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3화 연말 특집 방송 (5)
김상학은 이번 라운드에서 자신이 공격 타겟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존자 셋은 고려 과학고 멤버이고 게다가 둘은 같은 반 선생님과 학생으로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당연히 저 둘은 그를 공격할 것이다.
거기에 MC와 패널들마저 그를 공격하는 것이 뼈아팠지만 어차피 중요하지 않다. 이번 문제는 그의 장기인 수학이니까.
김상학은 공격에 발을 맞춰 답하면서도 차도도와 강우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가 판단한 차도도는 똑똑한 여자이긴 해도 수학을 다룬 지, 특히 이런 가벼운 뇌풀기 수학을 다룬 지 오래되어 속도가 느리다. 즉 그의 경쟁자가 아니었다.
반면 옆에 앉은 강우란 녀석은 속을 알 수 없었다. 표정에도 특별한 변화가 없다. 예능 프로에 나왔으면 청중을 웃기면서 개그도 좀 쳐야 하는데 시종일관 진지 모드다. 그렇다 보니 그 실력과 속내를 들여다보기 어려웠다.
‘실력은 있겠지. 올림피아드 메달리스트니까. 그런데 아이큐는 왜 그 모양이지?’
그는 아이큐 신봉자였고 천재는 타고난 재능이라고 여겼다. 노력해서 머리가 좋아질 것 같으면 노력하지 않을 자 누구인가? 학창 시절에 밤잠을 자지 않고 공부하는 노력파들을 한두 시간 공부로 눌러버린 이력이 있는 그였다.
강우의 아이큐가 그 수준이라면 어떤 녀석인지 뻔했다. 그런 녀석이 자신의 과외 팀을 비난했다는 사실이 분노를 불러왔다.
언제 한 번 만나서 혼쭐을 내주고 싶었는데 마침 판이 제대로 깔렸다. 이쯤에서 녀석을 좌절시켜야 한다.
눈치를 보던 김상학은 강우의 행동이 어색함을 확인했다. 열심히 그를 공격하면서 차도도를 돕고 있었다.
‘이번에는 강우를 떨어트린다.’
결승에서 차도도를 상대하면 가뿐하게 이길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결승 상대로 시커먼 남자보다 화사한 여자가 백 배 낫다. 그래야 화면이 잘 잡힌다.
첫 댓글의 주인공이 되세요!
강우는 차도도가 풀기 전까지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도 기다렸다. 더 큰 좌절을 안겨주기 위해서.
정답은 구했다. 답은 BEST. 태블릿에 쓰기만 하면 된다.
이미 세 글자는 써뒀다. 마지막 글자를 쓸 기회를 엿봤다.
그때 차도도가 급히 답을 쓰는 장면이 목격됐다. 차도도가 맞히는 순간 강우가 답을 쓰기 직전에 그가 마무리를 지을 생각이다. 그런데 느닷없는 강우의 질문이 개입했다.
“그럼 둔재를 왜 가르치죠? 돈인가요?”
순간 차도도의 머리에 O자가 들어왔다.
마지막 글자를 쓰려는 찰나 김상학은 혼란이 발생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김상학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큰돈이 되기에 올림피아드 팀을 짜서 가르쳤다. 당연히 메달 가능성은커녕 국가대표에도 뽑히기 어려운 녀석들인 줄 안다.
그런데도 돈을 벌려고 넌 할 수 있다고 독려하면서 어려운 문제를 암기시켰다.
평범한 학생의 경쟁에서는 암기 효과를 보더라도 천재들의 경연장인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는 쓸데없는 짓이다. 팀원들이 올림피아드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그 여파로 학교 내신마저 영향을 받으리라 예상하지만 그가 걱정할 바는 아니었다.
수학은 그런 식으로 하는 공부가 아님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아무도 국가대표에도 뽑히지 못했다.
심적인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그 지점을 강우가 묘하게 찔렀다.
“큭!”
김상학은 헛기침을 터트리며 멈칫했다가 재빨리 태블릿에 마지막 문자를 썼다. 그리고 전송.
삐!
양쪽에서 동시에 소리가 났다.
김상학은 자신의 머리 위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사실 돌릴 필요도 없었다. 옆자리인 강우의 머리 위에 O자가 보였으니까.
