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6화 중앙고 방문 (2)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중앙고와의 고중전 시즌이 돌아왔다.
천체관측대회에 출전하는 최대우는 고중전 전날 천체관측반원과 함께 중앙 과학고로 떠났다.
강우는 내일 강연 준비 때문에 응원을 하러 갈 형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물리실험실에서 차도도와 만날 약속까지 있었다.
그 시간에 차도도 혼자 각종 실험 기자재를 살피며 고민하고 있었다.
“강우 왔어?”
“아직도 고민하는 중이에요?”
“생각만큼 쉽지 않아. 어떻게 보면 금액이 너무 많고, 어떻게 보면 금액이 너무 적고.”
강우는 헌팅턴사 프로젝트에서 받은 연구비 가운데 대략 2억 원을 학교에 기증했다.
이 2억 원으로 적당한 과학기자재를 마련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지금 차도도가 구체적인 품목을 결정하고 있었다.
“적당히 하세요. 어차피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네 이름으로 기증하는 거잖아? 허투루 돈을 쓸 수는 없지.”
정확하게는 고곽천재 이름이다. 차도도 이름도 포함하려 했으나 차도도는 빠지겠다고 극구 주장했다. 덕분에 고곽천재 4인방의 이름으로 학교에 기증하게 됐다.
“대충 결정한 게…… 주사전자현미경(SEM)과 초고속카메라 촬영장치, 소형풍동실험장치야. 어떻게 생각해?”
“전 별생각이 없거든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봐요.”
다소 맥빠진 강우의 대답에 차도도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공계에서 실험기자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강우도 충분히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학교 실험실에서는 실험기기의 사용 빈도와 효율이 극히 올라가지만, 같은 대학교에서도 교양과정 실험 기구나 고등학교 실험 기기는 사실상 효율이 떨어진다.
과학고의 경우 일반고보다 실험 시간이 많아도 그마저 보여주기식의 단순 실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만 대체로 강우는 고등학교 실험을 회의적으로 봤다.
고등학교에서는 교과과정과 연계된 실험 중에서 학생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몇 가지면 충분하다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난 이 장비를 구매해서 물리실험실 하나를 추가로 확보할까 생각해. 네 이름이 들어간 실험실로. 어때?”
“공간을 내어줄까요?”
“교장 선생님이랑 의논해봐야지.”
강우는 차도도의 의견을 조용히 경청했다. 예상보다 훨씬 일을 잘 풀어나간다. 큰돈을 투자하는 만큼 그 돈이 유의미하게 남도록 애를 쓴 흔적이 보인다. 역시 차도도는 이런 면에서 그보다 훨씬 뛰어났다.
탁자에 놓인 실험 기자재 카탈로그를 보면서 강우는 차도도의 고민을 이해했다. 이런 일보다 핵융합 연구에 더 열정을 쏟아주기를 바라지만 차도도라면 어느 쪽도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특히 과학 꿈나무를 키우는 교사로서 무엇보다 의미 있는 일이니까.
강우는 카탈로그를 정리해서 한쪽으로 치웠다.
“다른 일은요?”
“네이처에 소개된 후로 곳곳에서 연락이 왔어. 전 세계 핵융합 연구자들의 문의 메일인데…… 내가 보기엔 단순한 친목 같아. 공통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끼리의 인사랄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네요. 우리는 다음 논문을 준비하기도 바쁘니까요.”
“그래, 핵융합 네 번째 논문. 다만 한 곳의 제안이 조금 신경 쓰이긴 하는데…….”
차도도가 말을 얼버무렸다.
“어딘데요?”
“대한핵융합센터.”
강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한국에서는 핵융합 방면에서 가장 앞선 연구기관이다. 당연히 그곳에서 연락이 오리라 예상했었다. 국가 연구비를 많이 받는 곳이니 공동연구를 하자는 제안으로 추측했다.
마도환도 대한핵융합센터와 공동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물론 이곳과 손을 잡아도 꼭 마도환과 엮이지는 않는다.
“우리 연구비가 부족하면 공동연구도 한 방법이지만 현재는 굳이 연구 결과를 공유할 이유가 없어요.”
