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 화학경시 (4)
작년 교내 경시가 강우의 수학 과목 선택과 추천서로 관심을 끌었다면 올해도 단연 강우가 화제였다.
수학과 물리 올림피아드 금메달로 강우의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쉬운 두 과목을 포기하고 갑자기 화학을 선택했다.
학생들의 전망은 둘로 나뉘었다. 강우의 천재성이라면 화학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는 측과 화학에서는 어렵다는 측이 반반이었다. 수학이나 물리와 마찬가지로 화학에서 최고 수준에 이르려면 적어도 몇 년의 공부가 필요하기에 만일 강우가 이번에도 성공한다면 진정한 천재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기대를 한 몸에 안고 강우는 경시대회 당일 강의실에 입성했다.
“공부 좀 했냐? 너 신새벽 쌤 붙잡고 늘어진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라?”
비꼬는 말투로 말을 거는 녀석은 바로 경쟁자 전세훈이다.
이 녀석의 행동을 보니 성격이 단단히 꼬였다. 그를 바라보는 눈초리에 시기심이 가득하다.
“아, 그거야 내가 화학이 부족해서 말이야, 빨리 실력을 올리려다 보니 선생님께 물을 게 많았지.”
“화학이 단기간에 된다고 생각하냐? 그건 화학에 대한 모욕이야.”
“안 하고 노는 것보다 해보는 게 월등히 낫겠지? 넌 공부했어?”
“네깟 녀석 상대하는데 공부가 왜 필요해? 평소 실력으로 쳐도 내가 이겨.”
“그래, 그렇겠지.”
강우는 피식 웃으며 녀석을 무시하고 자리를 찾았다.
하필이면 녀석이 옆자리다. 갑자기 녀석이 불쌍해진다. 예전에 같은 시험장에서 시험을 쳤던 손차희나 이민찬 등이 망가진 적이 있었으니까.
과연 오늘 이 녀석은 무사할 수 있을까? 그를 의식하지 않고 본연의 실력을 발휘한다면 전혀 상관없겠지만 그를 신경 쓰는 순간 페이스를 잃게 된다.
“난 딱히 괴롭힐 생각이 없는데 말이지.”
강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옆에 앉은 전세훈이 계속 그를 힐끔거렸다. 벌써 녀석이 망할 조짐이 보인다.
종이 울리고 감독 선생님이 시험지가 든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자, 화학 선택한 학생들 맞지? 다른 과목이면 얼른 나가고. 책상 위에 있는 건 필기구를 제외하고 다 치운다! 준비됐어?”
대략 삼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선생님이다. 가끔 학교에서 맞부딪히는 것 같긴 한데 누군지 전혀 모르는 선생님이었다.
“일찍 풀면 먼저 나가도 된다.”
시험지와 답지가 배부됐다.
전세훈이 그를 힐끔 본 후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강우도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의 페이스대로 문제를 풀었다.
연습 삼아 작년 경시문제를 쳤을 때 신새벽은 그가 전세훈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평가했었다. 녀석이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라지만 그런 녀석과 동급이라면 솔직히 쪽팔리기에 강우는 더 열심히 마무리 공부를 했었다.
공부하다 보면 단계가 보인다.
정체와 향상을 반복하며 계단형으로 실력이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도가 트이는 듯 학문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때가 있다. 그 순간이 되면 그동안 쌓은 기초가 체계적으로 다져지고 습득한 내용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이해도가 증가한다.
즉 그 학문에서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는 순간이다.
강우는 수학과 물리에서는 오래전에 그런 순간을 넘어섰다. 이번에 화학을 공부하면서 막판에 다시 그런 순간을 맞이했다.
덕분에 그의 화학 실력은 며칠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수준으로 올라섰다. 금메달리스트일지라도 충분히 대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섰다. 그렇기에 강우는 녀석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쉽네.’
어려운 경시문제가 학교 내신문제처럼 쉬워 보인다.
강우는 전혀 거리낌 없이 문제를 풀어나갔다.
벌써 포기해서 답지를 제출하고 나가는 학생이 생겨났다. 적어도 교내 경시에 절반의 학생은 관심이 없으니까 학생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지났을 때 시험장에는 처음 인원의 절반가량이 남았다.
