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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11화 (211/325)

제211화 신새벽 생일 (2)

한국대 노창열 교수 연구실에서 신새벽은 초조한 마음으로 상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그녀는 지금까지 쓴 학회지 제출 논문 초안을 노창열 교수에게 검토받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노창열에게 학회지 논문을 들이밀 생각이 없었다. 이 제출 논문에는 그녀와 지도교수의 이름만 넣었기에 노창열과는 무관했다.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그녀도 편했으니까.

그런데 초안을 읽어본 지도교수가 노창열에게 한번 검토받아보라고 요구해서 어쩔 수 없었다.

논문을 받은 노창열은 찜찜한 표정으로 그녀를 쓱 쳐다보고는 한동안 말없이 논문만 넘겼다.

당연히 그녀는 속이 탔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 짐작이 되지 않아서다.

“흠.”

가볍게 기침한 노창열이 논문 초안을 책상 한쪽에 밀어놓고 그녀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신새벽도 쉽게 말을 꺼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걸 학회지에 제출하겠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내가 보기엔 아직 미흡한 점이 많아 보이는데…….”

“어떤 점이 부족한지 말씀해주시면…….”

노창열은 다시 입을 다물고 그녀를 쳐다봤다.

자연스럽게 상대를 압박하는 전술이기에 신새벽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가 평범한 대학원생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주눅이 들었겠지만, 그녀도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음, 신새벽 학생. 학생은 내 지도 학생이 아니고 심지어 우리 화학과 학생도 아니잖나?”

“예, 그렇습니다. 저희 지도교수님이…….”

엄밀하게는 신새벽은 화학교육과 대학원생이고 노창열은 화학과 교수다.

“굳이 내가 이 논문을 검토할 의무가 없잖나? 그래도 내가 너그러워서 그동안 우리 학생들 지도 시간까지 쪼개어 가면서 자네 논문을 지도했는데 말이야…….”

실제로 쓴 시간이라고는 거의 없기에 신새벽은 내심 콧방귀를 끼면서도 대꾸하지 않았다. 따지고 들면 지난번 학교 강연에 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긴 했다.

“내가 그만큼 신경 써 줬으면 하다못해 밥이라도 한 끼 사야지 않겠나?”

“제가 점심때 학교 안 레스토랑에서 대접하겠습니다.”

노창열의 눈이 그녀를 아래위로 훑었다.

신새벽은 벌을 받는 기분이다.

“장소는 내가 정하겠네. 학교 안에는 맛있는 데가 없지.”

“그럼?”

“오늘 저녁이 어떻겠나? 내가 서울 근교에 좋은 음식점을 알고 있는데……”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들어왔다.

“교수님? 부르셨습니까?”

노창열이 주머니에서 차 열쇠를 꺼냈다.

“내 차 세차 좀 하고 와. 손세차하는 곳 알지?”

“예, 압니다.”

“다녀오게.”

대학원생이 공손히 차 열쇠를 받아서 밖으로 나갔다.

노창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 학생은 박사 3년 차야. 요즘 논문 쓰느라 정신이 없지. 그런데도 열심히 잔심부름하잖아? 내가 가르치는 학생은 모두 나에게 진심이네. 신새벽 학생은 어떻게 생각하나?”

순간 신새벽의 머리가 팍팍 돌았다.

노창열의 의도를 간파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처럼 그녀도 열과 성을 다하라는 압박이었다. 저녁 대접을 근교, 거기에 세차까지 꺼낸 이유가 있다. 학교 내부 식당에서는 대놓고 갑질을 할 수 없었다.

반면 근교로 차를 타고 멀리 나가면 둘만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어쩌면 식사 때 와인을 몇 잔 곁들이고 밤늦게 운전이 어렵다며 수작을 부릴지도 모르고.

어쨌든 신새벽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다.

“오, 오늘 저녁은 제가 일이 있어서…….”

노창열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자네는 졸업이 급하지 않은가 보지?”

“그, 그게 아니라…….”

“예전부터 같이 밥 한 끼 먹자는데 계속 거부하는군.”

노골적인 요구에 신새벽은 입을 다물었다.

노창열이 그녀의 논문을 되돌려줬다.

