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03화 (203/325)

제203화 화학경시 (3)

식판에 밥을 가득 챙겨서 빈 탁자에 앉았더니 한 무리의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첫날 엄청난 인기를 실감한 이후 좀 덜해지나 싶더니 오늘 또 시작이다.

강우는 숟가락으로 밥을 푸다가 앞에 앉은 학생들의 면면을 확인하고는 사레 걸릴 뻔했다.

“선배님!”

그에게 말을 건 학생은 1학년인 유혜림이다. 유혜림이야 스토커와 비슷한 수준이라 이제는 새삼스러운 일은 아닌데 문제는 옆에 있는 학생들이다. 그녀의 옆에 진을 친 학생 대여섯 명이 모두 여학생이었다.

졸지에 강우가 앉은 탁자는 여학생으로 둘러싸였다. 여학생이 드문 과학고이기에 유별난 장면이기도 했다.

“어…… 응?”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응하자니 유혜림의 미간이 확 모였다.

“선배님? 교내 경시에 화학으로 나가신다면서요?”

“어. 그런데?”

“왜 하필이면 화학이에요? 다른 과목도 많은데.”

화학을 해서 다행이란 건지 싫다는 건지 도통 파악이 어려웠다.

답변을 궁리하다가 적당히 말을 붙였다.

“차희는 수학으로 오지 말라고 협박하고 대우는 물리로 오지 말라니까 갈 곳이 화학밖에 없잖아?”

“정말? 제가 알아볼 거예요?”

“으악! 진실은…… 전세훈이랑 내기하는 바람에. 화학에서 누가 잘하는지.”

기가 막힌 대답에 유혜림이 한숨을 내쉬었다.

“넌 또 왜?”

“선배가 화학으로 오면 나랑 붙어야 하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유혜림의 장기는 수학이나 물리가 아니라 화학이었다.

“그럼 너희들은?”

강우는 자신을 둘러싼 다른 여학생을 쭉 둘러봤다.

“저희도 화학인데요?”

여학생들이 수학이나 물리보다 화학과 생물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엉뚱하게도 이 장면에서 확인했다.

강우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혜림이는 내가 화학 하는 게 싫은 것 같고…… 너희도 그래?”

“아뇨, 저희는 선배랑 같은 과목이라 더 좋아요. 무려 천재랑 같이 시험 치는데…….”

“그렇지? 근데 혜림이는 왜 불만이야?”

강우가 눈을 맞대자 유혜림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선배가 세훈 선배에게 지는 게 싫어서요.”

아군이었나?

하긴 이 녀석은 들어올 때부터 자신을 우러러봤으니 적군이 될 수 없다. 누가 봐도 화학에서 평범한 그와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의 대결은 결과가 뻔했으니까.

“크, 내 편이었어! 고마워. 근데 너도 화학이니 나랑 대결해서 좋잖아?”

“그야 내가 무조건 이길 건데 뭘요.”

유혜림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었다.

“어? 무슨 자신감이지? 너 설마…… 올림피아드…….”

“네. 올여름에 국가대표 상비군이었어요.”

화학 천재가 여기 있었다.

1학년 때 상비군이었을 정도면 내년에는 금메달이 유력하다. 어쩌면 졸업 전까지 금메달 두 개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은찬에게 가려서 미처 그 재능을 기억하지 못했다.

대충 유혜림의 마음을 이해했다. 자신의 우상이 화학에서 그녀보다 못한 결과를 접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특히 그녀도 상대하기 껄끄러운 전세훈과의 대결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니까.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갸륵하긴 하지만 천재인 그를 너무 물렁하게 봤다. 그의 천재성이 수학과 물리에서 더욱 빛나긴 하지만 화학에서도 작심하면 범인과는 다르다. 이미 예전에 작정하고 화학 만점을 받은 기억도 있고.

“혜림아, 내가 말이지, 요즘 화학을 열심히 하고 있거든?”

“뭐 하는데요?”

“옥스토비.”

유혜림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확 진해졌다. 그 책을 그녀는 중학교 시절부터 경시한답시고 열심히 봤었으니까.

“그거 본다고 세훈 선배를 따라잡을…….”

“그건 네가 신경 쓸 바 아니고. 내가 이번에 넌 몰라도 세훈이만은 확실하게 이겨볼 테니까 걱정을 붙들어 매.”

“세훈 선배는 나보다 훨씬…….”