“하지만…….”
차도도의 말을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다. 대한핵융합센터와 협약을 맺으면 나라에서 핵융합 연구의 중심으로 주목받게 된다. 인적인 면에서, 물적인 면에서도. 그렇기에 훗날을 대비하려면 기존의 핵융합 주류와 교류해야 유리하다.
“우리는 장기적으로 요셉 교수와 헌팅턴과 연합할 테니까 굳이 한국의 연구진과 교류할 이유는 없어요. 다만 대한핵융합센터에서 운용하는 토카막장치는 구경할 가치가 있어요. 그만큼 핵융합 연구 이해도가 높아지거든요.”
“그래?”
“견학할 수 있는지 문의만 넣어보세요.”
“그럴게.”
강우의 대답이 예상과 다른 듯 차도도가 약간 풀이 죽었다.
하지만 강우의 뜻은 조금 달랐다. 지금 한국의 주류와 엮이면 마도환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강우는 차도도와 프로젝트 관련 추가 사항을 협의했다.
헌팅턴 프로젝트부터는 두 사람의 연구 방식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강우가 연구한 이론을 차도도에게 가르치는 형식이었다면 이제는 각자 독자적으로 연구한다.
물론 그 중간중간에 서로 협력하면서 의견을 교환하기에 두 사람의 연구가 동시에 반영된다.
방식이 전환된 이유는 차도도가 독자적으로 연구를 수행할 만큼 능력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강우는 지금 연구하는 내용을 일 년쯤 후에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프로젝트 체결 후부터는 논문 일정에도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일을 마무리 짓자 창밖이 어두워졌다.
“오늘은 세미나실에서 공부 안 해?”
“전부 대우 따라서 나갔어요.”
“아! 천체관측대회! 그래, 그만 갈까?”
탁자를 정리한 후 두 사람은 실험실을 나왔다.
“가우스에서 커피 마실래?”
“예, 좋아요.”
“내일 강연 준비로 바쁘지 않아?”
“거의 마무리 중.”
강우는 차도도의 관심에 고마움을 표했다.
“무슨 내용인데?”
“천재론…….”
“너다워.”
교문을 나가면서 차도도는 강연에 우려를 표시했다. 김윤택이 강연을 계획한 이유를 모르겠다는 염려였다.
하지만 강우는 걱정하지 않았다. 김윤택이 어떤 함정을 파놓았던 그는 주어진 일만 하면 되니까.
예전에 다른 강연 때처럼 내일 강연을 듣고 한 학생만이라도 과학자의 꿈을 키운다면 충분한 가치가 있다.
덕분에 고중전의 모든 공식행사에서 자유롭게 빠질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만일 강연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수학, 물리, 화학 퀴즈에 모두 학교 대표로 출전해서 뛰었을지도 모른다.
* * *
고중전이 열리는 아침은 특이했다.
아침 식사를 끝내자마자 학생들은 단체로 중앙 과학고로 이동했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기에 어려운 문제는 없었으나 학생들은 마치 소풍 가는 기분으로 들떴다.
연하늘색의 체육복으로 통일한 학생들의 움직임은 장관이었다.
강우는 고곽천재와 함께 이동했다.
강우가 유명인사이다 보니 가까운 다른 친구들이 곁으로 모여들었다. 거기에 그를 따르는 후배까지 우글거리자 주변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왁자지껄했다.
“강우 형만 따라다니면 되는 거죠?”
“강우는 OX 퀴즈 안 나가거든?”
“어? 전략에 차질이…… 물론 우리 엄마가 아무나 따라가지 말라고 당부하긴 했지만 그래도 전략적인 문제가…….”
하은찬이 나라가 망한 표정으로 강우를 쳐다봤다.
옆에서 유혜림이 입을 열었다.
“특별 퀴즈는 강우 오빠와 똑같은 답을 내면 되죠?”
“강우는 특별 퀴즈도 참여 안 할 건데?”
손차희가 재빨리 차단했다.
“에이 그래도 답만 알려주시면 되잖아요?”
“너희가 알아서 해. 난 오늘 바빠.”
강우가 두말하지 않고 거절했다.
“에이.”