“이 논문은 다시 잘 검토해보게. 더 완벽해졌다고, 마음의 준비가 되면 다시 가져오게.”

축객령이 내려졌다. 돌려 말했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그 마음의 준비가 어떤 의미인지도 안다.

신새벽은 논문을 다시 움켜쥐고 연구실을 나섰다.

졸업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다.

* * *

10월 마지막 날에 강우는 신새벽과 만났다.

생일이라고 며칠 전부터 떠들고 다녔으니 외면할 수도 없었다. 신새벽과의 데이트는 지난여름 그가 올림피아드에서 상을 타고 화학경시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이미 예약된 것이기도 했으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강우 역시 오랜만의 기분 전환이기에 당연히 즐거웠다.

휴일이라 강남에서 대낮에 약속을 잡았다.

“강우야, 뭐 먹을래?”

“국밥이요!”

“야! 오늘은 내가 메뉴를 정하는 날이야!”

어이없다는 신새벽의 호통에 강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그럴 거면 뭐 먹을 거냐고 왜 물어보는데.’

짧은 원피스에 얇은 긴 코트를 덧입은 신새벽은 오늘도 여신 포스를 뽐냈다.

문득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신새벽, 차도도와 영화를 봤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 그녀는 원색의 강렬한 원피스를 입었었는데 오늘도 다르지 않다. 단지 색상만 가을 분위기로 바뀌었을 뿐.

“내 생일이니까.”

“회갑연 하셔야죠.”

“죽을래?”

신새벽이 그의 머리에 헤드록을 걸었다. 머리가 그녀에게 밀착되니 괜히 이상하다.

“나만 따라와.”

그녀를 따라간 패밀리 레스토랑은 스테이크와 샐러드바로 유명한, 꽤 비싼 음식점이었다.

물론 강우는 걱정하지 않았다. 설마 선생님이 학생한테 얻어먹으려고.

우아한 분위기에서 칼질하면서 배를 채웠다.

신새벽은 고기의 절반을 강우에게 덜어준 후 주로 샐러드를 먹었다.

“다이어트하세요?”

“그건 기본이야. 그래야 몸매가 유지되지.”

“그럼 차 쌤도요?”

“그럴걸?”

차도도든 신새벽이든 많이 먹는 걸 본 기억이 없다. 참 피곤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지나가던 웨이터가 콜라를 리필해줬다.

“생일 축하드려요.”

“고마워.”

“근데 몇 살이세요?”

“야! 그런 거 묻는 거 아니야.”

그녀가 교편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으니 계산해보면 나이는 금방 나온다. 사실 농담이었다.

“요즘 논문은 잘 되시죠?”

“그게…….”

신새벽은 졸업을 내년 여름으로 잡고 있으니 지금 한창 졸업논문에 매진할 때였다. 강우의 요구는 그때까지 졸업논문을 포함해서 저널에 실을 논문 두 편이었다.

석사 과정은 반드시 해외 SCI 저널에 실을 필요가 없으나 신새벽이라면 국내 한 편, 해외 한 편이 가능하다고 강우는 내다봤다.

“잘 안 되세요?”

“진행이 안 돼.”

“그건 안 굴러서 그래요.”

“야! 넌 내가 꼭 치마 입었을 때만 굴리려고 덤비지?”

“에이, 제가 언제 굴렸다고요.”

“맨날 굴리려고 눈치만 살피잖아?”

한바탕 시답잖게 툭탁거린 후 신새벽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며칠 전 노창열 교수랑 만났는데…….”

“그 교수 상대하지 말라니까요.”

“그게 내 마음대로 되니?”

신새벽의 하소연을 들은 강우도 노창열의 흑심을 바로 눈치챘다. 아무리 봐도 마도환 못지않게 질이 나쁜 놈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요?”

“그냥 때려치워 버릴까…….”

그녀의 심정을 알 것 같다.

오늘 이렇게 자리를 만든 이유는 생일인 것도 있지만 그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겠지. 그녀의 졸업을 책임져야 하는 강우도 당연히 함께 고민하고 도울 생각이다.

“그만두면 쌤만 손해예요.”

“그렇지?”

대학원생 신분으로 교수와 일전을 벌이긴 어렵다. 노창열이 지도교수가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인 상황이었다.

