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4화 학기 마무리 (1)
“녹화 잘 끝났어?”
“아니.”
“그럭저럭.”
저녁 식사 후 쉬는 시간, B동 앞 벤치에서 고곽천재가 잡담을 하고 있었다.
윤수아의 질문에 최대우와 강우의 대답이 달랐다.
“왜?”
윤수아의 질문에 최대우가 푸념을 늘어놓았다.
“하아! 밥을 안 주더라고.”
“응?”
“개도 밥 주고 집을 지키라고 하거든? 근데…… 무려 12시간 동안 녹화하는데 밥은 한 번밖에 안 줬어. 사람을 굶기고 일 시키면 나쁜 짓이지.”
녹화가 길어져서 밥 시간이 엉켰다. 게다가 대부분이 연예인이라 녹화 중간에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최대우는 벌칙으로 중간에 짜장면 한 그릇을 먹었으나 그것으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윤수아가 호응했다.
“고생 많이 했네. 나는 앞으로 방송 녹화는 하지 말아야지.”
“누가 시켜 준데?”
손차희가 옆에서 딴지를 걸었다.
최대우를 달래면서 윤수아가 다시 물었다.
“그래도 연예인도 많이 만나고 좋지 않았어? 특히 네가 좋아하는 주연이랑 이야기할 시간이 많았잖아?”
“하아! 난 주연 싫어해.”
어? 여학생 둘은 말할 것도 없고 강우마저 눈이 동그래졌다.
얼마 전까지 애나와 주연 둘을 놓고 고민하던 최대우였기 때문이다. 애나는 예쁘지만 너무 멀고 주연은 귀엽지만 연락이 어렵다나.
이번 녹화도 주연이 함께 출연한다고 누구보다 좋아했던 최대우였기에 이런 반응은 의외였다.
“너 중간 브레이크 타임 때 주연이랑 잘만 놀았잖아?”
강우의 지적에 최대우가 고개를 저었다.
“놀면 뭐 해? 말이 안 통하는데.”
“무슨 말?”
“내가 울릉도에서 별본 이야기를 했거든. 그랬더니 주연이가 무슨 별자리를 제일 좋아하냐고 물었어. 난 밝은 별이 많고 성운 성단도 널려 있는 오리온자리가 좋다고 대답했는데 주연이는 그건 별자리가 아니란 거야. 그래서 넌 무슨 별자리가 좋으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양자리가 좋다고…….”
양자리는 밝은 별이 거의 없는 작은 별자리인데 그게 왜 좋은지 최대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둘이 대판 싸웠다나.
천문에 문외한인 강우도 어떻게 된 일인지 금방 눈치챘다. 최대우는 하늘의 별을 관측하는 천문학을 말했고 주연은 탄생 별자리와 관련된 점성술을 말했다. 주연의 탄생 별자리가 양자리였나보다.
천문학과 점성술은 양립하기 어렵다. 하나는 과학이고 하나는 미신이니까 극과 극이다.
그 둘의 공존은 케플러 이전에나 가능했다.
“그래서 말이 안 통하는 주연이는 놔주기로 했어. 그에 비하면 애나는 정말 여신이지. 나보다 수학과 물리를 더 잘해. 그만큼 똑똑한 여자는 내 평생 처음이야.”
최대우의 입에서 한동안 애나를 향한 찬사가 끊어지지 않았다.
최대우에게서 녹화에 관한 재밌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자 손차희와 윤수아의 시선이 강우에게로 옮겨왔다.
“넌 잘했어?”
“어, 잘한 것 같아.”
“뭐 했는데?”
“칠판에 수식을 가득 전개했어.”
“어떤 수식?”
“핵융합 모델.”
손차희와 윤수아의 눈동자에 지진이 났다. 그 어려운 수식을 방송에서 풀면 어쩌라고? 아무래도 그 예능 프로그램이 망할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설마 차도도 쌤도 문제풀이 하신 건 아니지?”
“쌤은…… 노래 불렀어.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불렀는데…….”
“우와! 재밌겠다! 언제 방영한대?”
“크리스마스 직후.”
방송국에서 문제를 풀었다는 그를 비난하더니 정작 차도도는 멋있겠다고 반응하는 두 여학생에게서 강우는 알지 못할 배신감을 느꼈다.
“난 들어가서 공부나 할란다.”
