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16화 (216/325)

제216화 마도환의 강연 (2)

차도도는 마도환의 속셈을 눈치챘다.

마도환이 R&E 중인 이민찬과 강우를 언급한 이유는 현재 강우가 연구 중인 상온핵융합의 핵심내용을 빼가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강우가 사전에 경계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마도환의 제안을 환영했을지도 모른다.

딱히 그녀는 상온핵융합 연구로 명성을 얻겠다는 욕심이 없었고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면 더 훌륭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고 여겼으니까.

게다가 상대가 한국대 교수라면 당연히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요셉 교수와 헌팅턴사가 강우를 인정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막연하나마 강우는 마도환보다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 거기에 강우가 몇 번이고 신신당부한 것이 떠올랐다.

‘이것은 마도환의 함정이다.’

그녀의 결론이었다.

다만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명분을 내세운 제안을 거절하기는 쉽지 않다. 남이 보기에 이 제안은 명백하게 마도환의 호의처럼 보일 테니까.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차도도는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마도환의 안면에서 희미한 기대가 스쳐 지나갔다.

“저희 R&E 팀은 MIT의 요셉 교수님께 이미 지도를 받고 있어서요. 추가로 지도교수님을 모시기 어렵습니다.”

완곡한 거절이었다.

순간 마도환의 안면에 어렸던 미소도 사라졌다.

예상치 못했던 듯 잠시 버벅대던 마도환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요셉 교수까지 나왔으니 한국대의 우위를 주장하기 쉽지 않았다.

“아, 그렇군요. 요셉 교수님도 핵융합계의 훌륭한 석학이시지요.”

그렇게 강연이 끝났다.

대부분 학생은 마지막 순간 주고받은 칼날 승부를 인지하지 못했다. 다만 이민찬과 강우 팀이 훌륭한 교수를 모시고 R&E를 한다는 사실을 부러워했다.

추가 질문이 짧게 오간 후 강연이 끝났다.

차도도가 단상을 내려가려 할 때 마도환이 그녀를 불렀다.

“차 선생님, 잠시 의견 나눌 수 있을까요? 학생들과 함께요.”

거절할 명분을 찾아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김윤택이 끼어들었다.

“차 선생님, B동 회의실에서 보죠. 강우랑, 손차희 학생이랑 함께요.”

차마 주임 선생님의 지시를 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

* * *

회의실에 고곽천재를 비롯한 사람들이 모였다.

의외로 그 숫자가 많아 강우도 깜짝 놀랐다.

강우네 팀은 차도도를 비롯하여 고곽천재 넷이었고 상대는 마도환과 김윤택 외에 이민찬과 낯선 학생 둘이었다.

강우는 그 두 학생을 잘 몰랐으나 그중 한 명은 이민찬과 같은 김윤택 반 학생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물리를 잘하는, 거기에 공부도 잘한다고 알려진 전형적인 수재였다. 물론 강우는 그 두 학생의 이름을 외우지 못했다.

쓸모없는 일을 머리에 담아두지 않는 것도 천재의 특성이다.

이민찬네 팀은 기세등등했다. 지도교사와 R&E 지도교수까지 모두가 출동한 셈이니까.

반면 강우네 팀은 상대적으로 라인업이 약해 자연스럽게 위축된 분위기였다. 물론 강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강우는 상담실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마도환에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소집 목적은 뻔하다.’

강우는 아직 강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지 못했다. 어차피 중요하진 않다. 진짜 중요한 사건은 지금부터 벌어질 테니까.

“강우군? 오랜만이네.”

그를 발견한 마도환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차마 거절할 수 없어 강우도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다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연에 오지 않았더군? 왔으면 재미있었을 텐데. 강우 군이 있었다면 더 심층적으로 주제를 다뤘을 거야.”

마도환이 웃으며 신사 흉내를 냈다.

“전 바빠서요.”

거짓이 아닌 진실이다. 강연이 열린 그 시각, 강우는 홀로 세미나실에서 연구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도환이 피식 웃으며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 고려 과학고의 과학 꿈나무를 만나서 기쁩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졸업 후 한국대에 입학하면 좋겠습니다.”

보통 학생이라면 최고의 찬사다.

