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40화 (240/325)

제240화 화학 R&E (3)

침대에 누워 강우는 차도도가 선물했던 태블릿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방금 차도도의 톡이 수상쩍긴 했다. 밤늦게 그녀가 뚜렷한 목적 없이 연락한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강우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태블릿 화면에서는 차도도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연말 예능 프로에서 벌칙으로 차도도가 노래를 부른 장면이다.

- 탤런트 뺨치는 미모에 가수를 압살하는 가창력! 천재 여신 등장!

과격한 수사를 동원한 클립 이미지로 인터넷에 떠다니는 동영상이다. 조회수가 백만을 넘어섰다. 가히 살인적인 인기다.

이 동영상에서 차도도는 완벽한 미모를 뽐내며 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가창력이 수준급이라 흠잡을 곳이 없다. 역시 공중파 방송이 찍은 화면이어서 개인이 찍은 영상과는 질이 다르다.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네.”

그가 이럴 정도니 다른 학생들의 반응은 어떨까.

강우는 화면 속의 차도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노래를 또 듣고 싶다. 욕심을 내자면 청중에게 부르는 노래가 아닌, 그만을 위한 노래를 듣고 싶다.

강우는 방송 녹화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차도도를 떠올리면 역시 행복하다.

잠이 들 시간이 지났음을 깨닫고 강우는 맞은편 침대를 확인했다.

최대우가 여전히 노트북을 펴놓고 끙끙대고 있었다.

“뭐하냐? 걸그룹?”

“아니.”

“그럼?”

“배틀 중.”

게임 중이라니! 최대우가 잠을 잊을 정도로 열심히 게임 한 적은 없기에 새삼 걱정스럽다. 과학고에도 게임에 빠져 인생을 탈주한 학생이 심심찮게 있는 세상이니.

“배틀그라운드?”

“아니. 물리 블로그에서 배틀 중.”

게임보다 더 재밌는 물리 공부라니! 누가 천재 아니라고 할까 봐. 저 녀석 물리를 너무 열심히 하는 것 아닌가? 그래도 잠은 자야지.

“무슨 일이야?”

강우는 태블릿으로 물리 문제풀이 센터에 접속했다.

특정 게시판 하나가 난리였다.

한국어와 영어가 뒤섞여 세 사람이 치열한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놀랍게도 당사자는 블로그 주인인 시리우스와 여신인 애나였고 여기에 의문의 한국인이 한 사람 더 끼어 있었다. 몽상가란 닉네임을 쓰는 사람이다.

몽상가란 한국인을 보는 순간 강우는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가끔 이 블로그에 와서 전문가 수준의 질문을 던져놓고 사라졌던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 요즘도 와?”

“아주 가끔. 그런데 나랑 애나가 논쟁을 벌이면 어느 순간부터 이 사람이 끼어들더라고. 그런데 이 사람 실력이…… 후덜덜하네.”

몽상가의 실력이야 강우도 인정한다. 물리 전공 대학생의 실력은 넘어섰고 적어도 박사과정 대학원생이거나 아니면 물리를 전공한 교수나 연구자다.

시리우스, 여신, 몽상가……. 흥미로운 전쟁이다.

그들의 논쟁을 살피던 강우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 그들이 벌이는 논쟁이 바로 핵융합 분야였으니까.

최대우는 최근 헌팅턴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핵융합 분야에 상당한 지식을 쌓았다. 이제는 요셉 교수와도 자유자재로 토론을 벌일 수준이다.

그런데 그런 최대우와 당당하게 맞서는 애나는 정말 괴물이다. 이런 수준으로 토론하려면 애나도 관련 분야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봐야 했다. 고등학생으로서는 불가능한 수준이니까. 애나의 물리 재능이 S임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한 명인 몽상가는 더 놀라웠다. 그런 최대우와 애나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게다가 중간중간에 해법의 키를 던지거나 함정을 파면서 토론을 이끌고 있었다.

강우마저 이 사람의 실력에 감탄할 정도였다.

“핵융합 분야에서 이렇게 뛰어난 한국인이 있었나?”

핵융합 연구자가 그의 눈을 피하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국내 최고 권위자로 마도환을 비롯한 몇몇 사람이 있으나 이처럼 블로그에 뛰어들어 토론을 즐길 인물은 없다.