강우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세미나실로 발길을 옮겼다.
기말고사가 임박했음에도 고곽천재는 한가했다. 예전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여유로움이다.
물론 강우는 올해 들어 내신시험을 고민한 적이 없다. 다른 친구들은 사정이 달라 시험이 다가오면 제대로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가해도 너무 한가했다.
그 조짐은 수능 전날 권유성을 만난 다음부터 발생했다. 권유성을 따라 진로를 외국 유학으로 잡은 후부터 수능이나 내신에 무감각해졌다. 물론 외국 대학이 내신을 본다고 해도 국내만큼 중요하지 않다. 게다가 그들은 프로젝트 덕분에 연구 실적이 풍부하다. 앞으로 일 년 후면 연구 실적이 엄청 늘어날 게 눈에 보인다.
그 결과 기말고사에 목을 맬 필요가 사라졌고 상대적으로 느슨해졌다. 물론 그 와중에도 손차희는 전교권을 놓치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공부하고 있었다.
“형!”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하은찬과 유혜림이다. 이 둘은 서로 공부를 잘한다고 싸우면서도 자주 같이 다닌다. 강우가 보기엔 이민찬과 손차희보다 더 이상한 관계였다.
“왜?”
약간은 귀찮음을 담아 강우가 대답했다.
“방송 녹화했다면서요?”
“응.”
“자주 나가면 공부에 방해 안 돼요? 시험 며칠 안 남았는데.”
“야! 오빠가 넌 줄 알아?”
유혜림이 바로 강우 편을 들었다.
“형도 공부해야 하잖아?”
“오빠는 공부 안 해도 만점이거든!”
“그건 수학이랑 물리고.”
“어느 과목이든 하면 만점이야. 화학경시 못 봤어?”
강우의 화학경시 최우수상은 교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었다.
강우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은찬아, 혜림아, 공부는 하고 싶을 때 열심히 하는 거야. 그래야 효율이 높거든.”
“에이,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게 바로 나야. 어제 방송국에서도 수학 문제 풀었다.”
“에이, 거짓말.”
하은찬이 바로 반박했고 유혜림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 티비 보면 나와. 난 거짓말 안 해. 그러니까 너희들도 공부하기 싫다고 하지 말고 엄청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공부해. 그럼 성적 오른다?”
실현하기 쉽지 않아도 거짓말은 아니다.
하은찬과 유혜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설 때였다.
“강우?”
맞은 편에서 신새벽이 다가왔다.
“어? 동네 누나다!”
“넌 아직도 동네 누나 타령이니?”
“선생님보다 그게 더 친한 느낌이잖아요?”
신새벽이 하은찬에게 눈총을 주고는 다시 강우에게 말했다.
“그래서 강우 넌 이번에도 화학 공부 안 할 거야?”
“네? 해야죠.”
“방금 안 한다며?”
“예?”
“공부는 하고 싶을 때 하는 거라며? 너 화학 공부하고 싶었던 적 있어?”
차마 화학을 하고 싶은 적이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신새벽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오늘부터 매일 화학 공부한 거 보고해. 아니면 혼날 줄 알아!”
“어? 그런 법이 어딨어요?”
“여기 있다!”
신새벽이 그를 쏘아보고는 사라졌다.
강우가 세상이 멸망한 표정으로 서 있자 하은찬이 위로했다.
“형, 동네 누나가…… 뭔가 형한테 쌓인 게 많은가 봐요.”
아무래도 차도도와 정답게 방송에 출연한 후폭풍인 것 같다.
* * *
남들이 기말고사를 대비하느라 정신없을 때 강우는 차도도와 함께 DD 파이터즈 구단을 방문했다.
방문하지 않으려 했으나 프로젝트를 1년간 연장하게 되어 어쩔 수 없었다. 목적은 도장 찍으러. 그 바람에 프로젝트 책임자인 차도도 또한 동행하게 됐다.
대신에 강우는 프로젝트 체결 관련 구단 관계자만 만나겠다고 요청했다.
도착한 구단 사무실에는 실무를 보는 구단 관계자와 1군의 김 감독과 육성 감독인 홍 감독, 세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다.
강우와 차도도가 도착하자 세 사람이 그들을 극진하게 대우했다.
“덕분에 1년간 우리 구단이 풍성하게 수확했습니다.”
