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화학경시 (2)
전세훈의 첫 마디에서 강우는 그 의도를 눈치챘다.
“넌 금메달이 하나지만 난 두 개잖아?”
대수롭지 않은 듯 강우는 반박했다.
“수학과 물리? 그거 사실 비슷비슷한 거잖아? 작정하면 두 개 따는 거 어렵지 않지.”
녀석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짙어졌다.
이 녀석은 강우가 인기인이 되어 학생들의 주목을 받는 현상을 시기하고 있었다.
물론 녀석의 말도 일부분 옳다. 예로부터 수학과 물리 양쪽에서 올림피아드를 노린 학생은 많았으니까.
반면 화학 분야는 다른 분야와 동시에 노리는 학생이 드물었다. 굳이 찾자면 가끔 생물과 겸하긴 했지만, 그것도 흔치 않았다.
즉 전세훈은 수학과 물리는 두 개가 아닌 하나로 쳐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강우도 금메달이 하나, 전세훈도 하나라면 굳이 강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네 녀석이 인기가 많다는 게 우스워서.”
“그건 학생들의 마음인데?”
“진정한 천재가 누구인지 몰라서 그래.”
전세훈이 자신이야말로 천재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강우는 굳이 이런 녀석과 시답잖은 말다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후배의 관심과 인기도 귀찮았다.
“그래, 네가 해라. 그 진정한 천재인지 뭔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녀석을 피해 걷는 순간 전세훈이 강우의 팔을 콱 움켜잡았다.
강우는 녀석을 돌아보면서 인상을 팍 찡그렸다.
“네 녀석이 정말 천재임을 증명해 봐.”
“하, 피곤하게. 내가 왜?”
“화학에서 제대로 성적을 내면 천재라고 인정해주마.”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인정받아서 어디에 쓰냐고?”
오히려 강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전세훈의 얼굴이 확 타올랐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전세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내가 도전하지. 이번 교내 경시대회에서 물리로 상을 타 주마.”
전세훈도 두 과목에서 어떻게든 이름을 날려보겠다는 심산으로 보였다. 물론 내버려 둬도 이 녀석이 물리에서 목적을 달성할 것 같지 않지만 물리를 만만하게 보는 녀석이 가소로웠다.
물리는 사실상 강우의 전공과목이니 물리에서 이 녀석을 이겨봐야 좋은 소리를 듣기 힘들다. 즉 녀석의 도전을 받아줘 봐야 강우에게 전혀 이득이 없다.
역대로 교내 경시에서 여러 과목에서 상을 탄 학생이 있었을까? 한 번에 한 과목밖에 응시할 수 없고, 3학년 때는 출전 자체가 불가하니 최대 두 과목이다. 하지만 교내 경시에서 무리하게 두 과목을 노린 학생은 없을 것 같다. 달성해봐야 얻을 이익이 거의 없으니까.
다만 지금 상황은 천재라고 인정받고 싶은 전세훈에게나 가치 있는 일이다.
예를 들면 강우도 해내지 못한, 교내 경시 두 과목에서 상을 탔다거나 또는 올림피아드 두 과목에서 금메달을 딴 강우처럼 자신은 교내 경시 두 과목에서 성공했다거나 이런 식으로 자랑하려는 심보다.
‘천재? 우습군.’
녀석의 뜬금없는 도전에 헛웃음이 나서 강우는 눈을 찌푸렸다.
그렇게 본인이 천재라고 우기고 싶은 녀석에겐 천재가 아님을 절감시키면 된다. 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땄다고 모두가 천재는 아니다.
적어도 강우가 보는 이 녀석은 천재라기보단 그냥 화학을 좀 잘하는 녀석일 뿐이다.
“흠, 원한다면…… 내가 화학으로 가지. 화학에서 누가 잘하나 해볼래?”
작년에 전세훈은 교내 화학경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었다. 당연히 올해에도 유력한 후보이고 실제로도 화학 최고수다. 국제 화학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고.
“푸하하!”
전세훈이 비웃음을 터트렸다.
괜히 녀석이 딴소리하기 전에 강우가 바로 못을 박았다.
“교내 경시에서 화학으로 응시해. 나도 화학을 선택하지. 누가 잘하는지 보자고. 네가 이기면 천재로 인정해줄게.”
강우가 볼 때 전세훈은 이민찬이나 손차희 급도 안 되는 녀석일 뿐이다.
