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19화 (219/325)

제219화 연말 특집 방송 (1)

한국에서 수능은 12년의 공부를 마감하는 의미가 있다.

지금은 진학 방법이 다양해져서 과거만큼 절대적인 영향이 없더라도 수능은 학생들에게 인생의 목표 달성 수단이자 고등학교를 마감하는 실질적인 의미를 지닌다.

덕분에 수능일 전날이 되면 후배들이 선배를 챙겨주는 전통이 있다. 일반고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수능 중요도가 떨어지는 고려 과학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앞장선 윤수아를 따라 강우는 최대우와 함께 천문대에 도착했다.

내일 수능을 잘 치라는 격려 행사다. 동아리 연례행사로서는 비중이 꽤 크고 선배들과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시간이다.

이번에 수능을 치는 3학년은 강우가 1학년 때 함께 활동했던 선배들이어서 비교적 얼굴이 익었다. 물론 그 가운데 제일 친한 학생은 권유성이다.

“유성이가 벌써 졸업이야?”

“방금 입학한 애 같지?”

윤수아가 웃으며 강우의 말에 동조했다.

이제는 권유성도 제법 키가 컸는데 처음의 이미지 때문인지 강우가 보기에는 여전히 중학생처럼 느껴진다.

천문대에는 3개 학년이 모여서 북적였다.

수능시험을 치는 십여 명의 3학년에게 찹쌀떡과 초콜릿을 품에 안겼다.

여학생이라 인기 폭발인 윤수아를 따라 강우와 최대우도 선배들에게 인사하며 시험을 잘 치르기를 기원했다.

“강우? 내년엔 너야. 넌 수능 잘 못 칠걸?”

권유성이 강우에게 시비를 걸었다.

물론 이제는 저 시비에 악의가 없음을 잘 안다. 단지 저 녀석 성격이 저럴 뿐이다.

“그럼 넌 잘 치겠니?”

“나? 실전에는 강하거든? 난 사실 수능 잘 쳐봐야 써먹을 데도 없어.”

“유학 가?”

“가야지. 내가 안 가면 누가 간다고!”

자신만만한 표정이 권유성다웠다.

한국대를 목표로 했던 권유성은 지난여름에 미국 MIT를 다녀온 이후 목표가 바뀌었다. 역시 넓은 세상을 경험해봐야 한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다.

한국대보다 MIT가 더 좋은 학교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큰물에서 놀면 세상을 보는, 인생을 접하는 시각이 달라지니까. 강우도 환영해주었다.

“어디로 갈 건데?”

“아이비리그.”

“아이스하키 선수냐?”

강우는 시답잖은 농담으로 권유성의 진로를 확인했다.

권유성은 미국 전통 명문대인 아이비리그에 속한 대학 서너 곳에 원서를 넣겠다고 했다.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은메달을 땄고, 교내경시에서도 수상 이력이 있어서 큰 문제만 없다면 입학 가능성이 크다.

“토플도 쳤고 SAT도 쳤고, 봉사도 하고…… 나도 꽤 바쁘게 보냈지.”

권유성이 최근 1년간 고생한 이야기를 풀었다. 수능만 잘 보면 입학하는 한국의 대학과 달리 어쩌면 미국 대학 입학이 신경 쓸 일이 더 많다.

“MIT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넌 MIT 가려고?”

권유성의 눈이 동그래졌다.

강우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MIT도 지역을 따지면 미국 북동부라 아이비리그와 멀지 않다. 아무래도 미국에 가서도 자주 얼굴을 볼 듯하다.

“크크, 그냥 내가 있는 학교로 와. 고등학교 후배, 대학교 후배! 캬, 기분 끝내준다! 그냥 나도 MIT로 가버릴까?”

권유성의 놀림을 받으니 절대 녀석이 다니는 대학에는 가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권유성은 윤수아에게도 미국으로 유학 오기를 권유했다.

주변의 가까운 학생이 유학 가는 모습을 보니 유학이 먼 세상의 일이 아님을 피부로 실감했다. 고곽천재 모두에게도 내년 이맘때면 벌어질 현상이다.

