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5화 중앙고 방문 (1)
세 번째 핵융합 논문이 유수의 저널에 무사히 출간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날, 상담실에서는 차도도와 신새벽이 책상 위에 책과 논문을 늘어놓고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차도도는 새로 시작한 헌팅턴 프로젝트, 신새벽은 본인 석사 논문이다.
헌팅턴 프로젝트는 이제 막 시작하는 상황인데다 연구비가 많아 부담이 컸다. 아직은 무엇을 해야 할지 제대로 계획을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학기를 맞이하여 일의 진행이 더뎠다.
현재 가장 중요한 부분은 프로젝트와 네 번째 논문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의 문제다.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 맞춰 논문을 순차적으로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강우는 이미 계획이 있어 보이는데 그녀에게 별달리 언질을 주지 않으니 답답할 수밖에.
물론 차도도도 그 이유를 안다. 강우가 지시를 내리지 않는 이유는 프로젝트와 연구 활동에 그녀의 주체적인 참여를 유도하려는 의도다.
“후우.”
긴 한숨을 내뱉고 맞은편으로 시선을 돌리니 신새벽이 낄낄 웃고 있었다. 지금 신새벽은 휴대폰으로 톡을 주고받으며 나사가 빠져 실실거렸다.
“재밌는 일 있어?”
“아! 강우 놀려 먹는 재미가…….”
“강우, 아직 애거든. 그렇게 놀리면…….”
“언제는 다 컸다고 하더니?”
예전에 신새벽이 강우를 아직 애라고 놀리던 기억이 나서 차도도는 일순간 혼란에 휩싸였다.
그때도 신새벽이 강우를 놀리면서 했던 말 같은데. 두 사람 중에 누가 강우를 애로 보는지, 아니면 성인으로 보는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두 사람이 강우를 대하는 태도가 왔다 갔다 하니까.
굳이 구분하면 차도도는 강우를 진지하게 대하지만 신새벽은 어딘지 모르게 장난기가 담겨있다.
‘프로젝트 때문인가?’
사실 대학교 교수와 대학원생 이상으로 묶인 관계이기에 진지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면서도 꼭 그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신새벽도 따지고 보면 같은 관계니까.
어쨌든 강우와 장난치는 신새벽이 가끔은 부러울 때가 있다.
신새벽이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강우가…… 정말 천재는 천재야. 어떻게 단시간에 화학경시에서 1등 할 수 있지?”
“몰랐어? 난 강우랑 논문 쓰다 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어.”
“수학이나 물리만 그럴 줄 알았지.”
“천재는 과목을 가리지 않아.”
“어쭈? 이젠 강우 찬양이네?”
신새벽의 반응에 차도도는 실소를 머금었다.
담임 선생이 맡은 학생을 찬양하다니 이상하긴 해도 강우라면 당연하다. 동시에 차도도는 혼란스러운 마음의 실체를 조금은 이해했다.
그녀의 내면에서 강우는 교수이기도 하고 학생이기도 했다. 성인 남자이기도 했고 이제 크는 청소년이기도 했다.
‘내가 문제였나…….’
머릿속의 혼란을 잠재우면서 차도도는 다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쨌든 이성에 민감할 나이니까 너무 놀리지 마.”
“나도 알아. 하지만 강우가 네 반 학생이라고 네껀 아니거든.”
신새벽의 대답에서 차도도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던 마음의 실체를 깨달았다. 신새벽이 경쟁자였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강우가 헉헉대면서 들어왔다.
“쌤!”
“응?”
“어?”
차도도와 신새벽이 동시에 반응했다.
두 사람을 쓱 훑어보던 강우의 시선이 신새벽에게 고정됐다.
“제가 화학 최우수상이거든요?”
“그래 잘했어.”
신새벽이 웃으며 환영해줬다.
“우리 무슨 내기 했었죠?”
“으아! 난 네가 진짜 해버릴 줄 몰랐는데.”
화학에서 간신히 중간을 유지하던 녀석이 경시에서 1등을 거머쥔다고 누구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차도도가 어리둥절해서 두 사람을 살피는 사이 설전이 이어졌다.
“흠, 그래서 입 닦으시겠다?”
“닦긴 무슨. 약속을 지켜야지. 데이트해주기로 했잖아? 해준다 해줘.”
“그건 쌤이 좋은 거잖아요?”