화학에서 승부를 보자는 제안에 전세훈의 얼굴이 급격히 활짝 펴졌다.
“좋아. 붙자! 내가 화학 최우수상을 탈 거니까 나를 이기고 1등 해봐.”
“좋을 대로. 경시대회 끝나고도 그 자부심이 남아있기를 바라마.”
“주기율표도 못 외운다고 소문난 녀석이!”
강우는 여전히 팔을 붙잡은 녀석의 손을 떼어내고 식당을 나갔다.
뒤에서 윤수아가 뛰어왔다.
“강우야?”
“응?”
“진짜 화학으로 출전하게?”
“왜?”
“너한테 엄청 불리한 거잖아?”
“꼭 그렇지도 않아.”
“주기율표도 못 외우면서!”
팩폭에 휘청하던 강우는 신새벽과의 내기를 기억해냈다. 신새벽은 두 과목에서 목표한 학점을 달성했고 강우도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땄다. 남은 내기는 교내 화학경시에서 최우수상을 받는 일이다.
어차피 신새벽과의 내기에서 이기려면 도전해야 한다. 전세훈은 그 과정에서 만난 덤일 뿐. 이른바 일석이조였다.
다만 강우도 화학은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전부이기에 경시에서 성적을 거두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물론 그에게는 가르쳐 줄 훌륭한 선생님, 신새벽이 있다.
역시 그는 항상 계획이 있었다.
자신에게 감탄한 강우는 뿌듯한 얼굴로 윤수아를 돌아봤다.
“근데 수아야? 내가 뭐 하려다가 이러고 있던 거지?”
급하게 식당을 나오긴 했는데 전세훈 녀석 때문에 그 목적을 잊어버렸다.
“아! 차 쌤 때문에…….”
“아! 그렇지!”
강우는 이마를 탁 치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멀리 잔디밭에서 차도도가 학생들을 구름처럼 모아놓고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강우는 후다닥 차도도에게 뛰어갔다.
* * *
세미나실에서 고곽천재와 하은찬이 찌뿌둥한 표정으로 강우를 노려봤다.
“화학으로 나간다는 게 정말이야?”
“난 두말 안 해.”
물론 두말한 적이 있는지 강우도 모른다. 어쨌든 강우는 별일 아니란 듯 대답했다.
“작년처럼 수학으로 할 줄 알았는데.”
“난 물리로 갈 줄 알았어.”
손차희와 윤수아가 실망해서 중얼거렸다.
정작 강우는 친구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무슨 과목을 선택하든 무슨 상관일까. 심지어 하은찬마저 표정이 심상찮았다.
“왜 그러지?”
“나도 바꿔야 하나 싶어서.”
손차희는 작년에 수학을 쳤다. 올해는 강우를 피해서 물리나 화학에 도전할 계획이었다.
하은찬도 강우의 압도적인 수학 실력에 눌려서 그나마 자신이 수학 다음으로 잘하는 화학으로 도망칠 작전이었다. 수학은 강우가 3학년이 되는 내년을 노려도 되니까.
물론 최대우는 강우와 상관없이 무조건 물리이고 윤수아는 작년과 같은 정보 과목을 선택할 예정이다.
강우가 사라지면 수학에서 무혈입성이 가능하다. 박일현도 권유성도 3학년이라 출전하지 않으니 손차희, 이민찬, 하은찬 세 사람의 경쟁이다.
손차희와 하은찬이 눈치를 봤다.
이왕이면 같은 최우수상이라도 물리나 화학보다 수학이 월등히 낫다. 그렇기에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정말 수학 안 칠 거지?”
손차희가 반복해서 물었다.
“당연하지. 난 화학이야.”
“주기율표도 모르잖아?”
“주기율표 채우는 문제는 안 나와.”
강우는 당당하게 화학에서 전의를 불태웠다.
“좋아. 나중에 딴말하지 마. 나는 그럼 수학이다!”
“나도 수학! 우리 엄마가 웬만하면 수학으로 하라고 했어.”
순식간에 모두의 선택 과목이 정해졌다.
목표를 정했으면 정진해야 한다. 한순간도 놀 수 없다. 마침 핵융합 프로젝트는 이제 시작이라 바쁘지 않으니 고곽천재는 여유가 있다.
“자! 그럼 열심히 공부해야지.”
강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형? 어디 가요?”
“동네 누나한테 화학 배우러.”
강우의 발걸음이 상담실로 향했다.
하은찬의 입술이 헤벌쭉 벌어졌다.