한국어를 쓰니 한국인인데 아무리 찾아도 마땅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몽상가가 누구야?”

“나도 몰라. 예전부터 전문적인 질문을 올리던 사람이잖아?”

“하필 핵융합 전문가고?”

“그러니까 더 이상하지.”

최대우는 토론의 답 때문에 머리를 싸맸다.

강우는 그동안 몽상가가 올렸던 글을 쭉 확인했다. 그 정체를 파악할 단서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유령이네.”

“유령이면 어때? 토론하니 재밌는걸? 그러잖아도 프로젝트 연구하다가 막혀서 올렸더니 답변해주더라.”

대단한 최대우이고 대단한 몽상가다.

슬슬 그 정체가 미칠 만큼 궁금해진다. 어쨌든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으니 다행이다.

“애나도 핵융합에 관심 있어?”

“예전부터 관심이 높았는데 최근 나랑 토론하면서 더 흥미가 동했나 봐. 대학에서 이쪽으로 전공할 의향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

“크크, 애나가 핵융합을 전공하면 나도 핵융합을 전공해야지.”

애나의 할리우드 여신 미모를 떠올려보면 최대우의 결심도 이해된다.

핵융합은 원래 별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 모든 반응은 별과 연결되고 우주 진화의 열쇠다. 그래서 천문학과 관련이 깊다. 물리와 천문에 양다리를 걸친 최대우에게 가장 적합한 분야다.

최대우는 훗날 별의 내부를 연구하는 천체물리학자를 꿈꾸고 있다. 어쩌면 저 녀석은 지금 애나와 함께 연구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리하지 말고 잠이나 자. 토론은 승부를 길게 봐야 하니까.”

“그래야지.”

최대우가 노트북을 덮었다.

정작 강우는 태블릿을 끄지 않았다. 이 즐거운 토론을 구경만 하고 넘길 수 없다.

강우는 블로그에 접속해서 세 사람의 토론에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핵융합은 그의 전공이니 지금 이들의 수준이 아무리 높아도 그에게는 어린애나 마찬가지다.

태블릿 위를 손가락이 미끄러진다. 그때마다 놀라운 수식과 견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히 강우는 애나를 위해 영어로 글을 올렸다.

닉네임은 god(신)!

시리우스, 여신, 몽상가가 토론하던 글의 중간중간에 신의 견해가 달렸고 그들의 실수를 정확하게 집어냈다. 거기에 신의 새로운 의견까지.

“애들 노는 물에 너무 깊게 들어갔나?”

상온핵융합계의 거장, 신이 등장했다.

그야말로 압살! 강우의 의견은 차원이 다르다!

그가 올린 글은 불과 하루가 지나지 않아 전장을 초토화했다.

여신과 몽상가 모두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인터넷상의 대전이었어도 강우는 뿌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그럴수록 몽상가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 * *

C동의 한쪽에 물리실험실이 생겼다.

이전에 있던 물리실험실에 이어 3번째 물리실험실이다. 이 실험실에는 강우가 기부한 프로젝트 자금으로 소형 풍동과 주사전자현미경, 초고속 촬영장치 등이 도입됐다. 대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고가 장비다.

“풍동에선 자동차 모형이나 전철 모형을 놓고 실험할 수 있고, 초고속 촬영장치에서는 총알이 종이를 뚫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차도도가 모인 관계자를 향해 설명했다.

“대단하군요. 장비 도입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교장 백두섭이 그녀의 노고를 치하했다.

오늘은 새 물리실험실 개장식 날. 학교 임원이 붉은 리본을 가위로 끊는 축하행사가 열렸다.

행사 주역은 단연 강우를 비롯한 고곽천재였다. 그들의 이름으로 이 실험 장비를 기증했기 때문이다.

실험실 입구에 네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문자판이 붙었다. 간략한 기자재 설치 이력과 함께.

“우와아아! 내 이름이 붙어있어!”

윤수아가 감격했고 모두가 맞장구를 쳤다.

강우는 친구들과 함께 교장 선생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차도도의 설명을 들었다.

대부분 손강우 시절 다뤄봤던 장비인데 이곳에서 다시 접하니 감격이 남달랐다.

