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2화 선배와의 대화 (4)
그날 저녁 강우는 신새벽과 상담실에서 만났다. 신새벽의 논문을 검토하기 위해서다.
3학년을 맡은 차도도는 B동 상담실에는 오지 않았다. 그녀는 요즘 출근하면 A동 3학년 교무실에 있거나 아니면 물리 실험실에 있었다. 그 바람에 강우는 차도도와 만날 시간이 대폭 줄었다.
“쌤, 진짜 그러기 있어요?”
“왜?”
“오늘 선배와의 대화인지 뭔지 그것 때문에 고생했다니까요.”
“잘만 하던걸.”
신새벽은 후배들과 대화를 나누던 강우를 떠올렸다. 정말 강우의 머리에서 빛이 반짝이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그랬으니 신입생들은 오죽할까.
“아마 후배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야. 그들이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뿐만 아니라 과학자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에이, 앞으로는 그런 거 자꾸 떠넘기지 마세요.”
“내가 또 언제 떠넘겼다고?”
“작년 예비입학기간에도 넘겼잖아요.”
신새벽은 그제야 작년에 강우에게 수업 시간을 넘겼던 일을 떠올렸다.
“와아! 이 자식 뒤끝 작렬이다!”
“제가 원래 사람이 쪼잔하거든요? 자, 그럼 얼른 방학 숙제 꺼내 봐요.”
신새벽이 우물쭈물하더니 한숨을 푹푹 쉬었다.
뭔가 잘 안된다는 뜻이다. 신새벽이 혼자서 연구할 수 있었다면 그녀는 천재가 분명하다. 전 세계 유수의 연구자들이 해결하지 못했을 리도 없고.
신새벽이 펼친 부분을 확인했다.
작년 연말에 확인했던 지점에 비해 확실히 진도가 나가긴 했다. 그러다가 딱 막힐 만한 부분에서 막혔다. 역시 난관을 혼자서 돌파하기에는 무리였나보다.
최근에 강우는 대한핵융합센터에 다녀오느라 바빴고 그 이후는 예비입학기간이라 신새벽이 정신없었다. 그렇다 보니 둘이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논문을 파고들 기회가 없었다.
강우가 미간을 찌푸리자 신새벽이 찔끔해서 몸을 움츠렸다. 이럴 때는 활달한 선생님이 아닌 주눅 든 학생처럼 보인다.
“음, 이 부분은 말이죠…….”
화이트보드에 강우는 마카로 수소 원자 두 개를 그리고 중간에 뮤온 입자의 움직임을 표시했다.
“공유결합 아시죠?”
화학의 기본이다. 당연히 신새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를 들면 질소 원자 두 개가 결합하여 질소 분자를 형성하잖아요? 이때 두 원자핵은 전자를 공유하죠. 원자핵융합 반응에서 두 개의 양성자는 척력 때문에 근접할 수 없어요. 이때 뮤온이 투입되면 공유결합처럼 두 원자핵 사이를 떠돌게 되고요, 척력을 완화해주는 역할을 뮤온이 담당해요. 이때 뮤온의 거동을 나타내는 확률밀도함수는…….”
화이트 보드에 원자핵의 결합 원리를 그리고 복잡한 수식을 나열했다.
신새벽이 작성하는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우는 긴 시간 동안 풀이를 나열하고 설명했다.
신새벽은 수차례 감탄사만 연발했다.
그녀가 방학 내내 고민하던 부분이 말끔하게 해소됐다. 그 부분을 훑어보고 단숨에 해결책을 찾아내는 강우는 확실히 천재였다.
그녀는 강우의 설명을 들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수식이 아닌 강우에게 정신이 팔렸다.
낮에 강당에서 느꼈던, 강우의 머리에서 빛나던 후광이 지금 또 강우에게서 발산되고 있었다.
‘아!’
신새벽은 내심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강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예전에도 이런 강우에게 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더 심하다. 지금 이 순간만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강우가 가장 멋진 사람이다.
신새벽은 강우와 함께 연구한 일 년을 돌이켜보았다.
논문 주제를 결정하고 연구를 수행하면서 강우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꾸준히 받았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녀가 강우에게서 받은 가장 큰 도움은 논문 연구가 아니었다.
연구를 수행하려는 의지와 호기심, 나아가 학문의 재미를 강우가 붙잡아 주었다.
