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4화 3학년 (2)
“하겠습니다.”
강우의 선언에 차도도와 백두섭이 놀랐다. 두 사람은 강우의 성격으로 보아 당연히 거절하리라고 예상했었다.
얼떨떨한 표정의 차도도에게 강우는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했다.
“선생님께는 죄송합니다만 같이 출연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 그래.”
차도도가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이유를 정확히 몰라도 강우는 그녀가 방송 출연을 싫어한다는 정도는 눈치챘다.
만일 그녀에게 연예인 기질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예능 출연으로 얻은 인기도로 연예계 진출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만났던 치과의사 은유나처럼 반쯤 연예인에 발을 걸쳤을지도. 모르긴 해도 지금까지 그녀에게 여러 건의 연예인 섭외가 있었을 것이다.
차도도가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백두섭을 쳐다봤다.
마지못해 백두섭이 표정을 갈무리했다.
“알았어. 강우 군이 원한다면 허락하겠네.”
지금까지 강우가 빛낸 고려 과학고의 명예를 고려하면 명분은 충분했다.
강우는 두 사람의 염려를 짐작했기에 추가로 덧붙였다.
“다만 광고 제안 업체에 요구사항이 있습니다.”
“뭐지?”
“모든 광고는 이미지 광고였으면 합니다. 용어가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일반적인 광고가 아닌 뭐랄까, 상품 선전보다 그 브랜드나 모델의 이미지를 앞세우는 광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 독도 사진을 배경으로 깔아두고 ‘우리는 독도 수호를 응원합니다’라고 아래에 작게 광고성 문구를 첨가하는 그런 방식 말입니다.”
이미지 광고라면 강우나 차도도의 이미지 소모를 최소한으로 막을 수 있다. 특히 강우는 차도도의 이미지 훼손을 우려했다.
“그게 가능할까?”
“싫다면 안 하면 되니까요.”
강우의 내심이 전해진 걸까.
차도도와 백두섭이 찬성했다.
“그런 식이라면 전혀 문제가 없겠어. 나도 흔쾌히 수락할 수 있네.”
백두섭이 찬성하며 만족을 표시했다.
“그럼 그렇게 업체와 조율해보겠습니다.”
차도도의 보고를 끝으로 회의가 끝났다.
* * *
서울 외곽의 한가한 커피숍에서 마도환은 심부름센터의 황 사장을 만났다.
겉으로 보기에 험악한 인상에 체격 좋은 이 남자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마도환도 잘 알았다.
전직 운동선수였다는 설도 있고 전직 형사 출신이라는 설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일 처리 솜씨가 뛰어나고 뒤끝이 깨끗해서 소개받은 후로 자잘한 일을 맡겨왔다.
물론 그 가운데 가장 큰 일은 손강우 처리였다.
“마 교수님, 멀리까지 걸음 하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다부진 각진 얼굴의 황 사장이 마도환에게 미소를 지었다.
마도환은 저 웃음이 얼마나 가식적인지 안다. 이자와 어울리지 않는 게 상책임을 잘 알고 있어도 인생을 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그래도 자네가 오는 것보다 내가 멀리 가는 게 더 나아. 그래, 의뢰한 건은 어떻게 되었나?”
황 사장이 서류 봉투를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서류 봉투가 탁자에 놓였다.
마도환도 주머니에서 현금이 든 흰 봉투 뭉치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여기 있네.”
“고맙습니다. 마 교수님은 거래를 깔끔하게 마무리 지으시는 최고의 VIP 손님이십니다.”
황 사장의 칭찬을 뒷전으로 흘리면서 마도환은 서류 봉투를 열었다.
서류 첫 장에 강우의 신상 이력서가 나왔다.
학교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강우의 큼지막한 사진이 붙어 있고 그 아래에 상세한 프로필이 나열되어 있었다.
- 이름 : 강우.
- 나이 : 현재 만 18세 (3월 1일 기준).
- 생년월일 : XX년 2월 28일.
- 키 : 181cm.
- 몸무게 : 63kg.
- 출신 학교 : XX중학교 졸업 후 현재 고려 과학고 3학년 3반 재학 중.
- 가정사 :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에서 자랐으며…….
마도환은 강우의 이력을 쭉 훑어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관심 가질 필요가 있을지 의문일 정도였다.
