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5화 3학년 (3)
과학영재고생은 입학 때 의대에 진학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그 결과 수시전형으로 의대에 진학하려면 학교에서 추천서를 써주지 않는다. 오로지 실력으로 수능 정시를 뚫어야 한다.
“게다가 넌 과학을 좋아하고…… 의대 갈 이유가 없지 않아?”
손차희가 보는 고현성은 과학자 체질이다.
이 녀석이 그녀를 졸졸 따라다녀 신경 쓰이긴 해도 공부를 따지면 꽤 잘하는 녀석이다. 게다가 이공계 머리도 있고, 과학을 좋아하기도 하고, 전형적인 과학고생이다.
그런 녀석이 갑자기 의대를 꺼내니 조금은 충격이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막상 눈앞에 닥치니까 의대 갈 이유가 생기더라.”
사회 통념상 좋은 진로는 당연히 이유가 있다. 의대에 진학하면 미래가 안정되고 보장된다. 반면 이공계는 미래가 불안정하고 평균적인 보상이 훨씬 아래다. 그렇다 보니 능력이 되면 자연스럽게 의대로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국가의 미래 어쩌고는 개인의 미래 앞에서는 무의미할 뿐이다.
“과학고생이라면 누구나 하는 고민이야. 너만 그런 것도 아니니까.”
손차희가 단순한 결론을 내리고 떠나려 하자 고현성이 다시 붙잡았다.
“그게…… 넌 유학으로 진로를 잡아서 고민하지 않을지 몰라도 난 좀 달라. 내가 과연 과학에 소질이 있는 걸까? 난 입학한 직후부터 고민하기 시작했어.”
심각한 이야기에 손차희가 가던 발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왜?”
“강우 때문에. 강우를 옆에서 보니까…… 수학 과학 천재는 저런 학생이야, 난 천재가 아니었어, 난 유명 과학자가 될 수 없어, 차라리 안정적인 의대 진학이 더 나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
순간 손차희는 동병상련을 느꼈다.
그녀도 1학년 때 강우를 보면서 같은 고민을 했다. 이겨보려고 애를 써도 잡을 수 없는 경쟁자. 그런 경쟁자 앞에서 초라해지는 자신. 나날이 늘어가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심. 그런 자신감 상실이 생활에 영향을 미치면서 괴롭혔다.
강우를 경쟁자가 아닌 동료로 받아들였을 때 그녀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그녀가 자리를 안정적으로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강우의 바운더리 안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고곽천재라는 울타리 내부에. 반면 고현성은 그런 행운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강우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좌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공계로 진출했을 때 강우와 같은 괴물이 수없이 많다고 생각하면 숨이 턱턱 막힌다.
손차희는 고민하는 고현성에게 어떤 말을 할지 한참 고민에 잠겼다.
이윽고 그녀가 꺼낸 말은…….
“넌 의대에서는 잘하리라 생각해?”
“의사야 다 똑같잖아? 사회적 지위도 비슷하고 연봉도 비슷하고, 특별히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반면 이공계는 연봉이 천차만별이고 천장도 없고 바닥도 없어.”
“그건 단편적인 시각이지. 의사도 다 달라. 명의가 있고 돌팔이도 있지. 연봉도 외부에서 볼 때보다 차이가 훨씬 크고.”
“그런가?”
“넌 머릿속에서 이공계를 똑같은 분야라 착각하고 일렬로 줄을 쭉 세워. 하지만 의사는 모두 다른 병원이라 옆으로 평등하게 줄을 세우지. 현실에서는 이공계는 전자, 기계, 물리, 화학 등 분야가 천차만별이고 직업이 다양해서 굳이 줄을 서서 경쟁할 필요가 없거든? 반면 의대는 이공계보다 오히려 순위를 매겨. 같은 내과 의사라도 나중에 종합병원에 남느냐 동네 병원에 남느냐는 차이가 생기지.”
고현성은 갑자기 혼란에 빠졌다.
그때 강우가 등장했다.
두 사람을 쓱 보고 지나치는 강우를 손차희가 붙잡았다.
“강우야, 오늘 시험 어떻게 봤어?”
“눈으로 봤지. 코로 보냐?”
“몇 등급 나왔는데?”