무심코 말하던 유혜림이 입을 다물었다. 잔잔한 웃음을 머금으며 그녀를 설득하는 강우의 표정에서 자신감을 엿봤다.

“그럼 난 밥 먹을게. 밥 다 먹고 너희들 커피 사줄게.”

강우가 여학생들을 쭉 둘러보며 제안하자 모두 좋다고 환호했다. 사실 강우가 이렇게 한턱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제는 헌팅턴 프로젝트 연구비로 지갑이 풍족해져서 가능하게 됐다.

헌팅턴 연구비는 웬만한 선생님 월급보다 많을 지경이니까.

유혜림은 강우 덕분에 심경이 복잡해졌다.

강우와 화학을 겨루게 되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면서도 자신보다 나쁜 점수를 받는 강우를 보고 싶지 않았다. 강우의 천재 이미지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저렇게 장담하는 강우를 보면 어쩐지 기적이 일어날 것 같기도 하다. 화학에서도 대단한 성적을 거둔다면 정말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천재 아닌가.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의 유혜림과 달리 강우는 맛있게 밥을 먹었다.

‘화학에서 많이 꼬이네.’

신새벽에서 전세훈과 유혜림까지. 아무래도 화학에서 일을 내야 할 분위기다.

* * *

강우는 옥스토비 책을 들고 교무실을 향했다.

공부하다가 질문거리를 발견했고 신새벽이 상담실에 없어 교무실을 방문하게 됐다.

“강우? 이번에 활약했다고 들었다.”

정명욱이 그에게 뒤늦은 축하를 전했다.

“TV에 멋있게 잘 나오더라.”

김선호도 웃으며 그를 반겼다.

물론 그를 본체만체하는 선생님도 있다. 김윤택처럼.

차도도의 자리는 비어 있었고 다행히 신새벽은 책상에 앉아 열심히 워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축하 인사를 받으며 강우는 신새벽에게 다가갔다.

뒤늦게 그를 발견한 신새벽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이냐는 표정이다.

“모르는 게 있어서…….”

강우가 옥스토비 책을 펼치자 신새벽이 눈을 흘기며 노려봤다.

“벌써 여기까지?”

“그리 어렵지 않던데요?”

강우의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에 신새벽이 피식 웃었다. 나중에 옥스토비의 쓴맛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깔린 비웃음이다.

“좋아, 일단 상담실로 가자.”

신새벽이 몸을 일으켜 프린트에서 뽑히는 문서를 꺼냈다.

김선호의 시선이 화학책에 멎었다.

“강우야, 이번에는 교내 경시에서 화학에 도전한다며?”

강우가 화학경시에 신청한 일이 선생님들 사이에 화제가 된 모양이다.

“아, 네. 그게…… 신새벽 선생님의 등쌀에…….”

“뭐야? 내가 언제?”

앞서가던 신새벽이 눈썹을 치켜뜨고 그를 노려보는 바람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조만간 대우랑 천문대에 한 번 들러라. 새로운 혜성이 나타났다더라.”

“네.”

김선호의 당부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강우는 신새벽의 뒤를 따라갔다.

상담실 안으로 들어가자 신새벽의 표정이 변하더니 확 부드러워졌다.

“어떤 문제인데?”

강우는 책을 펴고 한 부분을 짚었다. 어젯밤부터 그를 괴롭히던 내용이다.

“그건 말이지…….”

신새벽이 자리에 앉으며 그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이어서 설명을 시작했다.

신새벽의 설명도 꽤 괜찮다. 이론의 핵심을 찌르는 명쾌한 설명을 들으면 화학의 기초가 잡히는 기분이니까. 그렇기에 신새벽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 물론 외모가 큰 역할을 하고 있긴 하다.

“이해되니?”

강우가 대답하지 않고 계속 책을 노려보고 있자 신새벽이 중얼거렸다.

“화학에서는 천재가 아닌가 보네.”

강우는 가끔 천재론을 이야기하는 때가 있지만 본인 스스로 천재라고 떠벌리진 않는다. 대부분 남이 먼저 천재라고 칭했다. 그래서 자신을 천재로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대신에…….

“쌤? 그렇게 설명하면 이 부분이 또 이상해지는데요?”

강우가 그 아래 문제를 짚었다.

신새벽이 다소 심각해진 얼굴로 책을 노려봤다. 예상치 않게 허를 찔린 표정이다.

“아! 그건…….”

