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중앙고 방문 (5)
“진만석 학생이 오늘 강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군요. 천재 베셀은 오일러, 가우스와 교류하며 끊임없이 배웠습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과학자, 캘빈은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고 유럽의 과학자들과 토론, 연구를 함께 했지요. 독불장군처럼 혼자서 안주하는 삶은 발전이 없습니다.”
어리둥절한 학생들을 둘러보면서 강우는 재차 말을 이었다.
“저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주변 학생, 선생님, 과학자에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중에는 학교에 강연하러 왔던 MIT 요셉 교수님도 있고, 카이스트 한태규 교수님도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배우고 연구하면서 저는 수 편의 논문을 썼습니다. 과학의 열정을 이어나갔죠.”
충격에 학생들의 자세가 뻣뻣하게 굳었다.
“그 논문은 국내, 국외 유수의 학술지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실렸습니다. 그리고 올해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와 물리 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을, 그것도 최우수상을 받았죠. 그동안 진만석 학생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지금 이 강당에서 진만석을 천재라고 여기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진만석은 입학 이후 중간 아래의 성적을 고수하고 있었으니까.
강우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중학교 때 변변찮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과학을 향한 꿈과 호기심만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그 꿈을 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과학의 꿈을 잃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노력했습니다. 저기 진만석 학생이 현재에 안주해 있을 때 말입니다.”
강우의 대답은 학생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학교 성적이, 내신이 인생을 좌우하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과학의 꿈을 잃어버리지 않을 때 언젠가는 꿈을 이룰 수 있다.
천재란 어릴 때부터 정해진 재능이 아니라 끊임없이 연구하고 탐구하면서 길러지는 재능이다. 그 실증 인물이 눈앞에 있었다.
“와아!”
학생들의 환호성이 커질수록 진만석의 안색이 암울해졌다.
진만석처럼 점점 안색이 어두워지는 인물이 한 사람 더 있었다. 바로 강의실 가장 뒤에서 몰래 지켜보던 김윤택이었다.
* * *
고중전 내내 강우는 학생들을 몰고 다녔다.
강연을 들은 학생들은 대부분 호의적이었다. 특히 1학년 여학생들은 그를 열정적으로 따라다녔다. 고려고와 중앙고 구분이 없었다.
학생들은 올림피아드 대회와 방송 출연을 질문했다. 수학과 물리 공부법도 추가했다. 강우는 열심히 성심껏 설명하며 이들 중에 훗날 책임 있는 과학자가 탄생하길 바랐다.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스타가 된 기분이 들어 연예인이 남부럽지 않다.
‘이 정도면…….’
강우는 자신의 인기를 과시하고 싶은 마음에 차도도를 찾았다. 차도도 앞에서 자신이 이렇게 인기 있는 남자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뿌듯한 자부심을 품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차도도가 심판 보는 장소에 도착한 강우는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
그가 몰고 온 학생보다 적어도 두 배가 넘는 학생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짙은 남색 체육복 무리 사이에 하얀 점이 찍혀 있으니 확 눈에 띄었다. 게다가 그 남빛 체육복은 모두 남학생이었다.
“흐아…….”
좌절한 기분에 강우는 씁쓸하게 몸을 돌렸다.
“강우야! 강우야아!”
그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짓고 달려오는 윤수아가 보였다.
“응?”
“수학 퀴즈를 이겼어! 차희랑 은찬이가 대박이었지! 대우도 물리 퀴즈를 우승으로 이끌었어!”
친구들 모두가 대활약을 펼쳤다는 소식을 전했다.
“넌 해커대회 안 나갔어?”
“난 올해는 쉬려고.”
윤수아도 그와 같은 처지인 듯했다.
“그럼 할 일 없겠네?”
“아니, 바빠. 특별 퀴즈 준비해야지.”
올해도 강우는 특별 퀴즈 문제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가 눈을 굴리자니 윤수아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올해는 에그 드랍 대회로 대체한다네.”
에그 드랍 대회는 건물 옥상에서 누가 빨리 달걀을 떨어트리는지 겨루는 대회다. 즉 옥상에서 지면까지 달걀이 떨어지는 시간을 재어 등수를 결정한다. 단 달걀이 깨지면 탈락이다. 어떤 재료를 써도 상관없고 조별로 도전한다.
얼핏 단순할 것 같지만 달걀이 깨지지 않도록 포장을 심하게 하거나 낙하산을 붙이면 달걀이 천천히 떨어지기 때문에 승리가 어렵다.