주요 장비를 구경하면서 그간 차도도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이해했다. 카탈로그에서 장비를 선정하고 주문한 후 장비가 제작되어 들어오기까지 반년 이상 걸렸다.

연구에 집중하느라 시간 내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 와중에 이 일을 도맡아 했으니 대단하다.

백두섭 교장이 강우와 고곽천재에게 감사를 표했다.

“강우 군, 덕분에 후배들이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게 되었어. 학생을 대신해서 감사하네.”

강우는 꾸벅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학교를 위해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친구들도 각자 한 마디씩 소감을 남겼다.

참석한 선생님들이 박수로 환영했다. 오늘처럼 많은 선생님께 축하받기는 처음이다.

“올해도 수학 올림피아드에 출전하나?”

“아뇨, 전 올해는 올림피아드에 가지 않습니다.”

“아쉽군. 그럼 다른 학생들은?”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백두섭이 다른 학생을 둘러봤다.

“제가 수학 올림피아드에 나가고, 대우가 물리 올림피아드에 나갑니다.”

손차희가 대표로 대답했다.

올해 강우는 어느 대회에도 출전하지 않는다. 올해 수학 올림피아드에서는 손차희와 이민찬, 하은찬이 열심히 할 것이다. 물리 올림피아드에는 최대우가, 화학 올림피아드에는 유혜림이 있을 것이다.

“올해도 작년 못지않은 성과를 거둬주길 바라네.”

백두섭이 덕담을 나눴다.

실험실 개장 행사를 마무리하고 백두섭이 사라지자 다른 선생님들이 몰려와서 그들을 환영했다.

“차도도 선생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노고를 익히 아는 선생님들이 너도나도 차도도를 축하했다.

차도도는 일일이 답례하면서 그들에게 실험기기를 자랑했다.

B동 옥상에 설치한 플라네타리움과 천문대를 제외하면 이 실험실 장비가 고려 과학고에서 가장 비싸다.

“역시 뛰어난 선생님 밑에 뛰어난 제자군요.”

“학생들이 우수해서 그런 거예요.”

차도도는 선생님들의 칭찬을 고곽천재의 우수함으로 돌렸다.

“손차희 학생이야 원래 우수했어도 강우는 아니잖아요? 강우는 중학교 때 대비 엄청난 성장을 이뤘고 그건 모두 차도도 선생님 덕분이죠. 무려 3년 동안 담임이신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 강우의 괄목할만한 성장은 차도도의 능력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거의 꼴찌로 들어오다시피 한 학생이 지금은 최고로 주목받는 인재로 성장했으니까. 고려 과학고 역사상 이런 천재는 없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차도도의 역할이 적다고 여기지 않았다. 실제로 차도도와 강우가 상담실이나 세미나실에서 토론을 나누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으니까. 수행 중인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차도도이니 타인이 보기에는 그녀가 강우를 끌어가고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강우는 천재거든요.”

“그 천재성을 알아보고 키운 사람이 바로 담임이죠.”

선생님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강우는 마치 자신이 칭찬받은 것처럼 뿌듯했다. 차도도가 축하받는 일이 자신이 받는 것보다 더 기분이 좋다.

실험기자재 기증자 명단에 차도도가 빠져 서운했는데 이렇게라도 그 노력을 인정받아 다행이다.

선생님들에게 둘러싸인 차도도를 내버려 두고 몸을 돌리니 신새벽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우야, 축하한다!”

“쌤 덕분이어요.”

“그래, 그렇지? 나도 분명히 한 일이 있지?”

신새벽이 환하게 웃었다.

강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악수하듯 흔들었다.

“물론이죠. 쌤이 저를 끌어주셨잖아요.”

신새벽도 그가 이 학교에 적응하도록 도움을 많이 줬다. 그녀 덕분에 상온핵융합을 화학적인 관점에서 관찰할 계기가 있었고. 그녀는 동료 연구자로서 마음의 안정을 준 역할도 했다.

“그래, 네가 나를 알아주네.”

차도도를 힐끔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신새벽에게 강우는 귓속말로 물었다.

“쌤! 근데 저 좀 도와주실래요?”

“뭔데? 네가 해달라는 건 뭐든지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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