강우가 없었어도 그녀는 아마 논문을 썼을 것이다. 그럭저럭 졸업 요건이 갖추어지는 논문을 마지 못해 쓰긴 했을 것이다.
그런데 강우와 함께하면서부터는 논문 결과가 중요하지 않게 됐다. 이전보다 연구하는 과정이, 연구하는 재미가 훨씬 중요해졌다.
새로움을 탐구하는 작업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 처음 알았다.
‘차도도도 비슷하게 느꼈겠지. 그래서 강우에게서 못 헤어나오는 거고.’
열심히 설명하는 강우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강우와 앞으로 일 년을 함께할 차도도가 샘이 났다. 3년간 한 번도 강우의 담임이 되지 못한 자신이 아쉬웠다.
“이해돼요?”
“으…… 응.”
신새벽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화이트 보드에 적힌 수식을 노트에 필기했다.
아마 이것이면 막힌 논문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강우는 설명을 마치고 필기 중인 신새벽을 조용히 내려봤다.
비록 신새벽이 방학 때까지 끝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도 고군분투했음을 안다. 그렇기에 차마 야단치기도 어렵다. 막혔던 부분이 어쩌면 신새벽의 능력을 벗어나는 문제였을 수도 있으니까.
“국내 학술지에서는 아직 연락 없죠?”
“아직.”
“그럼 이 부분을 보완해서 국외 저널에도 보내세요. 그래야 여름에 졸업하죠.”
“내 논문이 국제 저널에 가능할까? 그렇게 할게.”
지은 죄가 있기에 신새벽이 순순히 말을 들었다.
“당연하죠.”
대학원생 시절에는 자신의 논문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학위를 받고 다양한 연구에 매진하다 보면 시야가 넓어져서 연구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
아직 신새벽은 배우는 대학원생이기에 연구의 큰 흐름을 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자신이 쓴 논문이 국제 저널에 실릴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강우도 오래전 대학원생 시절에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지금의 그는 논문의 가치를 알아볼 능력이 있다.
그가 관여한 논문이 국제 저널에 수록될 가치가 부족할 일은 없다. 이 논문으로 그녀는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으로 넘어갈 기반을 마련할 것이다.
자연과학 연구에서는 훌륭한 연구 동반자가 많을수록 유리하다. 그렇기에 그는 차도도와 신새벽에게 공을 들이고 있다. 당연히 그들에게 그만한 자질이 있고 서로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 * *
2월의 마지막 날에 강우는 차도도의 집에 초대받았다.
방학 기간에 자주 머물던 곳이었으나 신입생 예비입학기간 동안 기숙사에 있었기에 최근 들어서는 오랜만이었다.
초대받은 이유는 단순했다.
바로 그의 생일 축하파티다.
새삼스럽게 생일을 챙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강우는 극구 사양했으나 차도도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아파트까지 왔다.
‘고곽천재처럼 조각 케이크 놓고 노래만 불러도 되는데…….’
낮에 학교에서 고곽천재가 모여서 간단하게 파티를 열었다. 물론 평소 다른 멤버의 생일 때와 똑같았다. 그런 간편한 방식이 강우는 훨씬 마음에 들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는 대신에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차도도와 신새벽이 그를 맞이했다.
“어? 신 쌤도 계셨어요?”
“왜? 내가 있어서 불만이야?”
“그럴 리가요.”
집 안으로 들어서자 맛있는 냄새가 났다. 신새벽이 요리 솜씨를 발휘하는 모양이다. 차도도 혼자서 이렇게 요리하고 있으면 어쩌면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생일 안 챙겨도 되는데…….”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본 강우의 첫마디였다.
“그래도 우리 교수님인데.”
이럴 때는 교수님이라고 두 선생님이 모두 극진히 모신다.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다했어. 곧 먹을 거야.”
차도도가 앞치마를 풀면서 말했다.
오늘따라 그녀도 제법 요리사티가 난다.
오늘의 요리는 소고기 스테이크다. 값비싼 경양식 집에서 먹을 수 있는 요리가 풍성하게 차려져 있다. 당연히 신새벽이 재주를 부린 결과다.
강우는 포크를 들며 감사를 표했다.
“신 쌤, 고맙습니다.”
흐뭇한 표정으로 웃는 신새벽과 달리 차도도는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넌 나한테는 고맙다고 안 해?”
“쌤은 요리 안 하시잖아요?”