옥상이 꽤 높아 달걀을 깨지 않는 것부터 난관이다.
“아, 그거…….”
예전에 손강우가 한국대를 다닐 때 경험해본 기억이 났다.
“강우야, 너도 나갈 거야?”
“아니.”
이왕 쉬기로 했으니 올해는 출전하지 않을 생각이다.
“난 차희랑 대우랑 같이 나갈 거야. 너도 합류하지?”
“난 심판 볼래.”
강우는 고곽천재의 선전을 기대했다.
* * *
건물 아래에 학생들이 구름처럼 모여있었다.
에그 드랍 대회. 일명 달걀 낙하실험이다.
이 학생들은 대부분 초중학교 때 이와 비슷한 실험을 경험했었다. 다만 그때와 차이가 있다. 그때는 주어진 재료가 나무젓가락이나, 고무줄, 빨대 등으로 한정되었고 전체 무게가 제한요소로 작용했다.
이 대회처럼 모든 재료를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다만 그 물체가 반드시 달걀에 접촉해있어야 한다는 조건은 있다.
학생들의 상상력이 무한대로 발휘됐다.
“와아!”
어떤 학생이 떨어트린 달걀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깨졌다. 벌써 실험장 아래에는 깨진 달걀 파편이 상당히 많았다.
대회를 관람하고 있자니 차도도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강우야? 출전 안 해?”
“안 하려고요.”
“아쉽네. 작년처럼 네가 기발한 발상을 적용할 줄 알았는데.”
“나갔으면 상을 탔겠죠?”
“푸흐, 근거 없는 자신감은.”
피식 웃는 차도도의 미소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그사이 어떤 학생이 옥상에서 달걀을 떨어트렸고 달걀은 여지없이 깨졌다.
“예상보다 성공하는 학생이 적네?”
“욕심 때문이죠.”
사실 달걀을 깨지 않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등수에 들려면 복잡해진다. 이런 문제는 정답은 없다. 그야말로 창의력의 대결장이니까.
차도도가 그의 구상이 궁금했나 보다.
“너라면 어떻게 접근할 거야?”
“이게 시간 싸움이잖아요? 낙하시간이란…… 갈릴레이가 증명했듯이 물체가 무겁거나 가볍거나 공평하죠. 깃털이나 낙하산처럼 특이한 형상으로 달걀집을 만들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렇겠지?”
“그런데 순위를 낙하시간으로 매기니까…… 그 말은 자유낙하를 고수하면 이기기 어렵다는 뜻이죠.”
가장 단순한 방법은 스펀지로 달걀을 싸서 떨어트리면 된다. 이때 낙하시간도 자유낙하 표준일 것이다. 대부분 낙하시간은 이 범주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승리하려면 여기에서 상상력을 더해야 한다.
“그러니까 달걀이 깨지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빨리 떨어트리는 게 관건이란 뜻이지?”
“그렇죠. 적어도 달걀을 아래로 던질 정도의 속력은 되어야죠. 그래도 깨지지 않도록 달걀집을 구상해야죠.”
강우의 전략은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대부분 학생이 달걀이 깨지지 않는 포장에 초점을 두는 것과 달랐다.
“그럼 우리는 무엇에 초점을 둬야 할까?”
“충격량이죠.”
강우의 대답에 차도도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콘크리트에 떨어진 달걀이 깨지고 스펀지에 떨어진 달걀이 깨지지 않는 이유는 충격량과 관련이 있다. 물리적 측면에서 보면 떨어지는 달걀의 운동량은 충격량으로 변한다. 충격량은 가해지는 충격력과 시간의 곱이다. 관건은 일정한 충격량에서 충격력을 줄이고 시간을 늘려야 한다.
이것은 자동차 사고 때 위험을 방지하는 범퍼나 에어백의 원리와 같다.
즉 스펀지처럼 충돌 시 접촉 시간이 늘어나면 충격력이 줄어 달걀이 깨지지 않는다. 다만 빨리 떨어질수록 충격량 자체가 늘어난다.
급기야 대형 스펀지가 등장했다. 학생들은 이 스펀지 중심에 달걀을 넣었다. 웬만한 충격이 가해져도 달걀이 깨질 일은 없어 보였다.
이어서 낙하.
스펀지가 바람을 타고 춤을 추듯 너울너울 날며 떨어졌다. 떨어지는 시간이 다른 시도에 비해 두 배는 걸렸다. 탈락은 아니지만 당연히 입상권에 들어가지 못했다.
학생들의 안타까운 탄성이 운동장을 메웠다.