“그게 나만 좋은 거야? 좋아, 마음 썼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뭐 할 건데?”
신새벽과 강우가 서로를 한참 노려봤다.
정작 차도도는 무슨 말인지 재빨리 이해하지 못했다. 둘이 무슨 내기를 했다고 짐작할 뿐. 하긴 강우는 내기도 없이 그렇게 놀라운 성적을 거둘 녀석이 아니니까.
“아씨! 이 녀석이 진짜 선생님을 굴리려고 드네?”
“그럴 때만 선생님?”
“좋아, 난 대학원생이고 넌 교수니까 기라면 기어야지 어쩌겠어.”
꼬리를 내리는 신새벽의 태도에 강우가 폭소를 터트리는데 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오는 사람을 확인한 순간 모두의 표정이 확 굳었다.
학년 주임 김윤택이었다.
“차 선생님? 아! 마침 강우 학생도 있었군.”
김윤택이 안으로 들어오다가 세 사람의 대치 상황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 아무것도 아녜요. 그냥 강우의 화학 최우수상을 축하하느라…….”
차도도가 얼른 변명했다.
찜찜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 김윤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고중전 말입니다. 중앙고에서 연락이 왔는데…….”
중간고사가 끝나면 바로 고중전이 열린다. 작년에는 고려 과학고에서 진행했기에 올해는 중앙 과학고로 원정 가야 한다.
어쨌든 행사가 열리면 선생님들이 귀찮아진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차도도가 김윤택의 입을 주시했다.
“중앙고에서 올해는 강우 학생의 출전을 금지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작년에 수학에서 역올킬을 달성했고 특별 퀴즈, OX 퀴즈마저 홀로 독식했으니 중앙고로서는 당연한 처사이기도 했다. 더구나 이번 여름에 올림피아드에서도 최상의 성적을 냈기에 어찌 보면 강우는 일반 학생과 어울려 경쟁하기에 합당치 않았다.
“그래도 그건…….”
“강우 학생이 출전하지 않아도 우리가 승리합니다. 그래서…… 강우 학생 생각은 어떤가?”
강우도 수학 퀴즈, 물리 퀴즈에 출전해서 상대를 압살하기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어쩌면 화학경시 결과 때문에 화학 퀴즈에 떠밀릴지도 모른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 고중전은 빠지고…….”
그날 중앙고로 가지 않고 학교에 남아 프로젝트 연구를 하겠다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아! 대신에 중앙고에서 강우 학생에게 강연을 요청해 왔습니다.”
놀란 강우는 할 말을 삼켰고 차도도도 뜻밖이라며 김윤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요즘 강우 군이 방송에 나와서 유명해졌지 않습니까? 중앙고 학생들이 우리 학교 천재의 실상을 알고 싶다고…….”
“강연 주제는요?”
“주제는 자유죠.”
김윤택과 차도도의 시선이 강우에게 모였다.
김윤택의 입가에 걸린 알 수 없는 미소를 확인한 차도도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정작 강우는 대수롭지 않게 승낙했다.
“그러죠. 어렵지 않으니까요.”
“좋아, 그럼 고중전 때 강연을 준비해. 저쪽에 그렇게 통보하지.”
김윤택이 재차 확인한 후 상담실을 나갔다.
다시 세 사람만 남자 차도도가 먼저 말을 꺼냈다.
“강우야, 부담되지 않아?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무리 강우여도 타 학교에서 학생이 학생을 상대로 강연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그날은 양쪽 학교가 서로 경쟁하는 무대다.
“괜찮아요.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주임 쌤의 의도를 모르겠지만 나쁠 것도 없어요.”
“청중이 중앙고 학생이야.”
“그래도 청중의 절반은 우리 학교겠죠.”
태연한 강우의 반응에 차도도도 한시름 놓았다. 강우 본인이 괜찮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자, 강우가 온 김에 프로젝트부터 처리하자.”
차도도가 먼저 분위기를 잡으며 프로젝트 계획서를 펼쳤다.
“그래서 어디까지 진행하셨어요?”
“전체 연구를 3년으로 잡고 처음 1년간 할 일을 정리해봤는데…….”
차도도의 설명을 듣던 강우가 갑자기 머리를 번쩍 들었다.
“어이, 신새벽 학생! 올해까지 학술지에 논문 제출해야 하는데 얼마나 했어?”