“모두 핵융합 프로젝트에 조금씩 발을 담근 학생들이지요? 선생님들도 마찬가지고요. 앞서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한 내용을 여기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세계 각국은 핵융합 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의 수준은 대단히 높습니다. 미국 헌팅턴사에서 우리의 능력을 빌려 연구하는 현실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모두가 공감했다. 어떻든 여기 학생들은 첨단 과학에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정작 우리는 어떤가요? 헌팅턴사의 획책으로 서로 갈라져 각자 수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건 국가적인 낭비이자 우리가 세계를 선도할 기회를 발로 차버리는 일입니다. 이 자리에서 제가 제안하지요.”

강우의 안면이 살짝 찌푸려졌다. 저 녀석이 무슨 책동을 일삼을지 짐작됐다.

이어진 마도환의 제안은 놀라웠다.

“최근 국가기관인 대한핵융합센터와 한국대가 협약을 맺었습니다. 대한핵융합센터는 한국형 소형 핵융합 원자로인 K-SUN으로 유명한 곳이죠?”

과학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K-SUN을 들어봤다. K-SUN은 한국형 토카막장치로 최근에는 1억 K에서 30초간 초고온 플라스마를 자기장 내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이 연구를 핵융합 상용화에 적용하려면 플라스마를 최소 십여 분간 안정화해야 하기에 아직 갈 길은 요원하다.

“즉 한국대와 대한핵융합센터는 핵융합의 이론적 모델을 K-SUN에서 실제로 실험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정부에서 모든 실험비용을 부담하지요. 차도도 선생님 팀에서도 저희와 공동연구를 수행하시면 K-SUN 장비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정부에서 연구비를 일부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연구는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고요. 어떻습니까? 협업하는 것이?”

마도환이 애국심에 호소하며 공동연구를 밀어붙였다. 장비와 연구비를 지원하는 당근마저 던졌다. 받지 않을 수 없는 파격적인 제안이다.

손차희를 비롯한 고곽천재는 멍한 표정을 지었고 강우는 독기어린 눈빛을 내뿜으며 조용히 듣고 있었다.

강우의 내심을 읽은 차도도가 조용히 물었다.

“저희가 할 일은 뭐지요?”

“별것 없습니다. 서로 협력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연구주제가 사실상 비슷하니까 학생들끼리 수시로 모여서 토론하고 팀장이신 차도도 선생님과 저도 가끔 만나서 연구 진행 상황을 협의하면 상생이 이루어지겠죠. 학술지에 논문도 공동으로 내고요.”

얼핏 보면 만족스러운 제안이다. 하지만 그 속을 뜯어보면 차도도 팀에서 연구하는 내용을 모두 공유해달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강우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차도도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희는 헌팅턴사와 프로젝트를 체결할 때 비밀엄수 조항이 있습니다만.”

“아, 그건 모든 프로젝트가 다 마찬가지죠. 한국대도 같습니다. 똑같이 헌팅턴사와 공동연구를 수행 중인데 비밀 유지 조항이 과연 해당할까요? 그건 타 업체에 해당하는 조항 아닐까요? 우린 같은 편이니까요.”

마도환이 능수능란하게 피해갔다.

비록 차도도는 성인이어도 마도환만큼 경험이 많지 않다. 특히 연구 방면에서는 아직 햇병아리나 마찬가지여서 바로 반박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헌팅턴사에 모든 연구 결과를 넘기면 안 됩니다. 국가 이익도 챙겨야지요.”

국가 이익이 아니라 마도환 개인의 이익이다. 강우는 마도환의 침 발린 거짓말에 혀를 내둘렀다. 역시 정치질하던 녀석은 다르다.

차도도는 얼떨떨한 낯빛이고 손차희 등은 완전히 마도환의 제안에 넘어간 표정이다.

가소로운 비웃음을 짓던 강우가 끼어들었다.

“저희 연구과제의 총책임자는 요셉 교수님이십니다. 핵융합 실험과 관련해서는 미국 업체를 이미 수배해두셨습니다. 아마 요셉 교수님은 미국에서 실험하기를 원하실 것 같네요. 좋은 제안이긴 합니다만 정작 저희에게 불필요합니다.”

