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37화 (237/325)

제237화 3학년 (5)

차도도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세미나실에 갑자기 쳐들어온 마도환과 김윤택 앞에서 현재 진행 중인 연구 내용을 보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행히 연구 진행이 더뎌서 아직은 숨길 연구 결과가 많지 않았다.

헌팅턴 프로젝트가 3년이었으니 망정이지 2년이었다면 골치 아플 뻔했다.

그렇게 위기를 넘기나 싶었는데 마도환이 저녁 식사를 권했다.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어서 차도도는 학교 부근의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김윤택이 일이 있다며 빠지는 바람에 졸지에 차도도와 마도환 둘만의 시간이 마련됐다.

‘주임 선생님이 의도적으로 자리를 마련했어.’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식사 자리 주선자가 김윤택임을 눈치챘다. 마도환을 접대하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부담스럽다.

물론 아직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크게 얽힌 사이가 아니어서 기업에서 보는 흔한 방식의 접대는 아니다. 그래도 차도도의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다행히 학교 부근에는 고급 음식점이 없어서 두 사람이 들어간 곳은 초밥과 회를 파는, 그저 그런 일식집이었다.

“하하, 제가 회를 좋아합니다. 차 선생님도 좋아하시나 보군요.”

마도환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만족을 표시했다.

정작 차도도는 그런 마도환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마도환의 오늘 방문목적은 연구 내용이고 고곽천재에게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니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알아내려는 의도로 보였다.

“하하, 오늘은 제가 한턱 내겠습니다. 광어가 요즘 맛이 좋습니다.”

웨이터에게 광어회를 주문하고 마도환이 차도도에게 물었다.

“간단하게 술도 하시겠습니까?”

“제가 술을 못해서.”

차도도는 손을 저어 거부했다.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마도환이 맥주를 추가했다.

차려진 요리를 맛나게 먹는 마도환과 달리 차도도는 젓가락을 놀리기 힘들었다. 맥주를 한 잔 받아만 두고 간신히 회를 몇 점 주워 먹었다.

마도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오늘 갑자기 방문해서 당황하셨지요?”

“조금 그렇더군요.”

“하하, 죄송했습니다. 곤란하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저는 따로 만나려 했는데 김 선생님이…….”

은근슬쩍 김윤택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도 참 마도환스럽다.

“핵융합 연구야 천천히 진행하면 되는 거고요, 같은 연구를 하다 보면 언제든 친구가 될 수 있으니까요.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정작 대화의 흐름이 차도도의 예측과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어, 어떤 이야기요?”

“남녀가 만났으니 무슨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예?”

“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알 수 없는 질문에 차도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도환은 그녀의 반응을 짐작했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진지하게 한번 사귀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차도도는 황당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 번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제가 나이가 많아 마음에 들지 않겠지요. 무려 10년 차이니까요. 하지만…….”

“그, 그게…….”

“그래도 제가 한국대 교수 아닙니까? 이 나라 최고의 지성인이고요. 누구나 선망하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저희 집안이 나쁘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과기부 장관이셨고요. 이 나라의 엘리트 집안과 연줄이 제법 있는 가문입니다.”

마도환이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차도도는 지금까지 마도환에 대해 한국대 교수란 점을 제외하고는 아는 바가 없었다. 하다못해 나이마저 오늘 처음 들었다.

마도환에게서 흘러나오는 집안 이야기는 예상외로 대단했으나 차도도는 더 대단한 집안이었기에 위축될 일은 전혀 없었다. 어쨌든 마도환이 만만찮은 사람임을 다시 실감하는 자리였다.

“그래서 제가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보자고요. 만나다가 싫으면 그만두셔도 됩니다. 어떻습니까? 어디에 견주어도 저와 제 집안이면 만족하실 겁니다.”

마도환의 자부심에 차도도는 한숨을 쉬면서 거절할 방법을 고민했다.

상대가 너무 진지하게 나오니 부담스럽다. 애초에 생각 없었더라도 딱 자르기엔 마도환과 엮인 업무적인 상황이 걸림돌이다. 마도환이 화가 나면 당장 김윤택이 그녀를 질책할 것 아닌가.

“전 아직 결혼 생각이 없어서요. 그리고 전 일개 고등학교 교사라 한국대 교수님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차도도는 완곡하게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마도환이 공세를 계속했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지 않습니까? 10년 나이 장벽이야 큰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을 열어 보시면 제가 얼마나 좋은 놈인지 아실 겁니다.”

차도도는 열심히 고개만 저었다.

마도환은 포기하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진정성이 의문이신가 보군요. 그럼 정식으로 가문 대 가문으로 제안할까요?”

점점 심각하게 들어가자 차도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 교수님, 저는…… 이런 사적인 대화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도환이 묘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여전히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 너무 갑작스러웠나 보군요. 알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식사를 마저 합시다. 회가 싱싱하군요.”

마도환이 한발 물러났다.

차도도는 다시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회를 한 조각 입에 넣었으나 여전히 맛을 알 수 없었다.

마도환이 혼자서 맥주를 자작했다.

분위기가 점점 어색하게 돌아갔다.

차도도는 이 자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연구 이야기도, 사적인 이야기도 삼가다 보니 대화의 씨가 말랐다. 조용히 회를 먹으면서 그녀를 훑어보는 마도환의 눈빛이 사악하게 느껴진다.

차도도는 마도환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정말 그녀가 좋아서 교제를 제안하는 건지 아니면 연구 성과를 빼내려고 접근하는 건지. 물론 어느 쪽이든 상대할 필요가 전혀 없다.

여전히 여유로운 마도환이 그녀에게 맥주를 권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한잔하시지요.”