* * *
기분 좋은 마지막 라운드가 시작됐다.
이런 결과를 전혀 예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달성하고 보니 환상 그 자체다. 이 방송 출연에서 최상의 결과를 얻어냈다.
김상학과의 전 라운드는 다소 위험했다.
녀석의 표정에서 그 전략을 눈치챘다. 당연히 그가 노골적으로 유도한 대로다.
관건은 차도도가 푸는 순간이다.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끈질기게 기다렸다. 아주 조금만 더 녀석보다 빠르면 된다.
‘흔들릴 줄 알았지.’
어찌 보면 다소 비열한 공격일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학생을 망친 녀석의 술수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은찬과 손차희가 녀석의 팀에 가담하지 않은 것이 평생의 올바른 선택이었다.
“우와! 이렇게 사제대결이 시작되는군요. 강우 학생? 학교에서 차도도 선생님의 인기는 어느 정도 입니까?”
“넘버 원 선생님으로 항상 뽑히십니다. 다른 학교에도 팬이 엄청 많습니다. 제가 물리를 잘하게 된 것도 선생님 덕입니다.”
MC 유현무가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별별 질문을 다 던졌다.
“그럼 외모 때문입니까?”
“선생님 실력 때문이죠.”
“차도도 선생님? 선생님께서 좋아하는 학생이 있겠죠?”
“당연하죠.”
“강우 군은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강우는 차도도를 슬쩍 봤다.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당연히 저도 좋아하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그럼 오늘의 승자를 양보하시겠습니까?”
“그건 곤란하죠.”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방청객에서 폭소가 터졌다.
결승이 되자 강우도 여유로워졌다.
“선생님은 어떠십니까? 좋아하세요?”
“전 저희 반 학생 모두를 사랑합니다.”
차도도가 웃으며 대답했다.
“강우 군도요?”
“네. 강우 군도 사랑합니다.”
강우는 차도도의 고백을 듣는 것 같아 기분이 붕 떴다.
“그럼 사랑하는 제자를 위해 양보하시겠습니까?”
“실력으로 가져갈 것 같네요.”
차도도가 재치 있게 대답했다.
“마지막 라운드! 선생님을 좋아하는 학생과 학생을 사랑하는 선생님! 과연 최고 천재는 누구일까요? 뇌섹남인 강우와 뇌섹녀인 차도도! 두 사람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마지막 라운드 문제는 다소 싱거웠다.
긴장감이 떨어져서 일지도 모른다. 차도도를 공격하기 힘들어서였을 수도 있고.
MC와 패널들은 두 사람을 교대로 공격했고 강우는 어렵지 않게 대화하면서 문제를 풀어냈다.
“자! 두 분 앞으로 나오시죠.”
대결이 끝나자 유현무가 강우와 차도도를 무대 중앙으로 불렀다.
“소감을 들어볼까요?”
“선생님, 양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강우는 천재가 맞아요. 천재가 모인 과학영재고에서도 단연 돋보이거든요.”
몇 차례 소감이 우스개를 타고 흘러간 후 유현무가 강우에게 물었다.
“진 사람 벌칙이 있죠? 자, 강우 학생은 선생님에게 무엇을 시키고 싶은가요? 평소 시키고 싶던 거 말해보세요! 선생님이 지금 무조건 벌칙을 감당해야 하거든요!”
예상치 못한 권한이 떨어졌다.
그는 차도도의 어떤 모습을 보고 싶은 걸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무대가 마련됐다.
반주가 나오고 차도도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녀의 고운 목소리가 홀을 채우기 시작했다.
한때 대학교 축제 가요제에 출전해서 상을 받았었다고 했던가. 그녀의 노래는 놀라웠다.
강우는 그녀에게서 받았던 가요제 동영상을 떠올렸다. 마치 그날처럼 차도도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 어떤 가수가 부르는 노래보다 훨씬 감미로웠다. 그는 정신없이 노래에 빠져들었다.
노래에 취한 방청석의 반응도 비슷했다.
모두 그녀의 실력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화려한 미모에, 놀라운 지성에, 압도적인 가창 실력이라니!
차도도는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역시! 대단합니다! 혹시 가수 권유는 없었나요?”
“아뇨. 제가 노래를 잘 부르는 줄 아무도 몰라요. 다만 연예인 데뷔 권유는 길거리에서 엄청 받았습니다.”
