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화 선배와의 대화 (1)
고려 과학고 A동 회의실에는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음 학기 반편성과 담임 선생님을 결정하는 회의다.
A동에는 3학년 강의실이 몰려 있고 이 회의실은 주로 3학년 선생님들이 이용한다. 3학년 교무실도 이곳에 있다.
김윤택은 선생님들의 면면을 살폈다.
작년에 3학년을 맡았던 선생님이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올해 처음 이 학교로 부임한 선생님 일부와 1, 2학년에서 올라온 선생님이다.
김윤택은 교사 경력이 오래인 데다 작년에 2학년 주임을 맡았기에 올해는 3학년 주임을 자진해서 맡았다.
지금은 휴식 시간.
유독 그의 시선은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어여쁜 선생님에게 머물렀다. 바로 차도도다.
“차 선생님, 정말 3학년을 맡으시겠습니까?”
“맡고 싶습니다.”
“보통 3학년을 피하지 않나요? 바쁘고 일은 많고 힘들고…….”
“오히려 보람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아직 경험이…….”
“누구나 처음 3학년을 맡는 시기가 있지 않습니까?”
차도도는 올해 4년 차의 선생님이다. 햇수만 보면 이제는 햇병아리 선생님이 아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학생에게는 인생이 걸린 문제이니까요.”
그녀가 3학년 담임을 제대로 못 할 거라고 넌지시 입에 올리는 순간 차도도의 강한 눈빛이 그에게 날아왔다.
김윤택은 찔끔 놀라면서도 다시 강조했다.
“아직 1학년이나 2학년에 자리가 있습니다. 또는 담임 말고 물리 부장 선생님을 하셔도 되고요.”
김윤택이 물리 부장을 양보하겠다는 통 큰 제안을 내놓았다. 3학년을 맡으면 자연스럽게 부장 직함을 내려놓아야 하니 호의처럼 그의 손해는 아니다.
“전 3학년 담임을 하겠습니다.”
차도도는 굽히지 않았다.
“끙!”
김윤택은 신음을 토하며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휴식 종료를 알리면서 김윤택은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마도환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 김윤택 선생님, 이번에 차도도 선생님도 3학년에 올라갑니까? 제가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김 선생님이 3학년을 담당하신다니 그럼 강우 군 담임을 맡으면 어떨까요? 최소한 차도도 선생님과 강우 군을 떨어트려 놓아주세요.
김윤택도 마도환이 이런 요구를 고집하는 이유를 모른다.
하지만 차도도와 강우를 떨어트려 놓고 싶었다. 강우의 담임으로 자신이 되면 그가 반사 이익을 얻어낼 수 있다. 아마도 강우는 성공적으로 대학에 진학할 것이고 그 영광은 당연히 담임에게 돌아온다.
부수적인 이익도 있다. 강우가 수행하는 핵융합 프로젝트 내용을 손쉽게 확보할 수 있다. 담임이 검토해보겠다는데 내놓지 않을 학생은 없으니까. 그것도 같은 전공이니 거부할 명분이 없다.
이래저래 김윤택은 마도환과 이익 방향이 일치했다. 그렇기에 오늘 최대 목표는 차도도와 강우를 떼놓는 것이다. 그런데 차도도가 3학년 담임을 맡겠다고 나서면서 처음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자! 휴식 끝났으면 회의를 계속하죠.”
김윤택이 7명의 선생님 앞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 8개 반이고 한 반 15명이다.
시드에 배정될 우수학생을 결정했다. 2학년 전체성적 1등인 손차희와 2등인 이민찬에 성적 순서대로 나머지 6명이다.
“먼저 선생님들께선 시드를 받은 학생부터 선택하시면 됩니다. 그럼 먼저…….”
김윤택은 작년의 사건을 떠올렸다.
첫 선택의 우선권은 학년 주임에게 있다. 작년에 그는 이민찬을 선택했었다. 정상이라면 올해도 그는 이민찬을 선택해야 한다. 이민찬은 그와 R&E에서 엮여 있으니까.
작년에 차도도는 시드에 없는 강우를 선택하는 도발을 자행했었다.
만일 그가 이민찬을 선택하면 차도도는 올해도 강우를 고를 것이다. 나머지 학생은 중요하지 않다. 차도도는 작년에 손차희를 신새벽에게 넘길 만큼 대범했으니까.