차도도는 형식적으로 맥주잔을 들어 잔을 부딪쳤다.

이 자리를 어떻게 피할지 고민에 잠길 때였다.

갑자기 밀실의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쌤?”

“차 선생님! 아직 여기 있었네요!”

놀랍게도 강우와 신새벽이 들어왔다.

어리둥절한 마도환에게 차도도가 미소를 지으며 양해를 구했다.

“교수님, 실은 오늘 저녁에 선약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이쪽은…… 아시죠? 강우 학생이고, 이 분은 신새벽이라고 화학 선생님이세요.”

순식간에 표정이 바뀐 마도환이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의 인사를 받았다. 다만 강우를 쳐다보는 마도환의 눈빛은 매서웠다.

강우가 예의 바르게 마도환에게 말했다.

“교수님? 일 끝나셨으면 제 담임 선생님을 모셔갔으면 합니다. 오늘 연구할 게 많이 남아서요.”

“마 교수님? 다음 기회로 미루시면 어떨지요? 오늘 학교 일이 복잡하거든요.”

신새벽마저 옆에서 거들자 마도환이 신음을 내뱉었다.

“끙.”

차도도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교수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마도환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세 사람이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마도환이 주먹을 꾹 쥐고 열린 문을 노려보았다.

“강우? 저 자식은 왜 이리 자주 부딪히는 거야? 그리고 차도도 네가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당연히 마도환은 이 모욕을 참을 생각이 없었다.

물론 이제는 차도도가 일개 고등학교 선생님이 아님을 안다. 상대는 아직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차도도를 떠올리자 전의가 불타올랐다.

“다음에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거다.”

마도환은 차도도의 신상 프로필을 다시 떠올렸다. 재벌 딸과 결혼한 자신이 연상됐다. 그는 그녀를 공략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고민했다.

그도 한국대에서 박사를 받고 교수를 역임한 천재다.

‘머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마도환의 입가에 재차 미소가 맺혔다.

* * *

세 사람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차도도와 강우는 한마디 말도 교환하지 않고 냉랭한 기운이 흘렸다. 중간에 낀 신새벽 만이 어색한 분위기를 잠재우려 애썼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신새벽의 질문에 차도도와 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도도와 강우를 노려보던 신새벽이 버럭 소리 질렀다.

“우린 밥도 안 먹었거든! 넌 회로 배를 채웠는지 모르지만 우린 배고프다고!”

“나도 거의 안 먹었어.”

“회가 절반 이상 사라졌던데?”

“그건 마 교수가 먹었지.”

한숨을 내쉰 신새벽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어떡할 건데?”

“난 집으로 갈 거야.”

“야! 그래도 강우를 굶기면 안 되지. 밥은 먹여서 들여보내야지. 이 시간에 기숙사 가면 밥도 안 줘. 그렇지? 강우야?”

정작 강우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차도도도 별말 없자 신새벽이 분위기를 달랬다.

“어휴, 학생을 아끼는 마음이 없군. 그래, 집으로 가자. 태워줄게.”

신새벽이 차도도를 주차한 자신의 차로 데려갔다.

강우는 조용히 뒤를 따랐다.

그냥 여기에서 빠져 학교로 돌아갈까 아니면 계속 따라갈까 고민했다. 기숙사로 들어가기엔 차도도와 마도환의 대화가 너무 궁금했다.

신새벽이 차키를 그에게 넘겼다.

“강우야, 차 쌤 집으로 가자.”

신새벽이 뒷좌석 문을 열고 차도도를 태웠다.

강우는 두 여자를 뒷자리에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졸지에 오늘 하루는 운전사가 될 운명이다.

그가 차를 부드럽게 운전하자 룸미러로 차도도의 놀란 표정이 엿보였다.

신새벽이 차도도에게 말을 걸었다.

“강우 운전 잘하지? 나도 깜짝 놀랐거든?”

여전히 차도도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

“그때 강우랑 내기한 거 기억나?”

그제야 기억한 차도도가 신새벽과 강우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내가 완전히 져버렸잖아? 그래서 이 자식이 뭐라는 줄 알아?”

“뭔데?”

다소 성의 없이 차도도가 물었다.

차도도의 대답을 끌어낸 신새벽이 승리한 표정으로 주절대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엄청난 걸 요구하더라고!”

“그게 뭔데?”

“너도 들으면 깜짝 놀랄 거야.”

답답해진 차도도의 눈썹이 팍 올라가자 신새벽이 만족한 웃음을 터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맛있는 거 사달래. 비싼 거로.”

“강우는 클 때라 뭐든지 다 맛있을 텐데.”

“기둥뿌리를 뽑겠대. 이 차를 팔아야 할지도 몰라. 이 자식 완전 뒤끝 작렬하는 거 있지?”

퍽!

강우의 뒤통수에 갑자기 불이 번쩍했다.

룸미러를 보니 차도도가 화난 표정으로 그의 뒤통수를 손가방으로 때리고 있었다.

“넌 맞아도 싸!”

“으악!”

“스승 알기를 지갑으로 알아.”

차도도의 감정 실린 타격이 계속됐다.

강우는 갑자기 차도도가 왜 이리 반응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차도도와 신새벽이 미워졌다.

그는 액셀을 과격하게 밟았다.

“아 씨! 이 자식이 내 차에 분풀이해?”

신새벽마저 그의 적이 됐다.

이럴수록 꿋꿋하게 비싼 곳으로 가서 제대로 얻어먹어야 한다. 내기를 이긴 승자의 권리다.

운전하다가 엄청 화려하고 비싸게 보이는 레스토랑을 발견했다.

안으로 입장하는 순간 웨이터가 그를 붙잡았다.

“오늘 마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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