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39화 (239/325)

제239화 화학 R&E (2)

“내가 원자핵융합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지?”

“네.”

하은찬과 유혜림이 대답했다.

“그럼 신새벽 선생님이 어떤 논문을 쓰는지 알아?”

두 학생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강우는 화이트보드에 핵심을 적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신 쌤의 석사 논문도 비슷해. 물리와 화학이란 차이가 있어도 기본 출발은 같아. 물리화학이라고 들어봤지? 예전에 강연했었잖아?”

두 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물리화학에서 한 발 더 나가면 양자화학이란 학문으로 넘어가. 바로 신 쌤이 지금 연구하는 분야거든. 원래 양자화학에서는 전자의 분포를 양자적으로 다루면서 원자, 분자 궤도함수의 선형조합과 오비탈을 연구하는데…… 신 쌤은 이를 전자가 아닌 뮤온 입자의 거동과 연결할 거야. 뮤온 입자는 자기력이 전자와 동일해서 유사한 현상을 보이거든. 그래서…….”

강우는 보드에 원자와 분자의 그림을 그리면서 원자핵반응에 뮤온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열심히 설명했다.

하은찬과 유혜림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으나 지금 강우의 입에서 토해지는 이론과 가정을 통해 그것이 첨단을 달리는 과학임을 충분히 인식했다.

가끔 고곽천재가 연구하는 참고도서와 참고논문을 보기도 했었다. 영어가 가득한 원서. 그때마다 그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들도 일 년만 더 일찍 이 학교에 입학했으면 강우와 친구가 되어 과학자를 목표로 공부에 치중했을 텐데 한 해가 늦어 부러운 눈으로 봐야만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 그 바람이 지금 눈앞에 떨어졌다. 드디어 강우가 두 사람에게 할 일을 던지고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강우가 원하는 대로 따라가면 그들은 고등학교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함께할 가능성이 생겼다.

무척 신나는 미래였다.

하은찬과 유혜림은 오늘부터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럼 신새벽 쌤은 뭐해요?”

“아! 원래 이과 쪽 연구는 혼자서 하지 않아. 여러 명이 힘을 합쳐 함께 수행하는 거지. 예를 들어 고속전철을 만든다고 상상해봐. 실제 생산라인에서 만드는 사람들 말고 연구인력만 몇 명이 필요할까? 세계 2차 대전 때 핵폭탄을 개발한 맨해튼 계획에 발을 담갔던 과학자가 몇 명인지 아니?”

셀 수 없는 과학자가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다. 아폴로 달착륙계획도 마찬가지다. 인류를 에너지난에서 해방하는 상온핵융합 연구도 다르지 않다.

강우가 아무리 천재여도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다. 뉴턴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에 과학의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한 것처럼 강우도 과거부터 지금까지 쌓아온 인류의 과학 문명에 더해 수십 명의 동료 과학자가 필요하다.

하은찬과 유혜림이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소 플라스마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투입되는 뮤온 입자가 많을수록 양자화학의 관점에서 본 핵반응 연구가 중요해. 이 부분을 연구해서 적어도 두 개의 논문을 만들어내는 게 목표야. 신 쌤이랑 같이.”

이어서 강우는 하은찬이 집중할 연구 부문과 유혜림이 집중할 연구 부문을 나누어서 세세히 설명했다.

아직 기초가 없는 두 학생이기에 그는 가장 기본적인 부분부터 차근차근 설명했고 이것은 신새벽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강우가 정말 작정했나 보네.’

한때 신새벽은 강우가 그녀의 논문에서 손을 떼지 않을까 두려워했었다. 그래서 그를 어떻게든 묶어두려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오늘 강우의 설명을 듣고 나니 그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의 윤곽이 보였다.

강우는 그녀에게도 차도도와 같은 역할을 부탁하고 있었다. 핵융합 연구에서 필요한 화학적 기반을 그녀가 맡아야 했다. 차도도가 물리학 쪽을 담당하는 것처럼.

그동안 차도도가 무척 부러웠었다. 그녀는 애초부터 진학에 관심이 높았고 박사학위를 인생의 목표로 잡았었다. 그래서 더욱 강우에게 매달렸다. 때로는 차도도를 시기하기도 했고.

강우와 같이 MIT로 가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강우의 강의를 들어보니 강우는 이미 그녀를 그 계획에 집어넣고 있었다. 그녀는 버림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강우와 함께 MIT에!’