“오늘은 나도 많이 했거든?”
“안 봐도 알아요. 신 쌤이 시키는 것만 했겠지.”
“너, 앞으로 내가 해주는 요리 먹지 마.”
“쌤 요리가 있어야 먹죠.”
버릇없이 너무 놀렸나? 차도도의 안색이 유난히 어두워졌다.
급히 사과하고 강우는 맛있게 스테이크를 잘랐다. 오오! 적당한 육즙! 역시 고기가 최고다.
식사하면서 와인잔을 부딪히며 자축했다.
스테이크에는 와인이라는데 강우 앞에는 콜라만 놓여있었다. 와인을 달라고 몇 번 때 쓰다가 오히려 신새벽에게 꿀밤만 맞았다. 이럴 때면 아직 미성년자임을 다시 실감한다.
“쌤? 저 조만간 운전면허 신청할 거예요.”
운전면허는 만 18세 이후다. 이제 강우도 자격 요건이 된다.
“갑자기 면허는 왜?”
“두 분이 운전을 너무 못해서 그렇죠. 아무래도 오래 살려면 제가 운전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신새벽이 발끈했다.
“야! 운전 쉽지 않거든? 넌 운전을 카트라이트 게임이랑 착각하나 본데…….”
“아무리 못해도 쌤보다는 잘할 자신 있거든요?”
강우는 손강우 시절 베테랑 운전사였다. 아직도 운전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설명할 재간은 없다.
신새벽이 피식 웃으며 놀렸다.
“강우 넌 필기시험부터 떨어질 거야. 그거 머리 좋은 녀석이 괜히 깔보며 공부 안 하다가 몇 번 떨어지고 나서야 ‘아! 이것도 시험이었네!’ 그러면서 후회하거든?”
그녀의 말에 차도도가 박장대소했다.
“게다가 너 운동도 못 하잖아? 운전은 순발력이 필요하거든? 넌 실기 시험 한 열 번쯤 떨어지고 나서야 ‘아! 운전이 올림픽 금메달보다 어렵구나!’ 하면서 후회할 거야.”
“전 한 번에 붙을 자신 있거든요? 붙은 다음 날 고속도로에서 팍팍 몰 자신도 있고요.”
“네가 진짜 운전 잘하면 내 손에 장을…… 아니 원하는 거 다 들어준다.”
신새벽이 자신 있게 장담했다.
너무 자신만만해서 강우의 궁금증이 폭발했다.
“쌤은 시험 몇 번 만에 붙었는데요?”
“나? 세 번. 이것도 엄청 잘한 거야.”
강우의 시선이 차도도에게 돌아갔다.
“난 한 번.”
“너희 쌤은 뒷문으로 합격해서 그래.”
요즘은 운전학원에서 직접 시험 보기에 단번에 합격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어쨌든 강우에게 운전면허 취득은 누워서 떡 먹기다. 오히려 너무 빨리 몰아서 속도위반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어서 문제지.
“약속하신 거죠? 제가 단번에 붙으면 원하는 거 들어주기로?”
“아니지, 단번에 붙고 거기에다 운전마저 능숙하게 하면.”
“그 정도야 껌이죠.”
“껌인지 아닌지 금방 알게 될 거야.”
“약속한 거죠?”
“운전은 게임이 아니거든? 카트 게임에서 점수 높다고 실전에서도 그럴 것 같아? 실전에서는 운전대를 잡으면 온몸이 벌벌 떨린다고. 간도 콩알만 해지고.”
“에이, 제가 쌤인 줄 아세요? 저한테는 실전이나 게임이나 똑같다고요.”
두 사람의 티격태격에 차도도가 한숨을 내쉬었다. 돌이켜봐도 강우가 자동차 게임에 몰두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아무리 봐도 허세인 게 분명한데 강우가 우기니까 진실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 불과 이 년 만에 강우를 완전히 믿게 됐다.
차도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 관계가 역전된 것 같다. 물론 그녀도 남이 보면 마찬가지려나.
“쌤은?”
강우의 눈이 차도도를 향했다.
“난 그때 가서. 물론 네가 잘한다면야…….”
장담한 대로 강우는 3월 초에 운전면허 시험을 봤고 필기시험과 실기 시험을 모두 한 번에 붙었다. 당연히 신새벽은 그런 약속을 한 적 없다며 모른 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