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중앙고 방문 (3)
차도도가 학교 안으로 들어가자 몰려들었던 인파는 더욱 극성스러워졌다.
강우도 중앙고에 첫발을 내디뎠다.
과학의 꿈을 지닌 학생들이 모인 곳이자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역군이 자라는 학교다.
함께 왔던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반으로 흩어지고 그가 줄을 설 곳을 찾아 두리번거릴 때였다.
중앙고 학생으로 보이는 서너 명이 다가왔다.
“어이! 강우!”
체육복 색상과 낯선 얼굴로 보아 중앙고 학생이 확실한데 그를 이런 식으로 부를 사람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피식 비웃음을 머금으며 녀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허? 이제 인기 좀 얻었다고 날 기억도 못 하나 보지?”
“누군데?”
“이야, 진짜 잘난 놈이네? 중학교 동창도 몰라봐?”
“동창?”
“나, 진만석이다! 우리 3학년 때 같은 반이었잖아?”
면전에서 실실 쪼개는 녀석을 보니 강우는 짜증이 팍 일었다.
같은 중학교를 나온 친구라면 당연히 호의적이어야 할 텐데 이 녀석에게는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멸시하는 눈빛마저 풍긴다.
당연히 강우는 중학교 기억이 없다. 그때는 강우로 빙의하기 전이었으니까.
그 작은 시골 중학교에서 무려 중앙 과학고에 입학한 녀석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강우를 향해 녀석이 실실 비웃음을 쪼갰다.
“이 자식이 완전히 돌이 됐군. 하긴 넌 예전에도 머리가 나빴지. 사배자 전형 아니었으면 고곽에 발도 못 들여놓았을 녀석이. 내가 학원 문제지를 빌려주며 도와주지 않았으면 절대 못 붙었지.”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강우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진만석이라…….’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 [독점]
강우는 녀석의 머리 위를 쳐다봤다. 그러자 녀석의 재능이 드러났다.
NOVEL ・ 현판
윤하준
- 진만석, 수학 B, 물리 C, 화학 C, 생물 B, 지구과학 C.
별점
참여완료
7.65
비실비실한 등급으로 보면 과학고 학생의 평균이다. 어느 한구석에도 녀석이 천재란 증거가 없다.
- 진만석, 수학 B, 물리 C, 화학 C, 생물 B, 지구과학 C.
비실비실한 등급으로 보면 과학고 학생의 평균이다. 어느 한구석에도 녀석이 천재란 증거가 없다.
학원에 다니면서 간신히 들어온 평범한 녀석이다. 물론 이를 폄하할 이유는 없지만 적어도 그가 관심을 기울일 녀석은 아니다.
멍한 표정을 짓는 강우를 향해 진만석이 지나가며 어깨를 툭툭 쳤다.
“과거의 은혜를 잊으면 짐승만도 못한 거야. 요즘 좀 잘 나간다고 목에 힘주지 마. 너, 오늘 강연한다며? 그때 보자.”
진만석과 그 무리가 중앙고 학생들 속으로 사라졌다.
강우는 그 뒷모습을 눈에 담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적이 누구인지 알아야 상대하는데 정체를 전혀 모르겠다. 고려고든 중앙고든 모교인 작은 시골 중학교에서 입학한 학생은 두 사람 외에 없다. 지금 당장에는 어떻게 알아볼 방법이 없다.
사실 중학교 때까지의 기억이 없다는 점은 강우의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운동장에 학생들이 줄을 쭉 섰다.
“강우야! 강우야아!”
윤수아가 그에게 손짓했다. 활력이 넘치는 그녀를 보니 그나마 기분이 풀렸다.
“오늘 어디 출전해?”
“난 아무것도 안 하는데?”
“왜?”
“강연해야 해서.”
“아! 아깝다. 도서 싱품권이 날아가 버렸네.”
정확하게는 군것질 과자겠지. 아쉬워하는 윤수아와 잡담을 주고받다가 강우는 은근슬쩍 물었다.
“수아야, 한 인간의 과거사는 어디에 가장 잘 남아있을까?”
“음? 무슨 말이야? 그야…… 주변 사람의 기억이지.”
진만석의 기억은 그가 열어볼 방법이…….
“그것 말고는?”
“앨범, 휴대폰, 일기장…….”