힐끔 전세훈을 살펴보니 녀석이 끙끙대면서 문제를 풀고 있었다.
다시 강우가 시험에 집중했을 때 감독 선생님이 그의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강우?”
“예?”
“네가 강우였어? 얼마 전에 티비에 나왔던. 맞지?”
“예, 그런데요?”
“티비에서보다 훨씬 잘 생겼어. 갑자기 화학은 왜 신청했어? 원래 전공이 물리 아니야?”
“신새벽 쌤이 쳐보라고 해서요.”
“흠, 그래? 재밌는 학생이네.”
감독 선생님이 계속 말을 걸어왔다. 물론 그에게 호의가 듬뿍 담긴 말투다.
최근 들어 그를 알아보는 선생님들이 많아졌기에 대수롭지 않았다. 그는 문제를 풀면서 선생님과 잡담을 나누었다. 물론 내신에 들어가지 않는 경시라 가능한 일이다.
정작 옆에서 시험을 치는 전세훈은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 고사장은 화학 시험장이니 당연히 화학 최강자인 자신이 주목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감독 선생님마저 강우의 TV 출연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슬슬 화가 치밀었다. 사고가 끊어지고 계산에서 실수가 잦아졌다.
‘저 녀석은 시험에 집중 안 하나? 시험 치다가 웬 잡담이야?’
그렇다고 감독 선생님에게 불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참다 참다가 전세훈은 입을 열었다.
“감독 선생님!”
“응?”
감독 선생님이 옆을 돌아봤다.
“시험에 방해되는데요?”
“아! 미안해. 내가 강우를 만나 너무 흥분해서. 너도 알잖아? 팬심이 생길 정도라니까.”
그 순간 전세훈의 가슴이 한차례 무너져내렸다. 학교 선생님이 팬이라니! 모두가 강우 저 녀석의 간계에 속고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
감독 선생님이 비켜서면서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강우야, 만나서 반가워. 끝나고 사인 하나 해줘. 우리 애가 천재 형아를 무척 좋아하거든.”
전세훈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젠장!’
갑자기 막막해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깊은숨을 내쉰 전세훈은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강우를 돌아봤다. 녀석이 문제가 풀리지 않아 끙끙대고 있으면 기분이 확 풀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본 강우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문제를 풀고 있었다.
전세훈의 가슴이 다시 내려앉았다.
그다음부터는 도대체 어떻게 문제를 풀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2시간이 경과 했을 때쯤 옆을 돌아본 전세훈은 기함해서 입을 쩍 벌렸다.
강우가 자고 있었다. 언제부터 자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눈동자를 열심히 굴렸다. 강우의 답지가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강우가 문제를 풀고 시간이 남아 자는지 아니면 문제 풀기를 포기하고 자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정답은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눈에 비친 강우의 답지는 빽빽했다. 빈칸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다 풀었나?’
아무리 천재여도, 화학의 신이어도 이 어려운 문제를 2시간 만에 다 풀 수는 없다. 오늘 그가 강우 때문에 버벅대고 있지만, 정상 컨디션이었어도 이 난이도라면 3시간을 모두 소모해야 한다.
갑자기 자괴감이 일었다.
하지만 전세훈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 상태라면 스스로 무너지는 결과뿐이다.
강우와의 대결을 이렇게 제풀에 무너져 허무하게 질 수는 없다. 그는 힘을 내야 했다.
다행히 마지막 남은 1시간은 그나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빠른 속도로 답지를 채웠다.
힘들었던 시험 시간이 끝났다.
“흐아암!”
강우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강우는 피식 웃으며 옆의 녀석에게 물었다.
“잘 쳤어?”
“으으.”
전세훈은 대답하지 않고 책가방을 챙겨 후다닥 떠났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강우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망가졌나 보네.”
**
교내 경시 결과가 공고됐다.
작년에는 KTX를 타고 가다가 소식을 들었는데 이번에는 학교에 있었기에 강우는 직접 발표 공고를 보러 갔다.
A동 1층 복도에는 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작년에 보지 못했던 장면에 강우는 기분이 새로웠다.
그가 나타나자 한 떼의 학생들이 옆으로 쭉 갈라졌다.