물론 그녀는 박사과정으로 입학한다. 어쩌면 하은찬과 유혜림이 뒤따라올지도 모른다. 아마 십중팔구 높은 확률로 그렇게 될 것이다. 적어도 강우가 둘을 끌어들이고 있으니까.

신새벽은 강우의 설명을 들으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두 학생을 관찰했다. 아마 지금 자신의 표정도 저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점점 강우가 욕심이 난다.

‘10년을 극복할 수 없나…….’

강우라는 천재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심을 그녀는 억누르기 어려웠다.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만 아니었어도……. 그 관계가 극복할 수 없는 장벽처럼 느껴져서 괜히 우울해졌다.

* * *

늦은 시각, 차도도는 전화를 받았다.

늦게까지 학교에서 연구에 매달리다가 막 집에 들어와서 씻고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이었다.

“엄마?”

- 그래, 잘 지내고 있니?

“웬일이세요?”

- 할 말이 있어서.

부모님이다. 학교 선생님으로 취직하고 독립해서 이 아파트에 거주한 후 본가와는 다소 소원한 관계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기억에 이처럼 관계가 어색해진 이유는 세 차례에 걸친 의견 충돌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그녀가 문과 이과를 결정하면서 이과를 선택하는 바람에 부모의 뜻을 거슬렀던 때다. 두 번째는 대학 진학 때 경영학 전공으로 유학을 가지 않고 한국대 물리교육과에 입학하여 선생님을 목표로 잡았을 때다. 세 번째는 대학 졸업 후 적당한 혼처에 시집을 가라고 했을 때 굳이 학교 선생님을 하겠다며 교사의 길을 선택했을 때다.

그녀도 안다. 그녀가 부모의 선택을 받아들였으면 그녀의 삶이 훨씬 편했으리란 것을.

그녀가 고집을 피운 이유는 어찌 보면 하나였다. 부모의 아바타가 되기 싫었다.

부모가 그녀에게 경영학을 권한 이유는 가업을 물려줄 의도가 아니었다. 그룹을 물려받을 그녀의 오빠는 이미 착실하게 경영수업을 받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기업 경영에 뜻이 없었기에 이를 서운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그룹의 주축이 아닌 무늬만 적당하게 간판을 씌워 그녀를 정략 결혼시키겠다는 의도가 엿보였다.

부모는 원래 재벌가는 모두 그렇게 계약 결혼으로 맺어지고 살아간다고 그녀를 설득했다.

그녀는 반대했고 그 과정에서 물리학은 그녀를 지탱하는 한 축이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고 싶었으나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차선으로 교사를 선택했고 이 직업은 적당한 집안에 결혼시키려는 부모의 의도와 일부분 부합했다.

“혹시…… 결혼 때문인가요?”

곧바로 싸한 느낌이 그녀를 휘감았다. 그 일이 아니면 굳이 전화할 이유가 없다.

- 잘 아는구나. 괜찮은 혼처가 나타났어.

“엄마! 난 결혼 안 한다고 누차 말씀드렸잖아요?

- 그래도 이번에 만나보렴. 썩 내키진 않는다만 네 나이가 몇이니? 몇 년 후면 서른이 넘고 그때가 되면 여자는 가치가 떨어져. 그러니까 이번에…….

“싫어요.”

- 벌써 양쪽 집안에 합의가 끝났다. 너만 좋으면 그쪽 집안에서는 무조건 오케이라더라.

“너무 급하잖아요?”

- 이것아! 네 나이가 더 급해. 다 큰 처녀가 혼자서 밖을 떠도니 보기에 좋지 않구나.

차도도의 손이 떨렸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도 지금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아직 그녀는 자신이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뒷바라지하는 그림을 전혀 그릴 수 없었다. 요리라고는 할 줄 아는 게 없고, 학생을 가르치는 일도 연구하는 일도 손에서 놓고 싶지 않다.

“아빠는요?”

- 아빠도 찬성이다.

실망한 그녀가 대답을 멈추자 다시 독촉 소리가 들려왔다.

- 그동안 소개하는 사람 족족 네가 싫다고 찼었잖아?

“그건 제가 준비가 안 되어서였고요.”

- 회사 경영하는 남편이 싫어서가 아니고?