‘설마 올해도?’
내신 성적을 보면 강우는 작년이나 올해나 큰 차이가 없다. 수학과 물리를 잘한다는 점을 빼면 등수는 평범하다. 그런데 강우가 헌팅턴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그 가치는 대폭 상승했다.
그가 이민찬을 찍는 순간 벌어질 일이 선명히 예측됐다.
‘그대로 둘 수 없지.’
이민찬을 버리더라도 강우를 선택하는 게 전략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이 섰다.
마음을 굳힌 김윤택은 가벼운 기침으로 주변을 환기했다.
“자, 그럼 관례에 따라 학년 주임인 제가 먼저 선택하겠습니다.”
김윤택은 다른 선생님을 쭉 훑어봤다. 여전히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차도도가 보였다.
‘강우를 선택할 네 작전을 꿰뚫어 봤어. 내가 확실하게 깨주지.’
8명의 이름이 적힌 명단을 옆으로 밀치면서 김윤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전 강우 군을 선택하겠습니다.”
“네? 강우가 누굽니까? 명단에 없는데요?”
올해 처음으로 부임한 선생님이 물었다.
“꼭 시드를 배정받은 학생을 찍으란 법은 없지요. 그 외 학생을 선택하고 시드를 포기하면 되니까요.”
김윤택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차도도의 안색에 먹구름이 확 끼었다. 그럴수록 김윤택의 마음은 뿌듯해졌다.
‘드디어 차도도를 해치웠다! 햇병아리 교사가 아무리 설쳐봐야…….’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앉자 김윤택은 회의를 계속했다.
“그럼 다음 선택권을 가진 선생님께서…….”
그때 차도도가 벌떡 일어났다.
“주임 선생님, 강우 학생을 양보해주시면 어떨까요?”
“절대 안 됩니다.”
김윤택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차도도가 한동안 그를 노려봤으나 김윤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푹 쉰 차도도가 입을 열었다.
“30분만 휴회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커피라도 드시면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게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김윤택은 자비로운 미소를 띠며 허락했다. 개평마저 마다할 승자는 아니었다. 강우를 이미 자신의 손에 넣었으니까.
* * *
30분 후 회의가 속개됐다.
그동안 차도도는 회의실을 벗어났다가 돌아왔다.
모두 착석하자 김윤택이 다시 회의를 속개했다.
“시드 배정 학생 선택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강우 군으로 결정했고요, 다음 선생님은…….”
“잠깐만요!”
차도도는 또다시 회의에 제동을 걸었다.
김윤택의 불쾌한 표정이 돌아왔다.
“왜 그러시죠?”
“이것부터 확인해주시겠습니까?”
차도도가 종이 한 장을 넘겼다.
김윤택의 얼굴에서 웃음이 점점 사라졌다.
“이거 뭡니까?”
“누구 글씨체인지, 또 서명을 보면 아실 텐데요?”
“이, 이게 어떻게…….”
차도도가 미소를 지으며 종이에 적힌 내용을 또박또박 읽었다.
“교장 선생님 지시사항입니다. 강우, 손차희, 윤수아, 최대우 학생은 프로젝트 업무의 연속성을 위해 차도도 선생님의 반에 배치한다. 그렇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김윤택이 종이를 콱 구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말입니까? 이건 관례를 깨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없었어요! 당연히 첫 학생은 주임 선생님의 선택 아닙니까?”
일부는 김윤택의 주장에 동조했고 일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차도도는 김윤택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강우 군이 무려 2억 원이나 되는 프로젝트 금액을 학교발전기금으로 내놓은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이것 또한 유례가 없지 않았나요? 그만큼 교장 선생님도 관심이 깊은 사안입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명확하게 지시하셨습니다. 이 네 학생은 프로젝트 지도 선생님과 반드시 같은 반이어야 한다고요.”
으드득-
김윤택이 이빨을 꽉 깨물었다.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변수가 등장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그럼 확인해보시죠. 교장 선생님 친필 지시서도 믿지 못하시겠다면요.”
김윤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급히 회의실을 벗어나는 김윤택에게 차도도는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차가운 도시의 여자였다.