그사이 성공한 조가 늘면서 커다란 보드판에 랭킹이 표시됐다.
- 1등 : 승리의 여신 (중앙고) 4.76초.
- 2등 : 문제아들 (고려고) 4.98초.
- 3등 : 맥주병 (고려고) 5.73초…….
아직은 1등이 자유낙하 시간과 비슷했다.
에그 드랍 대회가 마무리될 즈음 옥상에 윤수아와 손차희, 최대우가 등장했다.
“아자! 아자!”
윤수아가 기합을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강우도 아낌없이 응원을 보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달걀집을 보고 강우는 실소를 머금었다. 얼핏 보면 볼링핀을 거꾸로 세운 것처럼 만들었다. 아니면 소형 미사일이라고 해야 하나? 앞쪽이 유선형이라 공기 저항이 줄어 빨리 떨어질 것 같긴 하다. 빨리 떨어지면 달걀이 깨질 텐데?
달걀집 내부에 달걀과 완충재로 무엇을 넣었을지 새삼 궁금해진다.
윤수아가 최대우에게 넘기자 깊은숨을 들이쉰 최대우가 힘껏 손을 휘둘러 달걀집을 아래로 던졌다.
“허억!”
학생들이 모두 놀라는 사이 던진 물체가 대포알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퍼억!
땅에 떨어지는 순간 달걀집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래도 내부에 싸여 있던 달걀은 깨지지 않았다. 이른바 외부의 달걀집이 충격을 흡수하면서 달걀을 보호하는 방식이다.
시간이 발표되고 랭킹에 들어갔다.
- 1등 : 고곽천재 (고려고) 2.96초.
압도적이었다.
강우가 옥상을 올려다보니 윤수아가 엄지를 척 내밀고 있었다.
고곽천재의 기록은 대회가 끝날 때까지도 깨지지 않았다.
역시 강우가 빠져도 고곽천재는 고려 과학고를 대표하는 천재였다!
* * *
고중전이 끝났다.
올해도 고려고의 승리였다. 다만 아쉽게도 줄다리기에서는 작년처럼 중앙고가 이겼다. 중앙고 녀석들은 밥 먹고 머리는 안 쓰고 힘만 쓰는지.
줄다리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강우는 학생들의 원망을 받았다.
“무식한 돼지를 이겼다!”
고려고의 함성이 높아졌다.
상품으로 도서상품권을 받았고 각종 퀴즈 대회와 에그 드랍에서 발군의 실력을 자랑한 고곽천재는 여러 장의 상품권을 챙겼다.
출전 종목이 없었던 강우는 도서상품권을 받지 못했고 윤수아가 대신 그에게 선물로 줬다. 일 년 만에 이자까지 쳐서 갚은 거라나.
비록 강우는 도서상품권을 타지 못했으나 강연료로 금일봉을 받았다. 얼마가 들어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폐막식 후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고곽천재는 뭉쳐서 뒤풀이를 고민했다. 오늘처럼 학교 외부에서 모일 일이 정말 드물기 때문이다. 다른 학생들도 모두 마찬가지여서 바로 기숙사로 돌아가겠다는 학생은 없었다.
“밥부터 먹어야지?”
“떡볶이!”
손차희가 자동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강우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밥 먹고 노래방 갈까?”
윤수아가 색다른 제안을 덧붙였다. 그들은 벌써 2학년인데도 한 번도 같이 노래방을 간 적이 없다. 손차희의 노래 솜씨는 작년 축제 때 입증되었으니 의문의 여지가 없고 소문에 따르면 윤수아도 만만찮다고 들었다.
강우의 시선이 옆의 최대우를 향했다.
이 자식은 노래를 잘 부르나? 평소 흥얼거리는 화이트 엔젤의 노래를 들어보면 음치는 아닌데…….
최대우가 색다른 제안을 했다.
“담임 쌤도 끌고 가자!”
“아자! 아자!”
최대우의 담임은 차도도이고 손차희의 담임은 신새벽이다. 당연히 그들은 의기투합했다.
정문에서 대기하다가 돌아가는 신새벽과 차도도를 붙잡았다.
“쌤? 노래방 가실래요?”
손차희가 먼저 신새벽에게 권했다.
그들의 면면을 확인한 신새벽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래, 갈게. 차 선생님은?”
“난 피곤해서 그냥 집에 갈래요.”
차도도가 노래방을 거부했다.
강우는 차도도를 붙잡고 싶었으나 어째 그녀의 표정이 가지 않겠다고 주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