정확하게는 재벌 간 짝짓기가 싫어서였다. 물론 그녀는 그 이유를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 그래서 이번에는 네가 좋아하는 공부 하는 사람으로 골랐다. 알아보니 학자 집안에 권력과도 연이 닿아있는 제법 괜찮은 집안이더라. 돈이 없는 게 흠인데 돈이야 우리가 많으니까. 만일 네가 원한다면 결혼 후에 너도 박사학위를 밟으면 되잖니?

뜬금없이 학자 쪽 집안이 나왔다. 그녀의 기억에 방금 들은 말은 부모가 그녀의 진학을 허락하는 첫 언급이었다. 과거에 대학 졸업 때 저 말을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몇 번이나 말씀드리는 거지만, 전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 괜찮은 사람이야. 잘 나가는 한국대 교수. 전공도 너랑 같더라. 어때? 좋잖아?

한국대 교수에 전공도 같다고 하니 갑자기 차가운 물에 빠진 기분이다. 어김없이 마도환이 떠올랐다.

- 신랑 아버지가 과학기술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냈어. 그만하면 집안 좋지 않니?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충격이 왔다.

마도환의 아버지가 장관을 지냈다고 했는데…….

며칠 전 마도환이 던진 막말이 함께 떠올랐다. 혼담을 넣겠다고 했던가?

그녀는 마도환이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지금 그녀의 주위 사람들은, 또 친구들마저 그녀가 차성그룹의 자녀인 줄 아는 사람이 없다.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신새벽마저 단지 그녀가 좀 잘 사는 집안의 딸 정도로 여기니까.

“소름 돋네요. 전 그 사람 싫어요.”

차도도는 강하게 반발하며 전화를 끊었다.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부모에게, 또 마도환에게 거세게 한 대 맞은 기분이다.

지금까지 그녀와 부모가 대립해 온 과정을 떠올리면 이 사태의 결과가 뻔히 보였다.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 양쪽이 극단적으로 갈라서기 전에는 그녀의 뜻이 부모에게 먹히지 않음을 잘 아니까. 그렇다고 인연을 끊을 용기는 없다.

다시 전화가 울렸으나 차도도는 받지 않았다.

그러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 조만간 날을 잡을 테니 선본다고 생각하고 만나거라. 가족 행사니 반대는 없다.

모든 일이 이런 식이다.

차도도는 눈앞이 깜깜했다.

마도환을 거절한 게 불과 얼마 전인데 이번에는 양가 합의로 다시 만나라니. 자존심을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그런 자리에 절대 나갈 수 없다. 매몰차게 찼던 남자에게 이제는 받아달라고 애원하는 꼴 아닌가.

그녀를 비웃는 마도환의 얼굴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 순간 강우가 떠올랐다.

왜 강우가 생각나는지 그녀도 모른다. 강우는 단지 그녀의 제자일 뿐인데. 강우가 극단적으로 마도환을 싫어해서인가?

어쨌든 혼담이 오가는 것만으로도 강우에게 미안했다.

“하아!”

차도도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걱정에 잠을 자긴 틀렸다. 몸을 뒤척이다 보니 시계가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녀는 휴대폰에 든 사진을 넘겼다. MIT에서 찍었던 그녀와 강우의 사진을 보니 마음이 안정된다.

-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정.

MIT를 상징하는 커다란 장식물 아래에서 함박웃음을 짓는 강우다.

몇 번이고 사진을 어루만지던 그녀는 충동적으로 강우에게 톡을 보냈다.

- 차도도 : 자니?

한참 만에 답장이 날아왔다.

- 애제자 강우 : 아뇨.

- 차도도 : 뭐 하는데?

- 애제자 강우 : 쌤 사진 보고 있어요.

마음이 통했을까? 그녀도 사진을 보고 있었기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 차도도 : 별짓을 다 하네. 웃음(이모티콘).

- 애제자 강우 : 쌤 사진이 아니라 신 쌤 사진인데요?

- 차도도 : 화냄(이모티콘).

귀여운 토끼가 분노하는 예쁜 이모티콘이 떴다.

강우와 톡을 나누고 있자니 마음이 한결 가라앉았다.

차도도는 자신이 강우에게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이런 시간이 얼마나 계속될까.

마도환과 엮이지 말라던 강우의 경고가 새삼 무겁게 그녀의 머리를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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