“우와! 강우다!”
‘이것들이 왜 이러지?’
강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벽에 붙은 경시 결과에 시선을 고정했다.
- 수학경시
- 손차희 74점
- 하은찬 71점
- 이민찬 56점
- 주영식 48점…….
놀랍게도 수학에서 손차희가 최고점을 차지했다. 강우는 손차희가 당연히 이민찬을 이기리라 확신했지만, 최우수상을 하은찬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손차희가 하은찬마저 눌렀다.
최근에 결의를 다지며 수학 공부에 매진하던 손차희가 떠올랐다. 손차희의 수학 재능이 B이고 하은찬이 S임을 고려하면 손차희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
그가 가르쳐주면, 또는 그와 함께 공부하면 그의 천재성에 영향을 받는다고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지만 그렇더라도 손차희의 수학 최우수상은 괄목할만한 쾌거였다.
이어서 강우의 시선이 물리로 넘어갔다. 역시 물리는 예상대로 최대우의 독무대였다. 최대우의 재능이 뛰어나고 또 엄청나게 열심히 하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다. 물리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이자 최우수상이 1등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겠지.
- 물리경시
- 최대우 86
- 문우주 71점
- 정성훈 57
- 전상철 56점…….
성적을 쭉 살피며 고개를 주억이던 강우는 자신이 친 화학 발표로 눈을 돌렸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변화도 일지 않았다.
- 화학경시.
- 강우 97점
- 유혜림 74점
- 김주호 68점
- 전세훈 59점…….
강우는 자신의 1등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보다는 완전히 망가진 전세훈의 순위를 다시 확인했다. 시험장에서 동요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호기롭게 싸움을 걸어온 녀석이었는데 결과는 대결 자체가 민망할 정도였다.
그보다 유혜림의 선전이 돋보였다. 유혜림이 화학 국가대표 상비군이라 했던가. 내년에는 국제무대에서 메달을 딸 녀석이다.
그 뒤로 강우는 올해도 윤수아가 정보 부문에서 등수에 들어 우수상을 탔음을 확인했다.
고곽천재는 교내 경시에서 모두 상을 탔다. 작년에 이은 쾌거다.
경시 결과를 확인하고 강우가 돌아서자 학생들이 박수로 환영했다.
“우와! 오빠! 정말 1등 하셨네요?”
유혜림이 가장 앞에서 그를 반기고 있었다.
“너도 잘했더라?”
“저야 어부지리였죠. 전세훈 선배가 못 치는 바람에. 화학에서도 선배가 잘하실 줄은…….”
“모든 학문은 통하는 법이다.”
만류귀종!
강우는 마치 도를 터득한 사람처럼 대답했다.
다른 학생들들은 그런 강우를 축하해주었다. 수학, 물리, 화학! 무려 세 분야에서 사실상 일인자에 등극하는 순간이다.
“수학 천재!”
“물리 천재!”
“화학 천재!”
적어도 고려 과학고 학생들은 그가 천재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역대 고려 과학고의 전설에 여러 천재가 등장하지만, 강우만큼 찬란한 흔적을 남긴 자는 없었다.
강우의 행적은 고려 과학고의 역사에 새겨질 것이다.
환호하는 학생들을 뚫고 간신히 B동으로 돌아온 강우는 휴대폰을 꺼냈다.
차도도에게 톡이 와 있었다.
- 차도도 쌤 : 강우야, 잘했다.
강우는 얼른 답장을 보냈다.
- 강우 : 뭘요. 이제 프로젝트를 열심히 해야죠.
- 차도도 쌤 : 그래, 요즘 자주 못 봤어. 파이팅(이모티콘).
남은 마무리를 해야 한다.
바로 그를 화학경시에 몰아넣었던 신새벽이다.
- 강우 : 쌤?
- 신새벽 쌤 : 쌤 없다. 어리둥절(이모티콘).
- 강우 : 봤죠?
- 신새벽 쌤 : 못 봤다.
- 강우 : 우리 무슨 내기 했었죠?
- 신새벽 : 기억 안 난다. 도리도리(이모티콘).
아니? 배 째라 모드? 강우는 후다닥 상담실로 뛰어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