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36화 (236/325)

제236화 3학년 (4)

“여길 어떻게 오셨습니까?”

차도도가 얼떨떨한 심정을 수습하고 물었다.

“학생들이 핵융합 연구를 열심히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도움을 주려고요.”

마도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차도도는 마도환의 속셈이 훤히 보였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담당 교사에게 통보도 없이 사적인 공간이라 할 세미나실에 불쑥 쳐들어왔으니 심히 기분이 나빴다.

R&E 시간도 엄밀히 말하면 수업이다. 굳이 도움을 주겠다면 김윤택이 맡은 R&E 학생이나 찾아가지 하필이면 여기를…….

모두 강우의 연구 내용을 빼내려는 수작이다.

마도환의 옆에서 김윤택이 그녀에게 눈총을 주고 있었다. 마도환 앞에서 뻣뻣하게 굴지 말라는 지적이다.

어쨌든 김윤택은 그녀의 상사이고 마도환은 한국대 교수이니 차도도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오셔서 반갑습니다.”

마지 못해 인사하고 상태를 확인했다.

보드에 적힌 수식과 책상에 펼쳐진 자료 논문을 살피고 있자니 김윤택이 말했다.

“학생들에게 연구 내용을 발표해보라고 했습니다. 마 교수님께서 틀린 부분을 수정해줄 테니까요. 학생들에게도 도움 되는 일이죠. 선생님도 같이 들어보기로 합시다.”

갑자기 들이닥친 마도환과 김윤택이 연구 내용을 설명하라고 하니 학생들은 거부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제 막 손차희부터 시작하던 참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차도도는 세미나실 안으로 들어가 한쪽 구석에 자리 잡았다.

다시 손차희가 설명을 계속했다.

헌팅턴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반년이 훌쩍 지났어도 이 프로젝트 기간은 3년이라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손차희가 발표하는 내용은 자료조사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발표 도중에 손차희는 수시로 차도도의 의사를 확인했고 그녀는 몰래 눈짓으로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일전에 강우가 이민찬을 비롯한 김윤택 팀과 정보 교환에 주의하라고 당부했었기에 마도환과 김윤택이 등장했을 때부터 학생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손차희도 중요한 내용을 빼고 적당한 수준에서 자신의 연구 내용을 설명했다.

발표가 진행될수록 마도환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지금까지 한 게 뭐지?”

마치 본인이 지도교수라고 착각한 마도환이 짜증을 냈다.

차도도가 바로 방패로 나섰다.

“1년이 아니라 6개월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전문 연구인력이 아니라 이제 고등학생일 뿐입니다.”

“그래도 이건 좀 심한 수준인데…….”

“이민찬 학생도 비슷합니다.”

“끙.”

역시 고등학생일 뿐이었나? 마도환이 신음을 터트리며 계속하라고 손짓했다.

다시 손차희가 설명을 재개했다.

그녀 다음은 최대우와 윤수아 차례다. 그들도 차도도의 의도를 알아채고 발표 자료의 수위를 조절하며 상대의 의도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내용을 재점검했다.

세미나실에서 때아닌 긴장감이 계속됐다.

* * *

지도교수와 대학원생들은 평균 일주일에 한 번 미팅을 연다.

이 미팅에서 대학원생은 그동안 자신이 연구한 프로젝트나 논문 결과를 발표하여 지도교수에게 점검받는다.

신새벽의 지도교수인 정원재 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정원재는 나이가 있고 사범대학이라는 특성 때문에 맡은 대학원생이 많지 않았다. 박사과정 둘에 석사과정 셋이 전부다. 물론 여기에는 파트인 신새벽도 포함되어 있다.

신새벽을 따라 정원재 교수의 연구실에 들어갔을 때 강우는 정원재와 그 대학원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교수 한 명에 신새벽 포함 대학원생이 다섯이다. 예전 손강우 시절의 물리학과 연구팀과 비교하면 단출하기까지 하다.

“교수님, 저 왔어요!”

신새벽이 활기차게 인사했고 정원재가 온화한 미소로 맞이했다.

동료 대학원생과 인사를 나눈 후 신새벽이 강우를 소개했다.

“이 학생이 바로 고려 과학고생인 강우 군이에요.”

“강우입니다.”

강우는 머리를 숙여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교수에게 예의를 다했다.