“아! 그렇겠네요. 오늘 이후에도 연예기획사에서 전화가 엄청 올 겁니다.”
그렇게 차도도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됐다가 다시 강우에게 돌아갔다.
“오늘의 승자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겠죠? 벌칙은 아니더라도 뭔가 시켜야겠죠? 차도도 선생님께선 강우에게 무엇을 시키고 싶습니까? 복수해야죠?”
차도도가 홍조를 띤 채 강우를 쳐다봤다.
강우는 별달리 재주가 없다. 노래나 춤도 마찬가지. 사람들의 눈과 귀를 버릴 판이다.
고민하던 차도도가 마침내 입을 뗐다.
“강우에게 칠판과 분필을 주세요.”
“아! 이게 뭘까요?”
유현무의 개그가 이어지는 가운데 화이트보드와 마카가 설치됐다.
차도도가 설명을 이었다.
“강우는 칠판 앞에서 문제를 풀 때 가장 멋지죠. 강우야?”
강우는 멍한 상태로 보드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차도도와 눈을 맞췄다. 차도도의 눈동자에서 열정이 보였다. 그것은 그를 향한 열정이기도 했고 과학을 향한 열정이기도 했다.
그는 평생 과학과 함께 살아갈 과학자다. 그렇기에 방송에서도 과학을 보여주고 싶다.
강우의 안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진지함이 덮였다.
가볍게 숨을 쉰 강우는 화이트보드 한쪽 끝에서부터 수식을 쓰기 시작했다.
최근 그가 상온핵융합을 연구하면서 고민하던 수학적 모델이었다.
화이트보드에 최신 연구 수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히 그 수식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복잡한 미적분으로 표시된 수식의 형태는 매우 아름다웠다.
강우는 신들린 듯 수식을 적어나갔다.
그의 얼굴은 진지했고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자 그 자체였다.
그 표정이 MC와 패널, 게스트를 사로잡았다. 수식을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그 중요성은 저절로 눈에 박혔다. 어쩌면 저 수식이야말로 인류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 되리라고.
화이트보드의 절반이 순식간에 채워졌다. 강우의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고 촬영 현장을 압도했다.
일순간 강우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려 차도도를 바라봤다.
차도도가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붙었다. 그리고 차도도가 마카를 넘겨받았다.
“아!”
방청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차도도가 수식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강우가 쓰던 내용의 다음 편이었다.
그녀의 손놀림 또한 거침없었고 얼굴에는 자신감이 흘렀다.
강우의 퍼포먼스에 압도되었던 사람들은 차도도의 움직임에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노래를 부르던 천사가 수식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 수식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한차례 수식을 나열하던 차도도가 다시 마카를 강우에게 넘겼다.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는 오직 그들 두 사람만 존재했다. 그리고 두 사람을 수식이 둘러싸고 있었다.
천재 학생과 천재 선생님!
강우는 그 뒤를 이어 수식 전개를 계속했다. 마치 그들 두 사람을 가로막을 장애물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스윽- 스윽-
모두가 숨을 죽인 듯 정적에 사로잡혔고 보드를 미끄러지는 마카 소리만 가볍게 흘러나왔다.
수학의 신, 과학의 신이 강림했다!
이윽고 넓은 화이트보드의 전면이 수식으로 가득 찼다.
더 쓸 곳이 없어졌을 때 강우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조용히 마카를 손에서 놓았다.
여전히 멍한 얼굴로 쳐다보는 유현무를 향해 강우는 말했다.
“더 쓸 곳이 없군요.”
“이, 이게 뭡니까?”
“상온핵융합의 수학적 모델이죠.”
“아!”
말문이 막힌 유현무는 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보드에 적힌 수식을 훑었다. 당연히 그가 알아볼 수 있는 수식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전 세계에서 이 수식을 이해하는 자는 없었다.
강우는 쑥스러운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이 수식이 인류를 구원할 겁니다.”
“네?”
“저와 차도도 선생님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정을 품고 있으니까요.”
강우와 차도도의 시선이 서로 만났다.
둘을 향한 우레 같은 박수가 홀을 가득 메웠다.
한쪽 구석에서 질린 표정을 짓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오늘 이 방송에서 3등을 차지한 김상학이다. 그 또한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