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30화 (230/325)

제230화 선배와의 대화 (2)

“솔직히 말씀해주시지요.”

차도도가 안면을 굳힌 채 다시 물었다.

몇 번이고 머뭇거리던 박경묵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별다른 일은 아닙니다. 저희와 한국대 마도환 교수팀이 얼마 전에 프로젝트를 체결하지 않았습니까? 마침 저희에겐 예산이 남아있었고 마도환 교수는 핵융합 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이시니까요. 서로 협의하는 과정에서 국내에 전문가가 더 계시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마도환 교수님께서 적극적으로 교류해보라고 추천하시더군요.”

강우는 대충 감을 잡았다.

마도환이 그들의 연구 내용을 빼내려고 전방위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김윤택 팀이 여의치 않으니 외부로 손을 뻗쳤다. 차도도팀이 핵융합센터와 연구 정보를 주고받으면 자연스럽게 마도환에게 흘러가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강우는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쪽으로는 역시 마도환의 재주가 탁월하다.

강우와 차도도의 표정이 굳어지자 박경묵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저희 쪽에 위탁연구 예산이 남아있습니다. 오늘 모신 이유는 위탁연구 의향이 있으신지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2년간 총액 1억 원이고요. 알다시피 위탁연구로 작지 않은 규모입니다. 특히 고등학교라면…….”

위탁연구 프로젝트 제안이 왔다.

예전이라면 반갑게 손을 잡았을 것이다. 그래도 마도환의 입김이 뒤에서 작용했다면 그럴 수 없다.

강우의 심정을 눈치챈 차도도가 정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알다시피 저희는 이미 헌팅턴사와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같은 연구 내용으로 또 프로젝트를 맺으면 문제가 있다고 보거든요. 말씀은 고마우나 어려울 듯합니다.”

“마도환 팀도 헌팅턴사와 프로젝트를 하고 있으니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곳은 전혀 상관없다고 자신하던데요?”

“그 팀과 달리 저희는 어렵습니다.”

차도도가 완곡하게 사양했다.

박경묵도 바보가 아니어서 마도환과 어울리기 싫다는 의사를 짐작했다.

“아쉽네요. 어쩔 수 없지요. 언제라도 마음이 바뀌면 연락주십시오.”

“그럴 일은 없습니다.”

차도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실험 장비 구경을 마친 그들은 처음 떠났던 회의실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중간에 그들은 옆 회의실에서 대여섯 명의 연구원이 열띤 토론을 벌이는 장면을 목격했다. 회의실 유리 창문이 제법 커서 내부를 쉽게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은 스크린에 논문을 띄워놓고 수식을 가리키며 논쟁을 벌였다.

익숙한 수식과 논문에 강우의 발걸음이 저절로 멎었다.

차도도 또한 스크린의 논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와 차도도가 쓴,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실은 논문이었다.

두 사람이 관심을 보이자 박경문이 간략하게 설명했다.

“연구원들끼리 자체적으로 모여서 세미나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모두 열정적으로 연구에 매진하고 있지요.”

“잠시 들어가 봐도 될까요?”

강우의 부탁에 박경묵이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 토론 중인 연구원들에게 의사를 타진했다.

허락을 받은 후 안으로 들어간 고곽천재와 차도도는 연구원들의 얼떨떨한 눈빛에 사로잡혔다.

난데없이 고등학생 견학단이라니! 특히 선생님으로 보이는 놀라운 여인의 미모에 연구원들은 눈을 떼기 어려웠다.

강우는 스크린에 띄워진 논문의 수식을 쭉 훑어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이들이 어느 부분에서 논쟁을 벌이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난데없는 불청객에 발표하던 연구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 누구십니까? 지금 토론 중인 논문은 내용이 어려워서 고등학생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요?”

그렇다고 고등학생인 강우가 난데없이 개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차도도에게 눈짓하자 뜻을 알아챈 그녀가 전면에 나섰다.

“지금 상온핵융합의 표준 모델을 토론하시나 보네요?”

“그렇습니다만.”

“이 부분에서 막혔고요?”