“그게 뭐야? 벌써 어떻게 알아?”
손차희가 볼 때 강우는 모의고사 성적에 너무 무신경했다.
다시 휴대폰을 꺼내고 강우에게 등급 컷을 보여줬다.
“얼른 불어!”
휴대폰을 쳐다보는 강우의 안색이 점점 심각해진다.
“왜? 몇 등급이야?”
“국어 2등급.”
순간 고현성의 눈빛이 반짝였다.
“수학 1등급, 영어 3등급, 물리 1등급, 화학 3등급.”
일반고에선 대단할지 모르나 적어도 고려 과학고에서는 평범한 성적이다.
“잘 쳤네.”
“그렇지? 크크크.”
한바탕 웃으며 강우가 도서관으로 이동했다.
손차희가 고현성에게 다시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내 인생에 빛이 내리기 시작했어!”
갑자기 용기백배한 고현성이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강우를 쫓아갔다.
“어이 브라더! 우리 떡볶이 내기해야지!”
손차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강우가 모의고사를 얼마나 대충 치는지 안다. 하다못해 내신시험마저 대충 치는 녀석이니까. 그런 녀석이 모의고사 성적을 신경 쓸 리 없다. 수능도 치지 않을 녀석이니.
“어쨌든 현성이가 용기를 잃지 말았으면 좋겠어.”
손차희는 뿌듯한 마음으로 멀어지는 두 녀석을 눈에 담았다.
* * *
3학년의 수요일은 한가하다.
1, 2학년 때 힘들었던 R&E 시간도 요령이 생긴 3학년에겐 자습시간과 차이가 없다. 절반 이상의 학생은 수요일 R&E를 수능 공부 시간으로 활용했고 일부는 R&E 본연의 연구에 매진하여 과학자의 꿈을 불태웠다.
고곽천재는 세미나실에 모여 각자 담당한 프로젝트 연구를 수행했다.
정작 이날 강우는 다른 문제에 부딪혔다.
그는 학교 주차장에서 신새벽과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대에 가야 한다고요?”
“그렇다니까. 지도교수가 너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
“가기 싫은데…….”
“그래도 나를 위해서 딱 한 번만 가보자, 응?”
신새벽이 열심히 강우를 달랬다.
신새벽의 지도교수는 한국대 화학교육과의 정원재 교수. 환갑이 넘은 원로교수다. 정년 퇴임이 얼마 남지 않아 연구 전성기를 지난 인물이다.
그런 교수 밑에서 논문을 쓰다 보니 화학과 노창열 교수의 도움을 받게 됐다.
지난겨울에 강우의 지시에 따라 신새벽은 국내 학회지와 외국 저널에 각각 논문을 제출했다. 노창열의 허락을 받지 않은 행동이었기에 지도교수에게 문책을 당했고 그 과정에서 강우의 존재를 털어놓았다.
다행히 정원재는 마음이 열린 사람이었다. 그는 강우의 재능에 놀랐고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논문을 실은 강우의 실적에 찬사를 보냈다.
그 결과 오늘 강우를 데려오라는 통보를 내렸다.
강우는 굳이 신새벽의 지도교수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신새벽의 졸업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을 예상할 수 있었기에 외면할 처지도 아니었다.
“강우야? 오늘은 꼭 내 부탁 들어주라. 차 선생님에겐 이미 허락 다 받았거든?”
“에이, 그게 맨입으로 돼요?”
“우와, 이 녀석이 공짜가 없네!”
강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쏘아봤다. 신새벽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야! 제자가 스승한테 그런 것도 못 해주니?”
“그럴 때만 스승 제자 따지죠?”
이렇게 투덜대면서도 강우의 본심은 이미 한국대를 향해 있었다. 신새벽의 지도교수와 그녀의 대학원 동료들을 보고 싶다. 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가지는 당연한 호기심이다.
물론 곧바로 수락하는 것보다 신새벽을 놀려 먹는 재미가 있어 마지못해 수락하는 척하지만.
강우는 피식 웃다가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알았어요. 차 키 줘요.”
“어? 네가 몰고 가게?”
“저, 운전면허 땄거든요?”
“아, 그랬었지. 그래도…….”