“으악!”
“정말 구르고 싶나?”
“으으악!”
신새벽도 후다닥 논문을 집어 들었다.
* * *
천문대에서 강우와 최대우는 김선호 선생님을 만났다.
마침 학생들과 천체 관측을 끝낸 김선호가 망원경을 비롯한 장비를 정리하면서 두 사람에게 말했다.
“대우야, 대회에 출전하지?”
고중전 천체관측대회는 올해도 하루 전날 열린다. 물론 올해는 중앙고에서 열리는 큰 차이가 있다. 특히 천체관측대회는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상당히 크다.
최대우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출전해서 승리를 거머쥐겠습니다.”
“그래, 너라면 가능할 거다.”
최대우는 천체관측반의 최고 에이스다. 그 실력이 어디 가는 게 아니니 믿을 수 있다.
강우가 최대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물리 퀴즈도 나가니?”
“금메달 땄다고 나가야 한다더라.”
“좋아! 올해도 물리 퀴즈는 이기겠어.”
강우와 최대우가 이미 승리한 것처럼 말하자 김선호가 피식 웃었다.
“중간고사는 열심히 대비하고 있고?”
순간 강우와 최대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강우는 내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최대우는 물리를 제외하고는 그리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번에는 지구과학 시험 범위가 천문 단원이라 날아다니고 있다.
“그래도 내신을 챙겨야지.”
김선호도 강우의 대입 전략을 알기에 크게 강요하진 않았다.
그보다는…….
김선호가 컴퓨터 모니터에 자료화면을 올렸다.
어두운 바탕 위에 태양계를 그리고 미지의 천체가 움직이는 궤도를 쭉 표시했다.
최대우가 금방 실체를 이해했다.
“어? 이건…… 혜성 궤도잖아요?”
“몇 달 전에 새로 발견한 혜성이야. 아틀라스 혜성이라고…….”
“아틀라스 혜성은 몇 년 전에도 있었는데요?”
“같은 이름이 많아. 하와이대학 천문연구소의 소행성 충돌경보 시스템 이름이 아틀라스거든. 이 시스템으로 발견한 혜성에는 모두 아틀라스란 이름이 붙어.”
김선호가 상세히 설명했다.
최대우는 아틀라스 혜성이 익숙했다. 몇 년 전에도 큰 혜성이 나타났다고 떠들다가 태양에 근접하면서 부서지는 바람에 흐지부지된 혜성 이름이기도 했다. 물론 그 혜성과 지금 혜성은 완전히 다른 녀석이다. 이름만 같을 뿐.
“꽤 접근하는데요?”
궤도만으로 보자면 태양에 상당히 접근해서 아주 밝아질 듯했다.
“이 혜성의 주기는 대략 3만 년이고 현재 예상으로는 4등급까지 밝아져. 맨눈으로 보일 정도. 11월 초에 초저녁 서쪽 하늘에서 보인다고 예측하더라.”
“우와! 보고 싶다!”
최대우가 맛있는 요리를 눈앞에 놓은 듯 입맛을 다셨다.
혜성이라는 특별 메뉴라……. 강우도 보고 싶었다.
“11월 초면 중간고사가 끝난 시점이지? 너희 둘과 함께 강원도로 관측 여행을 다녀올까 싶은데 어때?”
“저야 당연히 찬성이죠. 강우는?”
최대우가 강우를 돌아봤다.
바늘 가는 데 실도 가야 하니까. 강우도 흔쾌히 찬성했다. 11월이면 부담도 적다.
“그럼 관측을 떠나는 것으로 계획을 세울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최대우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날 줄 모른다.
‘이번 학기는…… 대우는 힘들지 않겠어. 별을 보러 가니까.’
한때 공부에 찌들어 힘들어하던 최대우를 떠올리며 강우는 미소를 지었다. 저 녀석에게는 별이라는 삶의 활력소가 있다.
그에게는 삶의 활력소가 무엇일까. 핵융합 연구는 그의 사명이지 활력소는 아니다. 항상 연구만 하며 인생을 살 수는 없으니. 물론 손강우의 죽음을 생각하면, 인류의 에너지난을 떠올리면 한가하게 활력소 타령을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의 머릿속에 차도도가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강우는 머리를 저어 잡념을 떨쳐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