“공정혁과 신재균 투수는 올해 커리어 하이 시즌을 만들었지요.”
“내년이 더 기대됩니다.”
“구종 하나를 더 추가했을 뿐인데…… 이런 결과가 발생할 줄은 몰랐습니다.”
두 감독과 실무자가 쉴새 없이 칭찬을 늘어놓았다.
시즌 중에 미치는 선수가 하나만 있어도 순위가 상승하는데 그런 선수가 둘이었으니 DD 파이터즈는 대박 시즌이었다.
사실 강우 입장에선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았기에 낯이 간지러웠다.
“그래서 전격적으로 일 년 더 프로젝트를 연장하고 싶습니다.”
1군 김 감독이 조심스럽게 의사를 타진해왔다.
가장 큰 이유를 강우도 안다. 그들이 프로젝트를 연장하지 않으면 다른 구단에서 바로 프로젝트를 계약하자고 달려들 테니까. DD 파이터즈로서는 유망주 유출보다 더 큰 리스크다.
1년 만에 갑을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강우는 실감했다. 나쁘지 않다.
“올해도 작년처럼 두 선수 정도 조언하면 되겠습니까?”
“더해주시면…….”
“제가 시간이 없어서요. 내년이 3학년이라 수능 준비를 해야 하고요.”
“아!”
이 나라에서는 고3이 왕이고 수능이라면 모든 이유가 성립한다.
“어쩔 수 없지요. 선수 둘이어도 감지덕지해야죠.”
올해도 선수 둘로 큰 이익을 봤었다. 김 감독이 수긍하자 강우는 실무자에게 물었다.
“프로젝트비는 작년 대비 2배면 어떻겠습니까?”
갑자기 실무자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강우가 타 구단을 언급하며 거액을 요구해도 모두 들어줘야 할 판이었으니까. 두 배면 정말 싸게 먹힌 셈이었다.
원래 강우는 작년과 같은 수준으로 연장하려 했다. 그런데 지난번에 어머니를 병실에서 본 이후 마음을 바꿨다. 그가 조금이라도 많이 벌어야 어머니가 편해지시니까. 어머니가 가게에서 고생하지 않으려면 이제는 그가 많이 벌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2배면 제 권한 이내입니다. 감사합니다!”
실무자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흡족해했다.
실무자가 내민 프로젝트 계약서를 살펴본 후 차도도가 바로 서명했다.
“혹시 찍어둔 선수가 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제가 선택하기보다 구단이 원하는 선수를 선정해서 구종을 손 보는 것이 더 효율적이니까요.”
“누구든 가능합니까?”
“과학은 만능이 아닙니다. 여러 가능성을 따져봐야죠. 일단 이미 다양한 구종을 익힌 선수보다는 구질이 단순한 선수가 더 낫습니다. 그리고 부상 중인 선수는 빼고요. 신구종을 익히다 부상이 더 악화할 가능성도 있거든요.”
공정혁은 변화구에 능한 선수였기에 지금 강우가 말하는 선수 기준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홍 감독은 그 이유를 묻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아 입을 꾹 닫았다.
김 감독과 홍 감독이 몇몇 선수를 입에 올리며 의견을 교환했다. 마침내 그들은 두 선수를 선택했다.
한 선수는 고교 졸업 당시 1라운드에서 지명한 유망주였으나 정작 프로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계약금을 많이 안긴 만큼 구단에서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노력했다. 구속은 빠르나 구종이 단조롭고 안정된 피칭을 하지 못했다.
다른 한 선수는 올해 필승조에서 이름을 날린 투수였다. 현재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는 중인데도 미래를 대비해서 구종을 하나 더 장착하고 싶다고 했다.
강우는 예전에 받았던 구단 자료에서 보았던 두 선수 프로필을 떠올렸다.
“그 두 선수로 하겠습니다. 두 선수에게 적합한 구종을 연구해보고 알려드리지요”
“어, 언제까지 가능할까요?”
“내년 시즌에 활용할 수 있도록 서두르겠습니다.”
강우의 대답에 구단 관계자들이 만족했다.
오래 걸릴 일은 아니어서 강우도 여유로웠다. 과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에 두 선수에게 새로운 무기를 장착하기는 어렵지 않다. 다만 그 무기에 얼마나 익숙해지고 어떻게 적응할지는 선수 본인에게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