시무룩한 유혜림을 밀치고 이번에는 다른 녀석이 강우 옆에 붙었다.
“강우 형! 중앙고 애들이 벼르고 있대요! 그것도 여학생이!”
“왜?”
“티비에서 봤더니 너무 잘 생겨서.”
“어휴, 거기 가면 또 팬이 느는 거야?”
유혜림이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팍 찌푸렸다.
강우도 비슷한 이야기를 듣긴 했다. 중앙고 학생들이 강우의 강연을 엄청 기대하고 있다고 남동훈이 전했었다.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니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지하철에서 강우는 유독 자신이 탄 객차 주변이 유난히 붐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여성의 비율도 높았다.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눈이 무척 많다. 학생들의 관심을 받으니 신경 쓰인다.
뉴스와 티비 방송이 나간 지 한참인데 아직도 학생들의 관심이 줄지 않았다.
* * *
중앙 과학고의 전경도 고려 과학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번화한 거리 중심의 좁은 부지에 밀집된 건물이 아기자기하다.
곳곳에 남빛 체육복을 입은 중앙 과학고 학생들이 진을 치고 있다.
“저기에 내 팬들이 있단 말이지.”
강우는 남동훈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지금 자신과 무리를 이룬 고려고 학생만 해도 숫자가 상당하다. 이만한 숫자의 중앙고 학생들이 몰려들면 오늘 가장 주목받는 학생으로 등극할 것이다.
‘내가 왔다!’
마음속으로 결의를 외치며 중앙고 정문을 돌파하던 강우는 앞에 몰린 또 다른 학생 무리에 깜짝 놀랐다.
중앙고 학생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나? 이건 좀 과격한 환영 인사인데?”
대략 수를 가늠하며 강우는 학생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이상했다. 학생들이 그를 발견하고서도 별달리 움직임이 없었다.
‘티비에서 본 얼굴과 실물이 달라 미처 모를 수도 있으니까.’
강우가 나름 분석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순간이었다.
“와아! 차도도다!”
갑자기 중앙고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하얀 체육복을 멋들어지게 입은 차도도가 막 교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신이다! 여신!”
“존예!”
“와아! 예쁘다!”
연예인이 등장한 팬 미팅 행사를 방불케 했다. 몰려든 학생에 강우는 이마 주름살을 확 구겼다. 중앙고 학생들은 그가 아닌 차도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우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이심전심이었던 듯 고려고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차도도와 중앙고 학생 사이에 벽을 형성했다.
차도도는 갑작스러운 환영 인파에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강우는 고려고와 중앙고의 대치를 보면서 그녀의 인기를 실감했다.
차도도 또한 방송 출연으로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을 미처 잊고 있었다. 오늘 학생을 몰고 다니는 인기인은 그가 아니라 차도도였다.
“강우야 왜?”
최대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강우는 고개를 저으며 발길을 돌렸다.
“인생이 덧없어서.”
“원래 그런 거야. 나도 어제 우승할 때는 인간들이 환호하면서 난리더니 오늘은 본 척도 안 하잖아?”
최대우는 어젯밤 천체관측대회에서 고려 과학고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2년 연속 최고 수훈 선수로 뽑혔다. 역시 녀석의 관측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덕분에 헹가래를 탔고 학생들을 깔고 누워 자칫 사고가 날뻔했다.
“하긴 그렇긴 해. 화이트 엔젤의 주연이 너에게 배신당할 줄 누가 알았겠어?”
“에이, 그거야…… 막상 보니까 차희나 주연이나 별 차이 없더라. 그래서 돌아선 거지.”
“주연이랑 연락해?”
“아니.”
최대우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물론 최대우는 주연에게 연락처를 받은 적도 없다.
지금 최대우의 노트북 바탕화면에는 MIT 사진이 떠 있다. 최대우의 새로운 꿈이다.
강우의 노트북 바탕에도 MIT가 떠 있었다.
-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정.
차도도를 포함한 고곽천재가 그 문구 아래에서 웃고 있는 사진이다. 그건, 언젠가 MIT에서 다섯 사람이 다시 모여 열정을 불사를 날이 올 거라는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