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화학 R&E (1)
배가 고파서 차도도의 아파트에서 라면을 먹었다.
급히 먹기엔 역시 라면이 최고여서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신새벽이 라면을 끓이는 동안 강우와 차도도는 식탁에 앉아서 조용히 기다렸다.
차도도가 마도환을 만났다니 강우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고작 라면을 끓이는데도 신새벽의 요리 솜씨는 훌륭했다. 학교 기숙사에서 먹던 컵라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었다.
대충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소파에 둘러앉았다. 서로 간의 대화는 없었고 괜히 티비 채널만 돌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신새벽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마도환 교수가 뭐래?”
“별일 없었어.”
“별일 없는 게 아니던데? 얼른 실토하지?”
신새벽이 눈을 부릅떴다. 귀여운 인상의 토끼라 화를 낸다고 무서울 리 없었으나 차도도가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
“진지하게 사귀어보자고 하더라.”
말을 하면서 차도도가 강우의 눈치를 슬쩍 봤다.
강우의 안면이 확 구겨졌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뭘?”
“마도환 그 사람 한국대 교수이고 그럭저럭 생겼고…… 학계에서 제법 영향력도 있고 나쁘지 않잖아?”
신새벽이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차도도가 눈썹을 확 올리면서 신새벽을 쏘아봤다.
“넌 노창열 교수를 왜 싫어하는데?”
“그거야…….”
무심코 대답하던 신새벽은 마도환이나 노창열이나 다를 게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오히려 마도환의 나이가 노창열보다 더 많다.
“네가 노창열이랑 진지하게 사귀면 나도 마도환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지.”
“그건 싫어.”
“나도 마찬가지야.”
두 사람의 대화가 끊어졌다.
강우는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다. 갑자기 마도환이 차도도를 노리다니? 마도환과 차도도가 서로 안면을 튼 지 2년인데 왜 이제야 이런 말이 나오는지?
겉보기에 마도환은 대단히 좋은 신랑감이다. 물론 인성이나 이런 것을 빼고 잰 결과다.
게다가 마도환의 야심을 강우가 모를 수 없다. 권력자이자 학자 집안이기에 가문에 도움될 배필을 골라왔던……. 그 바람에 지금까지 결혼을 늦춘 이력이 있는 마도환이다.
그런 녀석이 갑자기 차도도에게 진지하게 만나볼 것을 요청했다고?
분노가 치밀었다.
강우가 볼 때 그 이유는 비교적 분명했다.
‘차도도의 핵융합 연구 결과가 필요한 거야.’
다른 이유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마도환이 차도도를 그렇게 가볍게 상대하는 자체가 기분 나빴다.
“흐으, 한국대 교수는 하나같이 왜 그런데?”
신새벽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차도도는 굳은 표정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오늘 분위기로 봐서 마도환은 쉽게 물러서지 않아. 주임 선생님을 통해서 압력이 들어오거나 아니면 다른 쪽으로 계속 요구할 것 같아.”
“계속 거절해.”
“그래야지. 그런데 어째 쉽지 않을 느낌이 들어.”
미안한 표정으로 차도도가 강우를 힐끔거렸다.
강우가 유달리 마도환을 싫어하는 것을 그녀도 안다. 그동안 마도환 이야기만 나와도 강우는 질색했었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마도환보다 강우가 더 소중하기에 마도환을 가까이할 이유가 없었다. 마도환 또한 그녀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니 고려의 여지가 없다.
“어휴, 기분이 별로네. 난 노창열 얼굴만 떠올리면 숨이 막혀. 술 있어?”
신새벽이 불평을 터트렸다.
차도도가 주방에서 와인과 마른안주 거리를 가져왔다.
“이럴 때는 한잔하고 푹 자는 게 최고야. 고민해봐야 머리만 아프지.”
신새벽이 차도도를 달래며 와인잔에 포도주를 채웠다.
강우는 황당한 기분에 두 사람을 노려봤다.
그는 술을 마시지 못하니 그만 홀로 외톨이가 됐다. 물론 두 사람의 이성관 또는 결혼 문제에 제자인 그가 끼어들 틈이 애초에 있을까.
쨍!
와인잔을 부딪히고 한 모금 들이켠 신새벽이 강우를 확인했다.