차도도가 스크린의 한 부분을 정확히 짚자 연구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걸 어떻게…….”

“이 부분에서는 수식 풀이과정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중간과정을 모두 써보면…….”

차도도가 분필을 들고 수식을 쭉 풀어나갔다.

“잘 아시겠지만 이 항은…….”

설명까지 곁들이자 연구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너 줄의 수식을 나열한 후 차도도가 스크린의 아래쪽 수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마 이 부분도 혼란스럽죠?”

“그, 그걸 어떻게 아시는지…….”

“이 수식은 이렇게 풀면 더 명확해지죠. 논문 저자가 의도한 바를 나열해보면…….”

차도도가 다시 수식을 쭉 섰다.

논문에서 생략된 중간과정을 모두 짚어주자 연구원들이 놀람을 금치 못했다.

“오우! 대단합니다. 정말 누구시지요?”

차도도가 웃으며 대답했다.

“요즘 고등학교 선생님은 이 정도는 다 합니다. 고등학생도 마찬가지고요.”

“예?”

“이 논문 저자입니다. 차도도이고요. 이쪽은…….”

그녀가 강우를 가리켰다.

“논문 2저자인 강우 군입니다.”

연구원들이 재빨리 논문 첫 페이지를 확인했다. 이 논문의 저자가 바로 차도도와 강우였다.

“어, 어떻게 이런 우연이…….”

연구원들 모두가 눈이 동그래져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핵융합 실험장치를 견학하러 왔습니다. 지나가다 우연히 토론 장면을 봤고요.”

“혹시 뒷부분을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강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차도도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곧이어 차도도의 강의가 시작됐다.

불과 십여 분의 짧은 강의였으나 연구원들은 의문을 완벽하게 해결했다.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천재가 있었다니! 핵융합 연구의 장래가 밝습니다.”

“막혔던 부분이 완전히 뚫렸습니다. 영광입니다!”

연구원들이 차도도를 극찬했다. 오늘 그들은 세계적인 수준의 전문가에게서 만족스러운 설명을 듣는 행운을 얻었다.

강우는 차도도의 능력을 다시 평가했다. 물론 논문을 내면서 차도도도 같이 검토했으니 모르면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처럼 한눈에 다른 사람의 의문점을 파악하려면 단순히 논문을 이해하는 이상의 깨달음이 필요하다.

‘정말 연구자가 다 되었네.’

강우는 제자를 키운 듯한 흐뭇함을 느꼈다.

강우와 차도도가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연구원 한 명이 따라 나왔다.

“저, 차도도 선생님! 다음에 시간 되시면 센터에서 열리는 콘퍼런스에 참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차도도가 머뭇거리자 연구원이 더 강하게 부탁했다.

“부디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셨으면 합니다. 시간 나시면 꼭 부탁드립니다. 제가 콘퍼런스 일정과 초대장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연락처가…….”

차도도는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강우도 과학에 심취한, 과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도와주려 한다. 벽에 부딪힌 연구원을 보면 해결 실마리를 던져주고 싶어진다. 예전에 연구하면서 고생했던 기억 때문이다.

차도도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와 차도도는 과학을 대하는 자세에서 유사한 점이 정말 많다는 생각을 오늘도 하게 됐다.

* * *

2월 중순이 되자 어김없이 신입생들이 들어왔다.

올해도 강우와 최대우는 교장 선생님의 허락으로 신입생이 기숙사에 입사한 날부터는 기숙사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잠시 집에 내려갔던 강우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숙사로 들어갔다.

역시 자기 집이 최고다. 아니 자기 집이나 마찬가지인 기숙사가 최고다.

블로그와 씨름하는 최대우를 물끄러미 구경하다가 강우는 차도도에게 톡을 넣었다.

- 강우 : 쌤? 주무세요?

- 차도도 쌤 : 아니. 왜?

- 강우 : 앞으로 상담실로 출근하실 거죠?

- 차도도 쌤 : 그래야겠지?

- 강우 : 일찍 나오세요.

- 차도도 쌤 : 왜?

- 강우 : 심심하니까요.