* * *
강우는 차도도, 고곽천재와 함께 대한핵융합센터를 방문했다.
대한핵융합센터는 대전시 대덕 연구단지에 있다. 국가 중요 연구시설이 밀집된 이곳에서 국가 지원으로 핵융합 에너지를 연구한다.
핵융합의 상용화를 목표로 멀고 먼 연구의 대장정을 수행하고 있다.
과학 연구에서 관련 장치와 기자재 견학은 매우 의미가 깊다. 비록 강우는 이론 연구에 치중하고 있어 상용화를 위해서는 실험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렇기에 강우는 헌팅턴사와 프로젝트를 체결할 때부터 실험실 견학을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고곽천재 친구들을 위해서였다.
미국에서 운영하는 핵융합연구소를 방문하거나 아니면 한국의 핵융합센터를 방문하거나. 한국의 대한핵융합센터도 세계적인 수준에 있기에 좋은 선택지였다.
다만 대한핵융합센터와 마도환 교수가 프로젝트로 연결되어 있어서 계속 미루던 중이었다.
마침 강우의 논문을 확인한 대한핵융합센터에서 방문 여부를 문의했고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방학인 데다 마도환을 견제한다고 대한핵융합센터의 방문마저 미루면 그들의 손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형 핵융합 원자로의 상용화를 목표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오십 대 후반의 연구원이 스크린에 홍보 자료를 띄워놓고 열심히 설명했다. 반쯤 벗어진 머리가 이 연구의 험난함을 보여주는 듯했다.
“박경묵 운영기술부장님, 감사합니다.”
차도도가 대표로 인사했다.
“뭘요, 여러분께 저희 장비를 소개하게 되어 기쁩니다. 그럼 장비를 구경하러 가실까요?”
박경묵이 앞장서고 그 뒤를 그들 일행이 뒤따라갔다.
강우는 고곽천재와 함께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복도를 지났다. 울릉도에서 급히 올라온 최대우마저 합류한 상태였다.
K-SUN이라고 적힌 로고 아래에 거대한 토카막 장치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강우가 보기에는 커다란 2층짜리 건물처럼 보였다. 금속으로 만든 배기 파이프가 둥글게 원을 그리며 장비의 본체를 형성했다. 얼핏 보기에는 그리 값비싸 보이지 않은 장치였다.
“이 원통 주변을 두른 터널에 자기장이 걸리면 고온의 수소 플라스마가 터널 내부를 고속으로 이동하며 회전합니다. 원자핵을 충돌시키는 입자가속기 원리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되지요. 현재는 고온의 수소 플라스마를 얼마나 오랫동안 가둬놓을 수 있는지에 연구를 집중하고 있습니다.”
작고 정교한 실험 장치는 아니어서 겉모습만으로도 구조를 손쉽게 이해했다.
플러스 전하를 띠는 두 수소 원자핵을 충돌시켜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려면 고온과 고압이 필수다. 고압은 기술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어 고온으로 방향을 잡았고 이 토카막 장치에서는 1억 K의 플라스마를 가두어 실험한다.
장치를 세세하게 설명한 박경묵이 그들에게 물었다.
“중요사항은 모두 말씀드렸습니다. 궁금하신 사항 있습니까?”
질문할 필요가 없는 강우와 달리 최대우와 윤수아가 여러 질문을 던졌다. 고등학생다운 질문이었다.
강우는 과학관에서 보았던, 시끄럽던 초등생과 중학생이 떠올라 절로 실소를 머금었다. 역시 과학자의 호기심은 나이와 무관하게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법이다.
호기심이 대충 해소되자 차도도가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박 부장님, 그런데 말이죠. 저희를 초청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강우도 방문 의사가 없지 않았으나 엄밀하게는 핵융합센터에서 먼저 그들을 불렀다.
“차 선생님께서 외국 저널에 내신 논문을 봤습니다. 같은 분야를 연구하니 당연히 만나 뵙고 싶었고요…….”
“단지 그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요?”
“서로 간에 교류하고 싶었습니다. 저희는 실험이고 차 선생님은 이론이니까…… 서로 잘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혹시…… 한국대 측의 의사가 반영된 건가요?”
박경묵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강우는 이 초청의 이면에 마도환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