이런 배경을 조사하려고 그 많은 돈을 들였다니. 내심 욕이 나왔으나 마도환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고 꿋꿋하게 내용을 확인했다.
강우의 가정환경, 교우관계를 비롯하여 중학교 시절과 고등학교 시절이 비교적 상세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제법 열심히 일한 흔적이 엿보였다.
‘특별한 사람이 차도도라 했던가…….’
차도도 때문에 의뢰비가 두 배나 더 상승한 사실을 떠올렸다.
기대감을 품고 몇 장 더 넘기자 차도도의 사진이 나왔다. 직접 찍은 것인지 아니면 어디에서 구했는지 모를 그녀의 얼굴과 전신사진 두 장이다.
- 이름 : 차도도.
- 나이 : 현재 만 27세 (3월 1일 기준).
- 생년월일 : XX년 5월 5일.
- 키 : 172cm.
- 몸무게 : 48kg.
- 출신 학교 : XX 고등학교, 한국대 물리교육과 졸업. 현재 고려 과학고 3학년 3반 담임.
- 가정사 : 차성그룹 회장 차준범의 둘째. 위로 오빠 한 명이 있음. 어려서부터 남다른 미모와 똑똑함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마도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차성그룹?”
“흐흐! 그 때문에 조사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워낙 꼭꼭 숨겨 놓았어야죠. 그래서 비용이 추가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큰돈을 지불한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겁니다.”
황 사장이 자신 있는 웃음을 터트렸다.
마도환도 안다. 차성그룹이라면 국내 10대 그룹에 드는 재벌이다. 국내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5대 그룹을 제외하면 그다음 순위쯤 되는 유명한 그룹이다. 대외적으로 조용하고 물의를 일으키지 않아 안정된 성장을 구가하는 그룹이기도 하다.
“거기에 보시면 최근에 차성그룹 회장이 딸의 신랑감을 알아보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돈값을 하지 않습니까?”
마도환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본 황 사장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마도환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차도도의 미모가 빼어나 눈독을 들인 건 사실이다. 그녀가 똑똑하고 마침 그의 연구에 도움을 주는 존재여서 욕심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갑자기 닭이 봉황으로 변신했다. 차성그룹의 딸이라면 오히려 넘친다. 비록 그의 가문이 장관 출신의 권력자 집안이라 해도 차성그룹과 혼사를 맺을 수준은 아니다.
문득 아버지 마국성의 당부가 머리를 채웠다.
- 넌 반드시 재벌가의 딸과 결혼하거라. 우리는 권력 줄은 잡고 있으니 이젠 돈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차도도는 정확하게 그 조건에 일치하는 신붓감이었다.
“더 원하시는 게 없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필요할 때 또 불러주십시오.”
황 사장이 일어나서 깊이 허리를 굽히고는 커피숍을 떠났다.
홀로 남은 마도환은 의욕을 불태웠다.
“재벌 딸이 일개 고등학교에서 선생질이나 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그 사연은 궁금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녀와 결혼하면 그의 인생은 황금길을 걷게 된다.
장관 출신 아버지와 그룹 회장인 장인. 한국대 교수인 자신과 미모의 부인. 인생의 모든 퍼즐이 맞추어진다.
“허! 차도도를 통해 연구 내용을 알아내는 게 아니라 차도도 본인을 취해야 하는 문제로 바뀌었군.”
그 원대한 꿈을 위해 일단 차도도와 인연을 계속 유지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상황은 나쁘지 않다. 남자친구는 없다니까. 사생활도 깨끗하고. 공략하기 어려운 대상은 아니다.
마도환은 식은 커피를 마시며 차도도 파일을 세세하게 훑어 내려갔다.
* * *
다행히 두 회사와 광고 모델 계약이 이루어졌다.
강우와 차도도의 동반 출연이었고 광고 내용도 강우의 의사를 반영하여 기획했다. 기업에서도 상품 선전보다 회사 브랜드를 높이는 방향으로 목표를 잡았다.
- 대한민국이 낳은 세계적인 천재.
- 그 천재를 기른 학교 선생님.
- 그들의 삶과 연구 활동.
- 그 천재를 후원하는 기업.
- 과학으로 인류의 삶을 바꾸는 그날을 바라는 기업.
대략 이런 컨셉으로 촬영이 이루어졌다.