“이래서 내가 우리나라 대학에서 석박사를 밟고 싶지 않았어. 학교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국내에서 하고 있긴 하지만.”

신새벽의 푸념이 계속됐다.

“박사는 해외에서 하시게요?”

“그럴까? 강우야, 나도 강우 따라가서 그 학교 대학원에 입학할까?”

신새벽이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물론 강우는 반대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환영이다.

“그래도 좋죠.”

“그렇지? 같이 유학 가면 서로 의지도 되고.”

“에이, 어떻든 일단 석사부터 졸업하고 고민하죠.”

“아, 그렇지. 석사 논문…….”

다시 신새벽이 풀이 죽었다.

신새벽이 해외에서 박사를 밟겠다고 하니 강우의 머릿속에서 계획이 쫙 펼쳐졌다.

신새벽도 MIT에 입학시킬까? MIT 화학과에 물리화학으로, 그것도 핵융합과 연관된 연구를 하는 교수가 있나?

강우는 휴대폰으로 MIT 화학과를 검색했고 어렵지 않게 적임자를 발견했다.

“있네.”

“뭐가?”

“이 사람 어때요? 이 사람 밑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면?”

“꿈이다. 꿈.”

아무리 그녀가 한국대를 나온 재원이라지만 파트로 석사를 받고 MIT로 진학하기엔 다소 버겁다. 그녀도 현실을 알기에 큰 욕심을 내진 않았다.

“쌤! 제가 보기엔 어렵지 않아요. 지금 쌤의 논문 주제가 꽤 괜찮거든요. 해외 유명 저널에 한두 편 논문을 실으면 MIT 담당 교수가 장학금 주면서 모셔갈걸요?”

“정말?”

“거짓말은 아니죠.”

신새벽이 포크를 빙빙 돌리며 고민에 잠겼다.

“강우야, 우리 지난번 약속 연장하자. 응? 그때 졸업논문까지만 네가 책임지는 거로 했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MIT 입학까지로 하자 응? 강우 너만 도와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사실 다른 보상은 필요 없다. 강우는 연구를 같이할 동료를 모으고 싶으니까. 당연히 저렇게 나오는 신새벽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당연히 내가 더 열심히 할게. 열심히 안 하면 굴려도 괜찮아. 킥킥.”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신새벽이 킥킥대며 웃었다.

차도도와 달리 신새벽은 진학 의지가 강하다. 아마 혼자였어도 언젠가는 박사학위까지 받았겠지.

“그게 문제가 아니라 노창열부터 처리해보죠.”

두 사람은 금방 진지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강우에게 이런 문제는 전혀 힘들지 않다. 실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니까.

고민하던 강우가 마침내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 논문 초안요, 그거 국내 학술지 제출용이죠?”

“응, 맞아.”

“논문 저자는 쌤과 지도교수 두 사람? 노창열은 없는 거죠?”

“그렇지.”

“그럼 상관없으니까 그대로 계속 진행하죠.”

신새벽이 찌뿌둥한 표정으로 고민에 잠겼다.

“으음.”

“지도교수에겐 노창열이 확인했다고 말하세요. 본 건 사실이잖아요? OK 사인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렇긴 한데…….”

“노창열 이름은 안 들어가니까 뭔 상관? 나중에 학회지에 실린 후에 지도교수가 문제 삼기야 하겠어요? 논문이 거부되면 모를까.”

정상적으로 진행한다면 학회지에서 신새벽 논문이 거부될 일은 절대 없다.

학회지에 논문이 실리고 나면 검증했다는 의미가 있기에 앞으로의 행보에도 도움이 된다.

강우의 의견은 지금 당장은 지도교수에게 노창열과 관련해서 거짓말을 하고 계속 추진하라는 뜻이다.

“그래도 될까?”

“그 때문에 문제 생겨도 상관없어요. 다음 논문은 국제학술지에 내서 압도적인 실력으로 잠재워버리면 되니까요.”

“난 강우만 믿어.”

지금 논문이라면 곧바로 학술지에 제출해도 전혀 문제가 없을 수준이니까. 이 일이 신새벽의 졸업에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강우의 자신감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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