“어쭈? 이 자식이 자기도 달라고 눈을 부릅뜨네? 강우야, 참자, 응? 내년에는 너도 와인 줄게.”
와인이 먹고 싶어서 눈을 부라린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 오해를 샀다.
어쨌든 두 사람의 기분을 이해하기에 강우는 딴지를 걸지 않았다. 대신에 강하게 한 마디만 쏘아붙였다.
“차도도 선생님! 앞으로 마도환 교수와는 만나지 마세요!”
강우를 물끄러미 보던 차도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새벽이 깔깔대며 웃었다.
“이야! 강우가 남친처럼 사생활까지 막 간섭하고 그러네? 근데 그게 뜻대로 되겠니? 오늘도 차 선생님이 마도환을 부른 게 아니잖아?”
차도도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에 시계를 본 그녀가 물었다.
“강우야, 기숙사 점호 몇 시야?”
지금 출발해도 점호 시간 전까지는 들어가지 못한다.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렀다.
“괜찮아요. 사감 쌤에게 조금 늦다고 문자 보내죠. 이해하실 거예요.”
“오늘 사감 누군데?”
“김선호 쌤요.”
그 말로 바로 이해한 듯 신새벽과 차도도가 다시 와인잔을 부딪쳤다.
할 일이 없어진 강우는 마른안주로 손을 뻗었다.
* * *
강우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었던 중간고사가 지나가고 어느새 과제연구 집중기간이 됐다.
고려과학고 3학년들은 이 기간에 R&E에 매진하면서 학생부에 넣을 한 줄을 더 만들려고 온 힘을 다한다. 일부 학생은 수능 공부를 열심히 하기도하고.
1, 2학년들은 과제연구팀끼리 모여 연구에 집중하거나 때로는 동아리 활동에 매진하기도 했다.
평소라면 강우는 고곽천재와 함께 핵융합 연구에 몰두할 시간이었으나 오늘은 신새벽에게서 호출이 왔다.
B동 상담실에서 신새벽을 만났다.
“강우야! 잘 왔어. 네가 할 일이 조금 있거든!”
올해부터 상담실에서 차도도를 보기 어려워졌다. 3학년 담임인 차도도는 주로 A동에서 머물렀다. 대신에 오늘은 익숙한 두 녀석이 신새벽과 같이 있었다.
“강우 선배님! 오랜만이에요!”
하은찬과 유혜림이다. 2학년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두 녀석이다. 이 둘은 경시에서도 내신에서도 최상을 달리고 있다. 1학년 때 내신 종합 1, 2위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 둘은 작년부터 신새벽과 과제연구를 같이했다. 물론 그 원인을 강우가 제공했었다. 이 둘이 화학에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강우는 둘의 재능을 슬쩍 확인했다.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강우야, 그때 한국대 갔을 때 내가 교수님께 말씀드렸잖아?”
이 둘을 신새벽 지도교수인 정원재와 엮으려 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학생을 챙기는 신새벽에게 감탄했던 기억까지.
“아! 오늘 그 때문에 부르셨어요?”
“그렇지. 그래서 할 일이 많아!”
신새벽이나 정원재 교수가 할 일이 왜 그에게 넘어오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에게 눈을 찡긋하는 신새벽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당연히 강우도 이 두 학생을 눈여겨봤던 만큼 키워볼 의향이 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후배 두 녀석이나 고곽천재나 어차피 같은 연구 동료이자, 먼 훗날 그를 지지하고 그와 함께 연구에 매진할 과학자였다.
그렇기에 고곽천재 만큼이나 이 둘도 소중했다. 이렇게 잡은 기회를 잘 살려야 한다.
“흠.”
강우는 두 사람의 재능을 다시 확인했다. 공식적으로는 첫 만남이기에 기대하는 표정이 둘에게 엿보였다. 이 둘은 작년 일 년 동안 그를 졸졸 따라다닌 이력이 있다.
“먼저 하나 물어볼게. 둘의 올림피아드 경력이…….”
“전 수학 올림피아드 은상요.”
“전 화학 올림피아드 국가대표 상비군요.”
두 사람 모두 대단하다.
“올해도 할 거야?”
“올해는 반드시 금메달 따야죠. 이미 준비하고 있어요.”