“지난달에 약속했죠? 제가 운전 잘하면 뭐든 다 해준다고. 오늘 한국대까지 제 실력을 보여드리죠.”
“아, 불안한데…….”
무심코 중얼거리던 신새벽이 눈총을 주는 강우를 보고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몇 년 만일까. 운전석에 앉아 보는 것이. 강우는 오래전 손강우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엔진 시동음이 경쾌했다.
안전벨트를 매고 옆자리에 앉은 신새벽과 눈을 맞췄다.
“오늘 한국대로 편히 모시겠습니다.”
“사고만 나지 않기를…….”
“쌤? 무슨 악담을! 혼 좀 나볼래요?”
“시, 싫어.”
강우는 부드럽게 액셀에 발을 올렸다. 감각이 나쁘지 않다.
그는 천천히 차를 출발했다.
불과 1분도 채 되지 않아 신새벽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 잘 몰잖아?”
“거봐요. 차 운전 정도는 껌이라니까요.”
“이, 이럴 리가 없는데…….”
강우는 복잡한 거리를 여유롭게 빠져나갔다. 악명높은 서울의 교통 체증도 그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처음에 한껏 긴장했던 신새벽도 점점 편안해졌다. 적어도 강우의 운전 실력이 그녀보다 몇 배는 더 나았다.
“쌤? 저번에 한 내기의 승부가 가려진 것 같습니다만.”
“언제? 난 내기한 적 없어!”
“확 유턴해서 돌아갑니다?”
“어…… 그, 그래. 어떻게 내기해서 한 번도 못 이기냐.”
신새벽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상을 썼다.
“그게 사심이 많아서 그래요.”
“내가 사심이 어디 있어?”
“원래 마음을 비우면 복이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법이죠.”
신새벽은 운전하는 강우의 옆모습을 차분하게 살폈다.
정말 사심이 있는 건가? 강우와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연구에 몰두하는 차도도를 보면 부러운 생각이 든다. 자신도 그렇게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싶다는.
왜 하필이면 강우는 물리이고 자신은 화학이었을까. 왜 강우가 신입생이었을 때 담임이 아니었을까. 강우와 차도도가 운명적인 끈으로 묶여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어쨌든 공부하고 연구하는 강우도 멋있지만 운전하는 강우도 멋있었다. 강우에게 공부 머리 외에 아닌 운동 머리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운전은 순발력이 필요하니까.
“맛있는 것 사주면 되니?”
“좋아요, 비싼 거로.”
“이게 선생님 지갑을 터는구나!”
“아예 기둥뿌리를 뽑을 건데요?”
신새벽의 주먹이 그에게 날아왔다. 강우는 몸을 비틀며 운전에 집중했다.
신새벽의 주먹세례를 맞는 동안 차는 한국대로 달려갔다.
* * *
R&E와 과제연구 학생을 지도한 후 차도도는 고곽천재가 모인 세미나실을 향했다.
작년 대비 올해는 그녀가 지도하는 과제연구 학생이 늘었다. 그녀가 예능에 출연하면서 인기가 폭발한 덕분이다.
그 바람에 핵융합 연구에 매진할 시간이 줄었으나 아직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는 한계 내였기에 그녀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오늘 마지막 담당 학생이 고곽천재이고 이 시간은 강우가 어련히 알아서 이끌고 있기에 그녀는 뒷수습만 하면 된다.
사실 손차희, 윤수아, 최대우는 가르칠 필요가 없는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었다.
“비록 오늘 강우가 없어도…….”
강우는 신새벽과 함께 한국대에 갔다. 신새벽의 간곡한 부탁에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강우가 바깥바람을 쐬는 것이 정신적인 휴식에 좋다고 여겼다.
세미나실 앞에 도착하니 안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차희의 목소리다. 그동안 그녀가 수행했던 연구를 발표하는 것 같았다.
“스스로 알아서 잘하네.”
차도도는 자발적으로 열심히 하는 학생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녀는 세미나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역시 작은 화이트 보드에 수식을 써가며 손차희가 열심히 설명하는 중이었다.
“웬일이야?”
무심코 말을 꺼내며 세미나실 안을 둘러보던 차도도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예상치 못한 두 인물이 손차희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었다.
“차도도 선생? 어서 오시게.”
마도환과 김윤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