손강우 시절에는 별생각 없이 무조건 한국대로 진학했었다. 그때 외국으로 나갔으면 인생이 달라졌을까? 지긋지긋한 마도환과 얽힐 일은 없었겠지. 그랬다면 지금 이 자리에 그가 없을지도. 어느 인생이 더 행복한지 지금은 혼란스럽다.

“유성아! 그래도 내일 시험 잘 쳐!”

“난 강우처럼 답지에 미술작품을 그리진 않아!”

윤수아의 격려에 권유성이 우스개로 대답했다.

“어휴, 저 녀석. 꼴찌나 하지 말아라!”

강우는 고개를 저으며 권유성을 응원했다.

고곽천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대학 때 잠시 헤어지더라도 과학계를 떠나지 않는다면 결국 다시 모이기 마련이다. 높은 산에서 갈라진 물이 서로 다른 강을 흐르더라도 결국 바다에서 만나듯이.

“대우야, 넌 유학 생각 있어?”

“가고 싶은데…… 형편이…….”

이 녀석의 가장 큰 고민은 경제적 부담이다. 절대 뒷받침하기 어려운 집안 형편이니까.

강우는 최대우의 어깨를 힘껏 잡았다.

“걱정하지 마.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해줄게.”

최대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가 하는 프로젝트! 그것만으로도 입학금을 감당할 수 있어.”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다. 하지만 장학금을 받으면 충분히 해결된다. 설사 장학금을 받지 못하더라도 요셉 교수나 헌팅턴의 지원을 받으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중요한 핵심은 그들에게 가치를 증명하는 것뿐.

“정말 가능할까?”

“나만 믿어.”

이 녀석은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녀석이고 믿음직한 동료였다. 끝까지 함께해야 한다. 그러러면 돈이 이 녀석을 가로막지 않도록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가능할 거야.”

윤수아도 최대우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수아 너도 웬만하면 유학 가지? MIT로?”

“그러고 싶지만…….”

애초에 윤수아는 고민이 많았다. 유학과 국내 대학 사이에서 결심하지 못했다. 여름에 미국을 다녀온 후 하버드를 입에 달았으나 지금은 또 국내 대학을 고민한다.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길이 많으니 청춘이다.

경제적인 문제는 아니다. 정확히 모르긴 해도 아마 그녀의 개인 가정사가 문제로 보였다. 그 부분은 그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 강요는 어렵다.

“졸업하면 성인이잖아? 네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해. 이제는 부모님께서도 말리지 않을걸?”

“난 아직 컴퓨터로 갈지, 전산으로 갈지, 아니면 물리학이나 화학으로 갈지 모르겠어. 수학은 머리가 안 되는 것 같고.”

강우의 옆에 있는 학생들의 단점이다. 강우를 접하다 보면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강우와 비교하면 꼭 바보가 된 느낌이니까.

강우는 윤수아의 머리 위 재능을 다시 확인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윤수아가 수학 재능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수아야, 우리 헌팅턴 프로젝트 하잖아?”

“응.”

“거기에서 수소 플라스마를 수학적인 모델로 분석하면 컴퓨터를 이용한 수치해석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거든?”

눈이 동그래진 윤수아를 보니 너무 어렵게 설명했다는 느낌이 왔다.

“하여튼 프로그램을 짜서 플라스마의 거동을 해석하는 연구야. 이게 원래는 슈퍼컴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건 요셉 교수의 도움을 받으면 되고, 이 연구 한번 해볼래? 이걸로 MIT 전산학과를 비벼볼 수 있을 것 같아.”

윤수아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밝아지는 것을 강우는 놓치지 않았다.

“어? 내가 슈퍼컴을?”

“방학 시작하자마자 시도해보자.”

윤수아가 머뭇거릴 틈을 주지 않고 강우가 밀어붙였다.

어설픈 동의를 받아낸 후 강우는 손차희가 어딨는지 물었다. 손차희는 천문반이 아니어서 이곳에 오지 않았다. 지금쯤 수학연구반에서 떡을 돌리고 있겠지.

“차희는…… 유학으로 뜻을 굳혔나 봐. 학교는 아직 모르겠어. 차희는 미국 동부, 서부, 주립대, 사립대 어느 곳이든 갈 수 있으니까. 재주도 많고 여건도 되고.”