“강우 군? 말 많이 들었네. 오느라 수고했어. 자! 자네도 앉지.”

이미 그의 출석을 예상했는지 자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강우는 신새벽과 나란히 커다란 테이블 한쪽을 차지했다.

이런 분위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손강우 시절 대학원생이었을 때 수년간 경험했던 풍경이었기에 강우는 일순간 고향에 온 기분이었다. 그때와 차이점이라면 그의 지도교수가 아니었고 그의 동료가 아니었다.

정원재가 입을 열었다.

“오늘 모든 학생이 돌아가면서 연구 결과를 발표할 거네. 말 그대로 자유토론이야. 토론하면서 서로 배우고 연구에 도움을 얻기 위함이지. 당연히 새벽이도 발표하고. 그렇지?”

“예.”

주저 없는 대답으로 보아 신새벽도 준비했나 보다.

“강우 군은 발표할 필요는 없고, 대신에 본인이 우리 팀의 대학원생이라 생각하고 충실히 세미나에 임해주게나. 질문에 대답까지.”

“그, 그렇게까진…….”

“하하, 괜찮네. 새벽이가 자네를 얼마나 칭찬하던지. 놀라운 천재라고 말이야. 자네 CF도 잘 봤어. 거리낌 없이 이 미팅에 참여해주었으면 하네. 물론 이런 분위기는 어색하리라 생각하네.”

어색한 게 아니라 너무 익숙해서 문제다. 이 미팅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자리다. 아는 것을 알려주고 모르는 것을 배우는.

다만 강우가 본래의 능력을 드러내면 자칫 이 세미나를 초토화할 우려가 있다. 이들은 주전공이 화학이어도 물리화학이기에 반쯤을 물리에 다리를 걸치고 있다.

그래도 상대의 요구를 굳이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강우가 승낙하자 한 대학원생이 프로젝터에 자신의 연구 주제를 띄우고 발표를 시작했다.

내용은 흥미로웠다. 강우는 금방 그 연구에 빠져들었다.

공식 세미나가 아니어서 발표 중간에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또 발표자가 스스로 의문점을 공개하고 의견을 묻기도 했다.

초반에 강우는 분위기부터 파악했다.

이들은 젊은 연구자답게 질의응답이 무척 활발했다. 심지어 신새벽도 활발하게 토론에 뛰어들었다. 이런 팀에서 지식을 갈고닦았으니 신새벽의 뛰어남이 바로 이해된다.

다만 정원재 교수는 나이와 성격 때문인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학생들의 토론에 거의 끼어들지 않았다.

어느새 첫 번째 학생의 발표가 끝나고 열띤 토론이 뒤를 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난관에 부딪혔고 토론 과정에서 해결책을 찾았다.

“미국 스탠퍼드에서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이 문제점에 아직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향후 연구 방향을 이 문제의 해결로 잡아볼까 고민 중입니다. 해결법을 찾으면 제 졸업논문 주제로 완벽하죠. 반면 해결하지 못하면 졸업이 어려워지는 불상사가…….”

다른 학생들이 용기를 주면서 도전을 응원했다.

그때 강우가 나섰다.

“문제점을 잘 들었습니다. 방향을 바꾸어 접근하면 어떨까 싶은데요?”

강우는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에 모두의 안색이 점차 변했다. 특히 발표한 학생은 멍한 표정으로 강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몇 달간 고민하던 문제점을 불과 십여 분의 설명을 들은 강우가 바로 해결책을 제시했다.

구세주가 등장했다고 여긴 학생이 세부적인 질문을 던졌다.

강우는 조금도 어려움 없이 해결책을 마련해주었다.

이윽고 그의 설명이 끝났을 때 그 학생이 꾸벅 인사했다.

“우와! 대단합니다! 내 고민을 바로 해결했어요. 티비에서 천재라고 떠들어서 언론이 만들어낸 거짓이라 생각했는데…… 상상 이상입니다!”

학생이 흥분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여유롭게 미소를 짓는 강우도 속으로는 본인의 천재성에 놀라고 있었다. 이런 능력은 손강우 때는 없었던 재능이었다. 전공 분야도 아닌 타 분야의 연구를 듣자마자 바로 분석하고 이해해서 해답을 제시할 수 있으리라고는 그도 생각지 못했다.

