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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12화 (212/325)

제212화 신새벽 생일 (3)

내친김에 강우는 계획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국내 학술지와 해외 저널에 넣을 논문 두 편과 석사학위 논문. 물론 이 논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정확하게는 학술지에 실을 두 논문을 합치면 석사 논문이 된다.

여기까지는 예전에 말했던 적이 있다. 지금은 노창열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밀어붙이자는 말이었고.

거기에 강우는 하나를 더 얹었다.

“쌤, 내년 여름에 석사 졸업하고 나면…… 제가 졸업하고 MIT 입학 때까지 1년이 남잖아요?”

“그렇지.”

“그 기간에 쌤도 논문 한 편 더 써요. 그 논문으로 MIT 입학을 결정해보죠.”

“어떤 논문인데?”

“수소원자핵 주변에서 움직이는 뮤온 입자. 뮤온이 전자기적으로는 전자와 비슷하잖아요? 전자의 움직임을 해석하는 학문이 화학이니까…… 뮤온의 거동을 해석해봐요. 이게 수소원자핵일 때, 중수소일 때, 삼중수소일 때 모두 차이가 나거든요. 핵융합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고.”

강우가 복잡한 내용을 열심히 설명했다.

아직 신새벽은 이 주제를 깊이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강우가 이 주제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지 충분히 감지했다.

신새벽은 이제야 자신도 차도도처럼 강우의 연구 중심에 들어왔다고 느꼈다. 그전까지는 강우가 다루는 핵융합과 조금 유리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다.

열심히 매진하면 석사졸업이 문제가 아니라 MIT 입학도 어렵지 않을 것만 같았다.

“고마워.”

“뭘요, 앞으로 쌤이 농땡이 부리면 막 굴리려는 건데요.”

“야! 이게 오냐오냐했더니…….”

“네?”

“아직 나보다 어린 주제에!”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강우는 그냥 넘어갔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개월 후, MIT에 입학하게 될 시점에 그의 동료들이 어떻게 변해있을지 궁금했다. 다만 가장 걸리는 사람은…… 역시 차도도다.

* * *

식사 후 영화관으로 직행했다.

팝콘과 콜라를 사 들고 관람객이 반쯤 찬 극장에서 중간쯤에 앉았다.

신새벽과 영화를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때는 반대편 쪽에 차도도가 있었는데 오늘은 없다. 당연히 강우는 그사이에 다른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영화를 볼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신새벽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적당히 펼친 다음 앉은 채 하반신을 덮었다. 들러붙는 짧은 원피스라 눈부신 다리가 얼핏 드러났다가 코트에 가려졌다.

강우는 얼른 눈을 돌리고 팝콘을 찾았다.

“영화 자주 보니?”

“아뇨. 그때 봤던 영화가 마지막 영화인데요.”

“원시인이네.”

“쌤은?”

“난 많이 봤지. 영화 보는 낙으로 사는데.”

“남친이랑요?”

“내가 남친이 어딨어.”

그동안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하니 신새벽이 왜 좋아하는 눈치인지 모르겠다.

열심히 팝콘을 먹고 콜라로 입가심하다 보니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됐다.

오늘은 남녀 둘이서 가볍게 보기에 적당한 로맨스 코미디 영화였다.

* * *

영화관을 나와 팔짱을 끼고 거리를 활보했다.

신새벽이 자신 있게 그를 끌고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여긴 왜요?”

“내 생일 선물.”

“네?”

“준비 안 했지? 그럴 줄 알았어. 여기에서 지금 사 줘.”

“저 가난한 시골 학생인데…….”

“너 요즘 나보다 월급 더 많잖아?”

신새벽이 막무가내로 그를 끌고 쥬얼리숍으로 갔다.

“강우야? 나 저거 사줘.”

신새벽이 쇼케이스 아래에서 빛을 받아 빛나는 금목걸이를 가리켰다. 고민하지 않고 바로 가리키는 행동을 보니 훨씬 전부터 찜해둔 품목인가 보다.

심플한 디자인이 지난번에 맞췄던 커플링과 비슷하다. 한 세트라고 해도 괜찮을 만큼.

“얼마 비싸지도 않아.”

실제로 비싸지 않았다. 순금 줄이 아니어서 강우도 그리 부담 없었다.

생일선물을 받은 신새벽이 무척 좋아했다.

“자, 가자! 강우야! 이번엔 내가 선물 줄게.”