“아, 그렇지!”
감이 잡혔다.
* * *
체육대회가 벌어지는 동안 강우는 강연을 핑계로 혼자 빠져나왔다.
정문을 나온 강우는 부근에서 커피숍을 찾았다.
고려 과학고보다 더 번화한 거리에는 카페와 분식점이 다수 보였다. 그의 눈에 뜨이는 특이한 이름의 카페가 있었다.
오일러 카페.
고려 과학고 앞에 가우스 카페가 있더니 여기에는 오일러 카페가 있다. 과학고 앞이라는 티가 난다.
이름이 마음에 들어 강우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연하늘색 체육복이 신분을 드러내도 어차피 상관없다. 수업 시간에 땡땡이치는 학생도 있는데 체육대회쯤이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잔시켜 놓고 강우는 고민에 잠겼다.
“진만석이라…….”
무시해도 상관없지만 찜찜한 기분을 참기 어렵다.
일단 전화부터.
“어머니?”
- 아, 강우야! 잘 있니? 밥은 먹었고?
“예, 잘 지내요. 혹시…… 만석이라고 아세요?”
- 진만석?
역시 강우 어머니도 아는 학생인가 보다.
- 그 학생은 왜?
“오늘 중앙고에 왔는데…… 만석이가 있더라고요.”
- 만석이가 뭐래? 또 널 괴롭혀?
“그건 아니고요.”
역시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진만석과 강우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 이젠 커서 다를지 모르지만, 이 에미는 만석이 별로야. 너도 예전에 만석이 싫어했잖아? 예전에 걔가 널 무시할 때마다 이 에미는 가슴이 찢어졌다. 우리가 못 사는 게 죄지.
“아, 예. 저도 그래요.”
괜히 아픈 과거를 건드린 모양이다. 강우는 적당히 수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결과적으로 진만석은 중학교 때 그와 같은 반이 맞았다. 이름처럼 시골에서는 만석꾼 집안이라 부유하게 살던 녀석인 모양이다. 그래서 가난한 강우를 갈궜나?
진만석이 실제 동창이라면 이제는 과거를 찾아야 한다. 다행히 그에게는 휴대폰이라는 아주 좋은 수단이 있다.
이 휴대폰은 그가 빙의하기 전 중학교 때부터 강우가 소지하고 있던 물건이다. 적어도 강우의 중3 때 톡과 메시지, 사진이 모두 들어있다.
지금까지 강우는 실제 본인이 아니기에 과거를 살필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알아야만 하는 상황이 됐다.
본인이 아니면서도 본인의 과거를 살피는 묘한 처지라 가슴이 아렸다.
“후우.”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고 톡을 확인했다.
이제는 거의 사장된 중학교 반 단톡방을 뒤졌다.
중학교 반 친구들이 그의 고려 과학고 합격을 축하하는 메시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직후에는 진만석의 중앙 과학고 합격을 축하하는 메시지도. 당시 발표가 고려 과학고 측이 조금 빨랐던 모양이다.
그의 눈을 찌푸리게 하는 몇몇 학생들의 대화가 보였다.
- 고려 과학고보다 중앙 과학고가 훨씬 좋은 학교지?
- 병신아! 강우 실력을 만석이와 비교하면 당연하지 않아?
- 강우는 사배자 전형이래. 우리 집도 못 살았으면 나도 합격했음
- 네가? ㅋㅋㅋ
- 평소 강우가 공부를 좀 했어도 만석이한테는 어림도 없지
유달리 강우를 까는 이름이 자주 등장했다. 단체 톡방에서 대화를 주도하는 녀석들이다. 대충 봐도 이 녀석들이 진만석의 똘마니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톡방을 훑다 보니 진만석과 강우 두 사람의 톡도 보였다.
“하! 완전 호구였네?”
대충 중학교 3학년 일 년간의 대화 내용을 살펴보니 답이 나왔다.
당시 담임 선생님이 강우의 수학, 과학 재능을 알아보고 진만석과 연결해줬다. 강우는 형편이 어려워 학원에 다니지 못했고 학교도 강우에게 특별한 진학 지도를 할 수 없었기에 같은 목표를 가진 진만석과 함께 공부하도록 유도했다.
진만석은 주말마다 인근 큰 도시로 나가서 학원에 다녔다.