- 차도도 쌤 : 그만 잠이나 자. 잠(이모티콘).

- 강우 : 함께 연구해야죠.

- 차도도 쌤 : 알았어. 잘 자렴.

강우도 자려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를 깨우는 전화벨이 울렸다. 신새벽이다.

- 강우야? 자니?

“아뇨.”

바쁜 일이 있나? 신새벽이 그에게 전화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웬만하면 톡으로 처리하지.

- 내일 시간 있어?

“데이트할 시간은 없는데요?”

- 이 자식이! 날 거부해? 지금까지 나를 거부한 남자는 없었다고!

“쌤? 그거 영화 대사 아니에요?”

- 그런가? 하여튼 시간 되냐고!

“무슨 일인데요?”

- 내일 신입생 대상으로 강연해줄래?

신새벽은 다음 학기 1학년을 맡았다. 그래서 예비입학 기간에도 담임으로서 책무를 다하고 있다.

“갑자기 왜요? 주제는요?”

- 연말 예능 후로 너랑 차 선생님이 스타잖아? 학생들이 너를 꼭 만나고 싶대.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고. 그래서 ‘선배와의 대화’……. 뭐 대충 그런 시간을 마련했어.

“누구누구 나가는데요? 설마 저 혼자는 아니죠?”

- 너랑, 손차희랑, 하은찬. 그중에 네가 주축이야.

하은찬이 선배란 사실을 지금에야 깨달았다. 그 어린 녀석이 벌써 2학년이 됐다. 그도 졸업 학년인 3학년이다. 1년이면 고등학교를 졸업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울적해졌다.

“그럴게요.”

혼자도 아니고 여러 명인데 무엇이든 못할까. 신선한 후배를 만나는 것도 즐거움이니까.

그런데 후배를 만나면 할 일이 떠올랐다.

- 고마워.

“쌤? 그런데 이번 신입생 중 입학식 날 장학금 받는 세 명은 누구예요?”

- 너도 은근히 공부 잘하는 애를 밝히지?

“어휴.”

신새벽이 세 학생의 이름을 알려줬다.

그는 선배와의 대화 시간에 그 세 학생의 잠재력을 확인해볼 예정이다.

* * *

강당에서 선배와의 대화 시간이 열렸다.

강우는 손차희, 하은찬과 함께 단상에 서서 학생들을 내려다보았다.

앞으로 이 나라의 과학을 짊어질 학생들을 만나는 기분은 항상 새롭고 흥분된다. 그들이 더 훌륭한 연구원으로 자랄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주고 싶다는 선배의 책임감도 느끼게 된다.

120여 명에 달하는 많은 학생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진짜 티비에 나온 그대로야. 멋지다!”

“미남이자 천재가 맞네.”

“모든 것을 다 갖춘 엄친아래.”

“금수저라 어릴 때부터 비싼 학원을 모두 섭렵했다는 소문도 있어.”

웅성대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 진실과 거짓이 사람들의 입맛대로 떠돌아다니니까.

강연이 아닌 대화이기에 강우를 비롯한 세 사람은 단상의 의자에 앉았다. 강우는 최고 인기남으로 학생들이 만나고 싶은 선배 일 순위였고 손차희는 2학년 전교 1등, 하은찬은 1학년 전교 1등 자격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다.

신새벽이 그들을 소개했다.

“신입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화학을 담당한 신새벽입니다. 오늘 선배와의 대화 시간을 열었어요. 작년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프로그램이에요. 보람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강우는 강의실이 아닌 단상에 선 신새벽을 처음 봤다. 외모가 무기란 말이 신새벽에게도 통한다.

“자! 오늘 세 선배를 모셨습니다. 3학년 강우, 손차희, 2학년 하은찬인데요, 아는 사람 있어요?”

“강우 선배요!”

역시 강우가 최고 인기인이었다.

“왜 유명하죠?”

“천재니까요!”

“잘 생겼으니까!”

“티비에 나왔었잖아요?”

이런저런 이유가 나왔다.

“자! 그럼 선배와의 대화를 시작합니다!”

신새벽의 선언에 강우가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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