딱 자르는 강우의 대답에 마도환의 안색이 팍 일그러졌다.

“그리고 저희는 프로젝트를 계약할 때 실험연구 추가 지원 조항을 넣었기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굳이 국가 지원금을 쓰지 않고 미국 업체의 돈으로 실험할 수 있는데 국가 세금을 왜 씁니까?”

그런 조항은 없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마도환이 계약서를 보자고 할 수는 없으니까.

강우는 한 방에 마도환의 애국심 발언을 그대로 깨버렸다.

마도환은 할 말이 없어졌다. 요셉 교수와 헌팅턴사를 방패로 내세우니 더는 강요하기 어려웠다.

차도도가 완곡하게 거절 의사를 표명했다.

“저희가 연구하는 과제는 MIT에서 고등학교에 적합한 연구를 따로 떼어 준 것입니다. 한국대처럼 깊이 있는 연구가 아닙니다. 그래서 큰 난관은 없을 듯합니다. 설사 있더라도 MIT의 도움을 받으면 충분하니까요.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저희는 저희대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강우는 마도환이 속으로 분을 삼키는 장면을 똑똑히 확인했다. 어쨌든 무사히 넘어갔다.

“쌤? 오늘 프로야구단 관계자와 만나기로 하지 않으셨어요?”

갑자기 강우는 엉뚱한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어? 그러네. 시간이…… 이런!”

휴대폰 시계를 확인한 차도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강우가 따라서 일어나자 손차희 등도 일어섰다.

다급해진 마도환이 따라 일어서면서 차도도에게 말했다.

“차 선생님, 그렇더라도 가끔 연구 협의를 해보죠? 차 선생님께도 무척 도움 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다음에 뵐게요.”

서둘러 마무리하면서 차도도가 꾸벅 인사했다.

차도도를 따라 회의실을 나가면서 강우는 마도환을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마도환은 그가 왜 적대심을 보이는지 몰라 얼떨떨하겠지만 어차피 그건 알 바 아니었다.

강우는 회의실을 나가면서 문을 쾅 닫았다.

* * *

“허허!”

차도도 팀이 사라지자 김윤택이 헛웃음을 삼켰다.

김윤택은 강우에게서 명백한 적의를 발견했다. 멀리 학교까지 방문한 손님에게 미안해지는, 버릇없는 학생의 태도다.

마도환도 어이가 없는 듯 신음만 삼키며 금방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어린애입니다. 굳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지요.”

김윤택이 에둘러 마도환을 달랬다.

표정을 간신히 다스린 마도환이 별일 아니라는 듯 대응했다.

“그렇지요. 연구란 게 얼마나 어렵고 험난한 항해인지 몰라서 저럴 겁니다. 조금이라도 서로 도우면 훨씬 도움이 될 텐데 말입니다. 왜 저리 아집이 강한지…… 쯧쯧.”

“제가 열심히 설득해 보지요. 학년 주임으로서 부끄럽습니다.”

김윤택이 마도환에게 최대한으로 예의를 차렸다.

쓴웃음을 삼키던 김윤택의 시선이 이민찬에게 머물렀다.

“강우 군이랑 친한가?”

“강우와는 아니지만 그 팀인 손차희와 윤수아랑은 친합니다. 중학교 때부터 알던 사이니까요.”

“흠, 그렇군. 그럼 잘됐어. 친구들의 고뇌를 모른 척하면 친구가 아니겠지. 그러니까 자네가 수시로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 연구를 잘 진행하는지 알아봐. 문제가 있으면 우리가 즉각 도와야 하지 않을까. 저들의 중간 보고서나 연구 요약본 등을 입수할 수 있으면 더 좋고.”

좋게 포장해서 말했어도 그 본뜻을 모를 이민찬이 아니었다.

이민찬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마도환이 김윤택에게 말했다.

“김 선생님도 차 선생님의 연구를 자주 들여다봐 주십시오. 혹시라도 차 선생님이 문제를 일으켜 고려고의 명예에 흠집이 생기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두 사람의 확답을 얻자 마도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빠서 이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마도환은 김윤택과 악수하고 학생들의 인사를 받았다.

고려 과학고의 주차장에서 마도환은 담배를 빼 물었다. 강우와 차도도를 떠올리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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