강우는 학교 교정을 사색하며 걷고 강의실 화이트 보드에 수식을 풀며 고민하는 장면을 찍었다.
차도도는 강우의 앞에서 수업하며, 고민하는 강우를 옆에서 따뜻한 표정으로 격려하는 모습을 찍었다.
모두 강우가 의도한 이미지 그대로였다.
비록 두 사람은 연기가 어색해서 수십 번 촬영을 반복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으나 함께 어울리며 촬영하는 그 시간이 강우는 무척 즐거웠다. 차도도도 같은 심정이었으리라고 믿었다.
완성된 광고는 금방 방송을 탔다.
신천재 출판사의 참고서 광고는 밝은 톤으로 학교 교정을 배경으로 새로 촬영한 장면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고 강우와 차도도가 예능에서 퀴즈를 풀던 장면도 추가했다.
뉴닥터제약의 아이들 건강식품 광고는 어둡고 진중한 분위기로 연출했다. 그래픽으로 그려진 태양과 양성자의 핵융합 과정, 그리고 그 원리를 탐구하는 강우의 고뇌하는 모습이 등장했다.
거기에 예능에서 신들린 듯 수식을 풀어내던 강우와 차도도의 방송분이 들어갔다.
강우가 이 나라의 미래를 짊어진 천재라는 점을 정확하게 어필하면서 건강식품 회사의 이미지를 띄웠다.
두 광고 모두 대호평을 받았다.
강우와 차도도의 인지도도 덩달아 올라갔다. 이제는 두 사람의 이름을 몰라도 천재라거나 또는 그 광고에 나온 사람으로 기억할 정도가 됐다.
예상보다 광고의 효과는 놀라웠다.
적어도 고려 과학고 내에서 강우를 모르는 학생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국의 과학영재고에서 차도도를 모르는 학생도 존재하지 않았다.
* * *
한국의 고3이면 반드시 거치는 관문이 있다.
바로 3월 모의고사다.
수능과 연관된 가장 중요한 모의고사는 평가원에서 실시하는 6월과 9월 시험이어도 교육청에서 실시하는 3월 시험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로 자신의 실력을 전국 단위로 제대로 확인하는 첫 평가이기 때문이다. 이 시험을 계기로 자신이 수능 체질인지 내신 체질인지 알게 된다.
과학고 학생도 다르지 않다. 다만 일반고에 비하면 내신 성적보다 수능 성적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오는 점만 다를 뿐.
모의고사가 시행된 날, 평소와 달리 고려 과학고의 분위기도 무거웠다.
첫 모의고사를 치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학생들은 자습시간을 기다리며 교정 곳곳에서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어이, 씨스더! 시험 잘 쳤어?”
“그럭저럭. 넌?”
“나도 그럭저럭.”
고현성이 손차희를 붙잡고 하소연을 시작했다.
고현성은 3학년 때 원하던 바를 달성했다. 바로 손차희와 같은 반이 됐다. 덕분에 그는 강우와도 자주 얼굴을 보게 됐다.
“잘 쳤으면 됐지, 무슨 고민을 해?”
손차희가 눈총을 주자 고현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지금 모의고사 등급표 올라온 것 보니까…….”
손차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폰에서 등급표를 확인했다. 과목별 1등급 등급 컷이 보였다. 작년까지는 무심코 넘기던 일이 올해는 관심사로 바뀌었다.
이변은 없었다. 고려 과학고 내신 1위인 손차희는 당연히 전 과목 1등급이었다.
“등급 컷이 예상대로인데? 국어가 예상보다 컷이 조금 높아졌나? 너도 마찬가지 아냐?”
“나도 모두 1등급.”
“그럼 됐지. 잘 쳤잖아?”
고현성이 비록 강우 앞에서 기를 펴지 못해도 반에서는 상위권의 실력자다. 과학고에서 이 성적이면 일반고에선 전교권이다.
“1등급이어서 문제라고.”
“어?”
손차희는 고현성의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고현성이 조심스럽게 투덜댔다.
“전 과목 1등급이면 의대를 노려볼 수 있어서.”
그렇긴 하다. 내신으로 의대 입학은 어려울지라도 수능으로 의대 진학은 어렵지 않다.
“의대 안 간다고 서약했잖아?”
손차희의 눈이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