탰다.
“으아! 내가 주연이랑 티비에 같이 나오다니!”
“너희 둘 다 늠름하게 잘 나왔어. 이 나라를 대표하는 고등학생답게.”
“으, 내가 강우 담임할걸. 그때 잘 선택했어야 했는데.”
세 사람의 소감이 각자 달랐다.
신새벽이 강우를 쓱 훑어봤다.
“근데 강우야? 너 의외로 멋지더라?”
“네?”
“얼굴에서 빛이 막 나더라? 옷도 잘 맞고…… 연예인인 줄 알았어. 그날 좀 꾸몄나 보네?”
신새벽의 지적에 강우는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녹화하던 날 태어나서 가장 많이 꾸몄었다. 머리는 기본이고 차도도가 사준 옷까지. 기숙사에서 폐인처럼 살다시피 하는 평소 모습에서 멋진 남자로 변신했다.
“그게 모두 담임 쌤 덕분이죠.”
강우는 방송에 적합한 옷을 사준 차도도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의 눈썰미로는 유치찬란한 초등생 옷을 입고 나갔을지도 모른다.
“아! 차 쌤이 옷도 사줬어?”
조금은 못마땅한 눈으로 차도도를 흘겨보는 신새벽 때문에 강우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우리 쌤도 엄청 예쁘지 않았어요? 완전 연예인 다 됐던데.”
“걸그룹 리더 하시면 딱이에요.”
최대우가 눈치 없이 지원 사격했다.
“연예인은 무슨 얼어 죽을!”
분위기가 더 나빠졌다.
신새벽이 뚱한 표정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시청자 게시판을 찾았다.
“강우야! 호평이 많아! 게시판이 난리야!”
- 진짜 천재 맞음!
- 과학고생들 고생하네. 파이팅!
- 저게 진짜 천재지! 초딩 때 미적분 푼다고 천재 아니지.
- 학원빨이야! 어느 학원 출신이냐?
- 울릉도에 학원 있겠냐?
예상했던 반응에 강우는 흐뭇하게 웃으며 게시판을 넘겼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어?”
시청자 반응을 넘기던 신새벽의 표정이 팍 일그러져 있었다.
- 씨파! 공부 잘하는 이유가 있었어. 선생님 때문이다.
- 나도 저런 미모의 쌤이 부둥부둥 해주면 백점 받았다!
- 연예인이 대신 출연?
- 쪽팔리는 연예인 널렸네. ㅋㅋㅋ
- 열심히 공부해라! 내년에 고려 과학고에서 저 선생님 만나려면!
- 존예다, 존예! 나의 천사!
이상하게도 강우보다 차도도가 더 뜨겁게 게시판을 달궜다.
신새벽의 표정이 점점 나빠지고 분위기도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