“부럽다…….”
* * *
“흐음, 세훈이랑 내기했단 말이지?”
“내기는 아닌데요? 그냥 승부 보기로 했지.”
“겁났어?”
“에이, 겁은 무슨. 하여튼 화학 가르쳐 줄 거예요? 말 거예요?”
상담실에 앉아 강우는 신새벽을 다그쳤다.
신새벽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와 눈을 맞췄다. 눈동자에서 별이 반짝이는 느낌이다.
“근데 강우야? 너랑 나랑도 내기했잖아?”
“그렇죠?”
“그런데 내가 왜 가르쳐줘야 해?”
“어? 그러네…….”
그제야 현실을 깨달은 강우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신새벽이 뒤통수를 치다니! 그녀를 이용해서 단기간에 화학을 마스터하겠다는 작전이 왕창 틀어지는 순간이다.
“우리가 뭘 걸었지?”
“쌤 집 이용 권한은 이미 취득했고…… 데이트해주기?”
“그래, 바로 그거. 내가 가르쳐서 데이트까지 해주라고? 완전히 밑지는 장사인데?”
“데이트 그거 나보다 쌤이 더 원하시는 거잖아요?”
“뭐야? 나랑 데이트하기 싫다는 거야?”
신새벽의 주먹이 올라갔다.
맞아봐야 아프지도 않을 주먹을 휘두르는 신새벽이 무척 귀여웠지만, 강우는 잽싸게 피하는 척했다.
“그게 아니고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데이트 말고 다른 거 하고 싶은 거지?”
“헉! 들켰다.”
물론 농담이다.
어쨌든 작전이 망가졌으니 앞이 깜깜하다. 신새벽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없게 되면 믿을 것은 그의 천재성뿐이다. 단기간에 화학을 열심히 해서 어떻게든 전세훈보다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의 이해력과 응용력이라면 어렵지 않다고 확신했다.
“근데, 쌤! 전세훈이…… 화학 잘해요?”
“당연히 잘하지. 작년에 내가 담임이었잖아? 세훈이가 입학 때 4등이었어. 거기에 화학 금메달이면…….”
전반적으로 머리가 좋은 학생이란 뜻이다.
“흠, 만만찮은 녀석이네요.”
“그렇지. 주기율표도 모르는 너보다는.”
강우는 신새벽을 째려보고는 결의를 다졌다.
“작년 담임이라고 세훈이를 응원하다니! 어쩔 수 없죠. 열심히 해서…… 내기에서 이겨야죠.”
신새벽이 빙그레 웃었다.
강우가 일어나서 상담실을 나가려 하자 신새벽이 책상 한쪽에 쌓인 두툼한 원서를 건넸다.
“이 책을 샅샅이 훑어봐. 그럼 이길 수 있을 거야.”
대학교에서 쓰는 일반화학 원서인 옥스토비다. 이 책은 강우에게도 익숙했다. 1학년 초에 손차희가 항상 갖고 다니기도 했고. 실제로 과학고 학생 중에 절반이 공부하는 유명 서적이다.
경시 대비용으로는 고등학교 교과서나 참고서보다 이 책이 월등하고 전반적인 화학 체계를 잡기 위해서도 이 책이 더 낫다.
신새벽이 모른 척하지 않고 그를 도와주니 감동이다.
“보다가 모르는 것 있으면 묻고. 지금부터 열심히 공부하면 시험 날까지 대충 다 보지 않을까?”
“고맙습니다.”
강우는 책을 받고 꾸벅 인사했다.
신새벽은 그의 능력을 모른다. 이런 책쯤이야 몇 주가 아닌 며칠이면 샅샅이 해부할 자신이 있다. 과학고 화학 수업은 2학년 말이면 고등학교 화학 범위 전체를 끝낸다. 지금이 2학년 2학기이니 마지막이 보이는 상황. 강우도 이미 화학 기초는 어느 정도 잡혀 있다. 신입생 때 주기율표도 모르던 시절과는 달랐다.
웃는 표정으로 멀어지는 강우의 뒷모습을 보면서 신새벽이 미소를 지었다.
‘당분간 강우가 우는 모습을 보겠네.’
그녀의 예측으로는 아무리 강우여도 화학을 단기간에 마스터하기는 쉽지 않다. 고생할 강우를 떠올리니 즐거워졌다. 또 강우가 그녀가 좋아하는 화학에 제대로 발을 들여놓는다고 생각하니 괜히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