신새벽이 그를 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우리 학교가 교복이 없어서 은근히 옷값이 많이 들지?”

강우는 옷값이 많이 든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냥 입던 옷 또 입으니까. 사실 가장 패션에 둔감한 사람이 강우였고 다른 학생들도 기숙사 생활에 물들다 보니 대부분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작년 겨울에 보니까 네가 항상 같은 옷만 입더라고.”

언제 그런 것까지 눈여겨봤는지 모르겠지만 신새벽이 그에게 회색빛 코트를 사입혔다.

얇은 코트라서 입어도 부담이 적다. 적당히 추운 겨울에 입으면 딱 맞을 느낌이다.

“이야! 우리 강우! 이렇게 입으니 인물이 훤하네.”

그냥 우스개로 받아넘겼다. 선물로 사준 목걸이보다 더 비싼 코트를 선물로 받은. 득템한 날이었다.

**

차도도는 거실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술과 친하지 않은 그녀이기에, 또 쉽게 술에 취하는 그녀이기에 이처럼 홀로 와인을 마시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창밖의 야경을 구경하다 또 한 모금 마시며 멍하니 세상을 쳐다봤다.

기분이 왜 이런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딱히 걸리는 것이라고는…….

“지금쯤 들어갔을까?”

시계를 흘낏 보니 10시가 넘었다.

밤이 늦은 시각이니 청소년인 강우는 당연히 기숙사에 들어갔겠지. 아니, 들어가야만 한다.

오늘은 신새벽의 생일. 며칠 전부터 신새벽이 강우와 데이트한다고 그녀에게 공언했으니 당연히 두 사람의 만남은 기정사실이다.

선생님과 학생이 만나봐야, 또 예전에 같이 만나 데이트를 빙자해서 돌아다닌 적도 있었으니 별일 없으리란 것은 안다.

그런데도 불안했다. 그 불안의 원인을 그녀 본인도 알지 못했다.

“그냥…… 학생일 뿐인데…….”

강우에게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그녀도 안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녀와 강우 사이에는 무려 십 년이라는 나이의 장벽이 존재한다. 이것은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장벽보다 훨씬 높다.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벽은 몇 년 후면 사라져도 나이 차는 영원하다.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절대 극복이 불가능하다.

“신새벽도 마찬가지인데…….”

그러니 신새벽의 생일을 강우가 축하해준다고 해서 굳이 마음 상할 일은 없다.

그런데도 쉽사리 안정되지 않았다.

체육대회가 있던 날 강우가 여학생을 몰고 다니자 괜히 샘이 났었다. 그래서 그녀도 보란 듯이 남학생 무리를 끌고 다녔다. 강우가 인기 있는 만큼 그녀도 인기 있다고 강우에게 과시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고등학생 같은 치기 어린 행동이다. 어린애에게 질투를 유발하는 치졸한 행동을 하다니.

그때를 떠올리면 이불킥을 하고 싶어진다.

어쨌든 그날 이후 괜히 강우 앞에서 선생님이랍시고 목에 힘을 주고 다녔다.

어제까지는 괜찮았는데 오늘은 강우가 신새벽과 즐겁게 지내고 있으니 마음의 안정이 사라졌다.

“설마 오늘 또 사고 치지는 않겠지.”

강우를 향한 신새벽의 은근한 집념을 그녀도 눈치챘다. 하지만 신새벽과 강우를 믿는다.

자꾸 강우를 떠올리니 그녀의 자부심과 그동안 지켰던 도도한 콧대가 팍 깎여버린 기분이다.

강우 앞에서는 차도도란 이름을 바꿔야 할 판이다.

“그냥 고등학생인데…….”

아무리 그렇게 최면을 걸어봐도 그녀의 눈에는 달리 보인다. 강우는 평범한 남학생과는 뭔가가 달라서 때로는 교수이고 때로는 자신보다 어른스러워 보였다. 무엇 때문인지는 그녀도 모르겠다.

마신 와인이 점차 그녀의 사고를 흐릿하게 했다. 없었던 용기마저 생겨났다.

와인잔과 휴대폰을 번갈아 잡았다 놓던 차도도는 결심을 굳히고 전화를 걸었다.

“강우? 지금 어디니?”

- 아! 쌤! 기숙사요.

“오늘 데이트는 재미있었어?”

- 아! 신 쌤이랑요? 네. 그럭저럭요.

갑자기 샘이 난다. 재미없어야 하는데 재미있었다니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다.

“영화도 봤어?”