지금까지 손차희가 이룬 성과를 고려하면 웬만한 학교는 입맛대로 골라갈 수 있다.

유학이 확실하다면 손차희는 천천히 신경 써도 문제가 없다.

“거의 결정했지? 그럼 남은 1년은 우리도 권유성처럼 유학 준비를 하면 되겠어.”

강우의 선언에 최대우와 윤수아가 주먹을 꾹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고곽천재의 미래가 방향을 잡았다.

“강우야 뭐 잘할 테니까…… 우리는 너만 믿을게.”

“그런데 가장 큰 문제가 남았어.”

“뭔데?”

강우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들에게 관심을 두는 학생이 없음을 확인했다.

“차도도 쌤과 신새벽 쌤.”

“응? 선생님들이 왜?”

“그 두 분도 데려가려고.”

강우의 허황한 계획에 두 사람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학 생각은 있으시데?”

“있게 만들어야지. 앞으로 일 년간.”

지금까지 마주친 그 어떤 문제보다 힘든 난관이다. 하지만 계획을 세워 노력하면 세상일은 이루어지는 법이다.

* * *

방송 녹화 당일 아침 일찍 강우는 차도도의 집에 도착했다.

오자마자 끌려간 곳은 헤어숍. 강우는 차도도 옆에서 머리를 다듬었다.

물론 그가 걸린 시간은 금방이었던 반면 차도도는 꽤 오래 머리를 매만졌다. 그는 곁에서 차도도의 미모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실험 리포트를 써도 될 정도잖아.’

남들이 들으면 황당하다고 여기겠지만 그에게는 차도도의 변신이 그렇게 보였다.

원래 돋보이던 미모가 한층 탄력을 받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옷을 준비했다.

지난번 촬영 때는 차도도가 마련해준 옷을 입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여름이었던 그때 옷을 또 입을 수는 없다. 그때처럼 차도도는 미리 그의 옷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평범하지도 않은 고등학생다운 옷이었다. 비싼 옷이어서일까. 절로 온몸에서 부티가 발산되는 기분이다.

어색하게 갈아입은 옷의 옷깃을 여며주고 단추를 채워주면서 차도도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쌤? 이렇게 자꾸 옷을 사주시면…….”

“네가 평소 입는 초딩 옷차림으로 방송국에 갈 수는 없잖아?”

“그야 그렇지만…….”

“쌤은 부담 없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지난번과 같은 반응이다.

차도도가 골라 준 옷은 그에게 무척 잘 어울리고 마음에 들었기에 강우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많은 선물을 주는데도 변변찮게 답례하지 못해 마음에 걸렸다.

옷을 입고 거울을 들여다보니 연예인 티가 났다.

차도도가 환하게 웃으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차려입으니까 강우도 미남이네.”

“언제는 추남이었어요?”

“그건 아닌데 훨씬 멋지게 변했어. 돈을 쓰더라도 이렇게 변화가 보이면 뿌듯하지.”

차도도의 심정을 알 것 같다.

강우도 차도도를 힐끔 보면서 비슷한 기분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쌤? 저도 옷 사드려도 돼요?”

“응?”

차도도가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옷을 받으니까…… 저도 답례하고 싶어서 그렇죠.”

“어…… 그래, 수수한 거라면.”

“사려면 사이즈를 알아야 하는데요?”

“응? 무슨 사이즈?”

무심코 강우를 쳐다보던 차도도의 안색이 갑자기 확 바뀌었다. 자신의 가슴과 아랫배를 내려다보던 그녀가 주먹을 들고 강우의 가슴을 쳤다.

“이게! 쪼그만 녀석이 무슨 소리야! 갈수록 능글맞아지네?”

“네? 신새벽 쌤은 사달라고 사이즈를 막 알려주시던데…….”

“어휴! 신새벽 이 여자가 착한 애를 다 물들여놨어! 아주 그냥!”

“으아악!”

길길이 날뛰는 차도도를 피해 강우는 거실로 후다닥 도망쳤다.

갑자기 차도도가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으나 다음 생일에는 예쁜 옷을 선물하겠다는 생각만으로도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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