올해 국제 올림피아드에 출전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진로도 대충 짐작이 간다.
“너희도 유학을 고려하니?”
“가능하면요.”
“우리 엄마가 유학 가라고 했거든요? 미국 쪽이면 좋고 정 안되면 유럽 쪽도…….”
어느새 길어지는 하은찬의 말을 손을 저어 잘랐다.
유학이 목표라면 고곽천재처럼 키우면 된다. 그렇다면 내신보다 연구에서 하드 트레이닝하면 된다. 어차피 한국대와 R&E를 시작하니 금상첨화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길을 열어줄게. 따라올 거야? 아직은 거절해도 괜찮아.”
“아뇨. 선배랑 같이할래요.”
“저도요.”
하은찬과 유혜림이 의욕을 뿜어냈다.
강우는 그들의 태도가 만족스러웠다.
이제는 신새벽에게 시선을 돌렸다.
“쌤!”
“응?”
“논문 어떻게 되었어요?”
“야! 여기에서 그게 왜 나와?”
신새벽이 눈을 흘겼다.
“나올만하니까 나오죠.”
“그래도 이 자리에서 그게 나오면 내가 뭐가 되냐? 내가 선생님이고 넌 제자인데 그게 나오면 내가 대학원생이고 네가 교수가 되잖아? 학생 앞에서 쪽팔리게.”
웃는 표정이 전혀 쪽팔린 기색이 아니다.
“답은 돌아왔어요?”
“국내 국외 둘 다. 심사위원의 질문서가 잔뜩 날아왔는데 그리 어렵진 않아.”
순항하고 있다는 뜻이다. 별문제 없다면 늦어도 여름방학이 되기 전에 해결이 난다. 저널에 논문이 실리면 신새벽의 졸업논문 통과는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지금은 다음 순서를 밟아야 한다.
“쌤, 이제 후속 논문을 고민해보죠.”
“으악! 벌써? 졸업논문은 어떡하고?”
“원래 연구는 끝이 없는 거예요. 쌤도 외국에서 박사 밟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예전에 신새벽은 강우와 함께 가는 MIT 유학을 은근히 기대했었다.
“목표를 이루려면 열심히 정진해야죠. 이 두 학생도 같이 데리고요.”
그제야 신새벽은 강우의 속셈을 눈치챘다. 지금 차도도가 고곽천재를 이끄는 것처럼 그녀에게 이 둘을 이끄는 역할을 기대한다는 뜻이다.
“내가? 가능해?”
“충분히요.”
강우의 확신에 신새벽은 뿌듯하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옆에서 강우가 도와준다면 자신이 있었다.
“목표를 내년 초까지 잡고 국제학술지에 두 편 논문을 더 내보죠. 저자는 신 쌤과 이 둘. 어때요?”
“그게 말처럼 되면야…… 근데 넌 이름 안 넣고?”
“전 물리에서만 논문이 차고 넘쳐요.”
그 사실이 강우보다 신새벽을 더 자랑스럽게 했다.
대단한 녀석! 이 녀석은 논문을 학교 리포트라고 생각하나? 어떻게 뚝딱하면 한 편이 나오지? 그것도 세계적인 학술지에 수록될 논문이.
지금까지 한국의 고등학생이 국제학술지에 실은 논문이 손에 꼽을 정도이고, 설사 있어도 간신히 이름만 올릴 수준인데 이 녀석은 본인이 직접 주도해서 논문을 싣는다. 도대체 그 능력의 끝을 모르겠다.
이럴 때마다 강우가 고등학생이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가 그녀에게 준 도움도 지도교수보다 훨씬 많다. 새삼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강우가 연구자의 길을 걸을 때 그녀도 옆에서 함께 그 길을 걷고 싶다는 욕심이 났다. 지금처럼 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것도 좋지만 직접 연구에 뛰어들어 강우와 손발을 맞춰보고 싶다.
천재의 옆에서 천재가 걸어가는 위대한 길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찰 것이다. 새삼 연구 의욕이 불끈 솟았다.
두 후배를 보면서 머리를 굴리고 있는 강우가 왠지 믿음직스럽다.
머리가 복잡한 신새벽 앞에서 강우가 세 사람의 미래를 결정할 계획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