강우는 천재성의 무한한 가능성에 감격했다. 물론 겉으로는 차분하게 상대하고 있었다.

“거봐요. 진짜죠? 제가 이런 천재를 가르치고 있거든요? 이 천재가 제 제자예요!”

신새벽은 자신이 천재인 듯 흥분해서 으스댔다.

“역시 듣던 대로 대단하네.”

정원재 교수가 흐뭇한 음성으로 강우를 칭찬했다.

이어서 다른 학생이 발표를 시작했다.

이번에도 강우는 말미에 적당히 끼어들어 설명을 덧붙였다. 또 연구 내용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바로잡았다.

지켜보던 다른 학생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한국대생인 그들도 진정한 천재가 어떤 사람인지 실감하는 날이었다.

신새벽의 발표는 마지막이었다.

신새벽은 씩씩하게 발표했고 동료들의 질문에도 침착하게 대응했다. 이번에는 강우도 나설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발표가 끝났을 때 정원재가 덧붙였다.

“새벽이는 노창열 교수가 껄끄럽다고 했지? 그래서 독자적으로 논문을 학회지에 투고했다고 했었던가? 지금 어디에 투고를 넣었지?”

“대한화학회지와 퀀텀 캐미스트리 국제 저널입니다.”

신새벽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래, 좋아. 내가 오늘 강우 군을 부른 이유는 새벽이가 혼자서 논문을 쓰는 점이 염려되어서야. 다른 학생들처럼 대학실험실에 나와서 연구한다면 상황이 훨씬 낫지만 새벽이는 그럴 수 없지 않나? 다행히 함께 연구하는 학생이 있다고 해서 그 역량을 확인해보고 싶었네.”

정원재가 강우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강우 군의 능력과 논문 이해도가 예상외였네. 새벽이의 논문이 충분히 우수하리라고 짐작하겠어. 앞으로도 강우 군이 많이 도와주기 바라네.”

신새벽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지금 이 순간 그동안 강우가 지시했던, 노창열 교수를 신경 쓰지 말고 독자적으로 저널에 넣어보자던 계획을 정원재가 승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앞으로 신새벽이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더 넓어졌다.

역시 이 순간을 놓칠 신새벽이 아니었다.

“교수님, 제가 교수님과 R&E를 하고 싶은 학생이 있습니다. 똑똑한 학생인데…….”

“자네가 알아서 하게. 가끔 와서 질문하는 정도는 괜찮아.”

“감사해요! 교수님!”

하은찬과 유혜림의 R&E 길을 신새벽이 열었다. 역시 그녀는 뛰어난 연구자이기도 했지만, 그전에 누구보다 학생들을 생각하는 책임감 있는 선생님이었다.

미팅이 끝난 후 정원재가 강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우 학생! 오늘 인상 깊었네.”

“별말씀을요.”

“혹시…… 한국대에 지원할 계획은 없나?”

“아직은 깊이 진로를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티비를 보니 모든 과학을 다 잘하는 것 같던데…… 고민해보게. 화학은 연구할 분야가 많아.”

강우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인재를 끌어들이고 싶은 정원재의 마음을 이해한다.

“새벽이도 강우 군의 장래를 잘 살펴주게. 학교 선생님이니까.”

“예, 교수님.”

강우를 화학 쪽으로 끌어들이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꾸벅 인사를 마치고 강우는 신새벽과 함께 연구실을 나왔다.

“강우야, 고마워. 덕분에 무사히 마쳤어. 너 오늘 정말 대단하더라. 어떻게 화학을 그렇게 잘 알지?”

“제가 화학경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잖아요.”

“아! 그렇지. 넌 화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면 물리보다 더 잘할지도 몰라. 어…… 근데 너 이번 모의고사 화학 몇 등급이야?”

“사, 삼 등급요.”

“이 자식이! 내가 시험 칠 때 예술작품 그리지 말랬잖아!”

신새벽이 눈썹을 확 올리며 주먹을 들었다.

분위기 좋았는데 갑자기 왜 이러지? 강우는 기겁해서 후다닥 도망쳤다.

신새벽을 따돌리면서 강우는 미팅 때 꺼두었던 휴대폰을 켰다.

순간 수 개의 메시지가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차도도와 고곽천재 동료가 보낸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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