- 네.

“뭐 봤는데?”

- 로코요.

“혹시……. 별일 없었지?”

- 무슨 별일이요?

“그, 그래. 선물은 줬어?”

- 줬다기보단 뺏겼죠.

“뭐 줬는데?”

- 목걸이…….

차도도는 신새벽이 자랑하던 커플링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신새벽이 강우에게 선물 받을 동안 그녀는 하나도 받은 기억이 없다. 괜히 신경질이 나고 알 수 없는 위기감이 온몸을 적셨다.

- 저도 선물 받았어요. 겨울 코트요.

둘의 사이가 갑자기 부러워졌다.

“좋았겠네.”

- 에이, 이거 전부 제가 올림피아드 금메달이랑 화학경시 최우수상을 받아서 얻어낸 거예요. 신 쌤이 마음씨가 고와서가 아니라요.

차도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내기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더 가까워진 둘 사이가 눈에 선명히 보인다. 그만큼 그녀의 마음도 더 답답해졌다.

- 쌤도 저랑 내기해요. 제가 기말고사에서 물리 만점 받으면…….“

“강우야? 난 그런 거 없거든. 그만 자렴. 오늘 피곤했을 텐데.”

차도도는 전화를 확 끊었다.

강우와 신새벽의 온종일 행적을 되새겨보니 불안감이 점점 심해졌다.

강우 마음을 잡고 싶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중적인 마음 중에 어떤 것이 진짜인지 그녀도 혼란스러웠었다.

오늘도…….

‘이건 신새벽 때문이야.’

차도도는 휴대폰의 갤러리를 열고 자신의 학창시절 노래를 부르던 영상을 전송했다. 또 항복이라니…….

강우 앞에서는 왜 이렇게 약해지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녀는 차갑고 도도한 차도도인데. 이건 분명히 와인에 취한 탓이라고 스스로 변명했다.

* * *

갑자기 휴대폰으로 날아온 동영상에 강우는 눈을 의심했다.

차도도가 그에게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낼 일은 없다. 게다가 지금까지 동영상을 언급한 적도 없었다.

무슨 영상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뭔가 엄청난 것이 있을 느낌이다.

강우는 차도도가 사준 태블릿으로 영상을 옮겼다.

커다란 화면에서 동영상을 클릭.

순간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차도도가 떴다.

천사다! 그녀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마치 연예인 같은 그런 옷차림이다.

놀랍게도 그녀가 선 곳은 무대였고 중앙으로 걸어 나온 차도도가 마이크를 들었다.

관중의 환호 소리. 일순간 화면이 어수선해졌다.

차도도가 정면을 바라보면서 고운 입을 열었다. 붉은 입술과 하얀 치아가 선명했다.

이어지는 노래. 감미로운 발라드였다.

노래를 잘 모르는 강우가 듣기에도 입이 쩍 벌어질 만큼 잘 불렀다. 예전에 손차희와 고현성이 부르는 노래를 들었지만 차도도와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 예전에 신새벽 쌤이 말했던…….”

차도도가 대학 시절에 교내 가요제에 나간 적이 있다고 하더니, 그만큼 노래를 잘 부른다더니 바로 그 영상이었다.

몇 학년 때인지는 알 수 없다. 지금보다 조금 어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강우는 행복한 기분 속에 노래에 빠져들었다.

“정말 잘 부르네…….”

그는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눈과 귀를 오직 그녀에게 집중했다.

노래를 부르는 화면 속의 그녀가, 평소 강의실에서 수업하는 그녀가, 상담실에서 논문을 펼쳐 놓고 고민하는 그녀가 모두 겹쳐 보였다. 그 모습이 여신으로 변했다.

노래가 끝나고 화면이 정지했다.

강우는 한동안 감동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그는 차도도에게 톡을 넣었다.

- 강우 : 쌤! 대박!

- 차도도 쌤 : 그만 자렴.

- 강우 : 저 소원 생겼어요!

- 차도도 쌤 : 뭔데?

- 강우 : 쌤이 쌤 노래 부르는 거 실제로 보고 싶어요.

- 차도도 쌤 : 꿈 깨.

- 강우 : 히이잉.

- 차도도 쌤 : 그 영상 누구에게도 보여주면 안 돼. 알았지?

- 강우 : 네.

- 차도도쌤 : 잘 자렴(이모티콘).

강우도 침대에 편히 누웠다. 오늘 밤은 왠지 좋은 꿈을 꿀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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