한참 후에야 신새벽이 설명을 시작했다. 고개를 젓는 그녀의 표정에서 강우는 그녀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질문을 보면 수준을 안다. 그녀가 강우의 화학 실력에 놀란 상황이다.

설명을 마친 신새벽이 가져온 프린트물을 건넸다.

“자, 그럼 이거 풀어볼래?”

“뭔데요?”

“작년 교내 경시문제.”

강우도 보고 싶던 문제다. 최근에 화학을 깊이 파고 있지만 문제를 별로 다뤄보지 못했다. 특히 올림피아드 유형의 화학 문제는 거의 접한 적이 없다.

“지금 풀까요?”

“그래, 풀어봐. 제한시간 두 시간.”

강우는 상담실 의자에 앉아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신새벽은 옆에서 조용히 제 할 일에 집중했다.

두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원래 교내 경시 시험은 3시간이다. 지금은 2시간이 주어졌기에 더 가혹한 조건이다.

강우는 신새벽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했다. 화학 실전 경험이 없는 그에게 기회를 마련해주었고 그가 실력을 깨닫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쌤? 다 했는데요?”

“아직 10분 남았는데? 제대로 풀어.”

“정말 다했는데요?”

신새벽이 얼굴을 찡그렸다.

“작년 1등이 84점 나왔거든? 우수상을 받으려면 적어도 70점은 넘어야 해.”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내심이 그녀에게 엿보였다.

“그 정도는 넘지 않을까요?”

“어휴, 네 실력에? 말을 말자.”

신새벽이 혀를 차면서 채점을 시작했다. 점차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채점하는 손놀림이 뻣뻣해졌다.

“아! 처, 천재다…….”

뭔가를 잘못 먹은 표정이다.

“쌤?”

“어…… 강우야?”

“네?”

“혹시 이거 벌써 풀어봤던 문제니?”

“그럴 리가요. 처음 보는데요?”

“그런데 어떻게…….”

신새벽의 손에서 채점하던 빨간 볼펜이 툭 떨어졌다. 그녀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한참 강우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대충 보니 사선보다 동그라미가 월등히 많다.

“몇 점인데요?”

“파…… 팔십이 점.”

“윽, 1등은 힘든 점수네요.”

단기간에 전세훈을 따라잡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으나 점수가 조금 부족하니 아쉬웠다. 남들이 보기에는 놀랄 점수이건만 강우는 전혀 만족할 수 없었다.

“이것도 대단한 거야.”

“어휴, 그래봤자 이 점수로는 최우수상도 못 타고 보상도 없잖아요?”

신새벽이 그에게 꿀밤을 먹였다.

“이게 욕심이 많아서는!”

“욕심이라뇨? 데이트해준다는 건 쌤이면서. 데이트하게 되면 알아서 하세요.”

강우의 경고에 신새벽이 흠칫 몸을 떨었다.

“설마?”

“확 굴려버려야지.”

다시 꿀밤이 날아왔다.

신새벽이 강우의 답지를 다시 검토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천재는 천재야. 너 정말 대단하다. 수학, 물리도 아닌데 화학에서도 단기간에 이처럼 늘다니.”

“제가 조금 대단하죠?”

“야! 생각해보니 또 그렇네! 네가 지금까지 공부를 안 해서 화학 성적이 개판이었단 거잖아? 너 내신 봐라, 내신! 그게 사람 점수냐?”

어? 이야기가 그렇게 돌아가나?

강우가 재빨리 변명하려는데 신새벽 손을 내밀었다.

“손 내봐.”

그의 손가락과 그녀의 손가락에 같은 반지가 껴있다. 손가락을 보는 건지 반지를 보는 건지 연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던 신새벽이 중얼거렸다.

“흐음, 반지 예쁘다. 강우야? 내 생일 며칠 안 남았다?”

“전 기억 못 하는데요? 학생이 뭔 돈이 있어요?”

다시 신새벽의 주먹이 날아왔다.

“이게! 너 돈 많잖아? 요즘 식당에서 후배 여학생들을 구름처럼 몰고 다니던 녀석이 누구더라? 먹을 것도 막 사주고? 그런데 돈이 없어?”

어? 그건 또 언제 봤지?

할 말을 잃은 강우는 머리만 긁적였다.

“근데 저희 쌤은 어디 갔어요?”

“너희 쌤? 요즘 남학생들한테 인기 폭발이라서 먹을 것 사준다고 잡혀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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