학원에서 과학영재고 입학 자료와 교재를 가져온 진만석은 이를 강우에게 보여주면서 도와주기는 했다. 다만 그 대가로 강우를 몸종처럼 부렸다. 가난한 강우에게 돈을 요구하지는 않고 주로 빵을 사 오라는 등의 심부름을 시켰다. 또 진만석의 숙제도 대부분 강우의 몫이었다.
나중에는 학원 숙제까지 강우가 대신해줬고 이 덕분에 강우의 실력은 나날이 늘었다.
“강우 이 자식, 과학고에 들어가려고 온갖 수모를 다 참았군.”
그 갈굼이 오히려 행운으로 작용했다. 한편으로는 미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굳은 의지로 목표를 관철했다. 덕분에 강우는 불리한 환경에서도 고려 과학고를 뚫었다.
그 역경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런 힘든 과거를 딛고 지금 강우는 과학고 학생이 됐다.
힘들었을 강우 본인을 떠올리니 연민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흘러간 과거일 뿐…….
마시던 커피가 동이 났다.
“강우? 뭐하니?”
“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차도도와 신새벽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하얀 체육복을 입은 두 사람이 마치 천사 같다. 두 사람은 커피를 들고 있었다.
“땡땡이치는 중?”
“에이, 그건 아니죠. 허락받고 나온 거라고요. 땡땡이는 쌤들이?”
차도도와 신새벽이 테이블 맞은편에 앉으며 소리쳤다.
“야! 내가 너랑 같은 줄 알아?”
“심판 보기도 너무 힘들어. 잠시 도망쳤어. 커피 마시려고.”
신새벽과 차도도의 반응이 다르다.
피식 웃는 강우에게 차도도가 물었다.
“어? 커피 마셨네? 다른 거 더 마실래?”
“제가 주문할게요.”
만지작거리던 휴대폰을 내려놓고 일어서는 강우에게 차도도가 카드를 내밀었다.
강우는 웃으며 카드를 받았다.
평소처럼 핫초코를 마시려다 방금 보았던 인생의 쓴맛이 생각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리필을 주문했다.
커피가 나오는 동안 가슴이 답답해서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카운터 앞을 서성였다.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돌아오니 신새벽이 그의 휴대폰을 보면서 낄낄대고 있었다. 이 여자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쌤 뭐해요?”
“야! 강우야! 너 중학생 때 엄청 못생겼다?”
휴대폰을 뺏고 보니 그의 앨범 사진이다. 마침 진만석과의 과거 일을 뒤지느라 사진첩이 열려 있었던 모양이다. 중학교 때의 톡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다.
신새벽이 보던 사진은 강우와 친구 서너 명이 툭탁거리는 사진이다. 얼핏 보면 장난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진만석과 그 일당이 강우를 괴롭히는 장면이다. 이런 사진이 왜 그의 휴대폰에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신새벽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하긴 고등학교에 들어온 후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그를 어떻게 찌질이와 연관 지을 수 있을까.
하지만 사진을 보니 기분이 별로다.
“휴대폰은 사적인 거라 함부로 보시면 안 돼요.”
“어쭈? 이게 컸다고 반항을? 야!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엄연히 볼 권리가 있다고!”
신새벽이 킥킥 웃으며 근엄한 척 연기를 했다.
옆에서 차도도마저 웃음이 터지는지 입을 손으로 가렸다.
“교수와 대학원생이기도 하죠.”
강우는 눈썹을 확 모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신새벽이 흠칫 몸을 사리며 말했다.
“뭐?”
“휴대폰!”
“남 휴대폰 보면 안 된다며?”
“휴대폰.”
신새벽이 휴대폰을 그에게 건넸다.
신새벽 휴대폰이야 예전에도 본 적이 있어서 궁금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괜히 심술이 났다.
강우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던 신새벽은 휴대폰을 되찾기를 포기하고 다시 차도도와 잡담을 주고받았다.
가끔 보이는 신새벽의 셀카 사진이 멋있었다. 그녀의 돋보이는 미모가 눈길을 끌었다.
한참 휴대폰을 뒤적이던 강우의 눈이 번쩍 떠졌다.
“푸흐…….”
“어? 뭐야?”
그를 노려보던 신새벽이 갑자기 얼어붙은 듯 양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으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