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1화 맞선 (1)
신새벽의 자신감이 넘쳤다.
당연히 강우는 믿을 수 없다며 항의했다.
“에이, 거짓말. 그때 맛있는 거 사준다고 하고선 결국 라면 주셨잖아요?”
“그게 내 잘못이냐? 하필 욕심을 내서 문 닫은 곳으로 간 네 탓이지!”
“그럼 다음에라도 데려갔어야죠.”
“라면 요리는 쉬운 줄 알아? 그날 밤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 학교에서 내가 라면을 직접 끓여준 사람은 너뿐이야.”
뭔가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억울했다. 라면으로 퉁치기가 아쉬웠지만, 권력에서 밀리니 어쩔 수 없다.
하여튼 지금 아쉬운 사람은 강우니까.
“그래서 제 부탁은요.”
“그래, 뭔데?”
둘만의 비밀 이야기는 서로에게 정감을 준다. 만족한 신새벽의 얼굴이 밝다.
“어린이날이…… 저희 담임 쌤 생일이잖아요?”
“어…… 그렇지. 같이 극장 가자고?”
“그게 아니라 선물을 사야 하는데…….”
금방 신새벽이 강우의 뜻을 이해했다. 남자가 여자 선물을 고르기는 쉽지 않으니까.
“같이 선물 사러 가자는 거지?”
“딩동댕!”
“그 정도야. 내게 맡겨!”
신새벽이 흐뭇한 표정으로 웃다가 갑자기 강우를 노려봤다.
“근데, 내 선물도 있는 거야?”
“쌤 생일은 아직 멀었잖아요?”
“야! 선물을 꼭 생일 때만 주니?”
강우는 할 말을 잃었다.
* * *
며칠 후 강우는 신새벽과 백화점에서 만났다.
1층부터 꼭대기 층까지 쭉 둘러보면서 강우는 진열된 상품을 구경했다. 그 와중에 마땅한 선물을 찾을 수 없었다.
정작 그를 도와주러 온 신새벽은…….
“우와! 이 모피 멋지지 않아?”
“이 다이아몬드 목걸이 죽이는데?”
“이거 신상이야! 강남 아줌마들 눈이 돌아간다는!”
가는 곳마다 물건을 뜯어보면서 감탄사만 연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물건이 차도도에게 줄 선물이 아닌 그녀의 사심이 가득한 상품이라는 점이 문제다.
“이걸 어떻게 선물해요?”
“선물? 아! 그렇지! 이건 고등학생이 선생님에게 할 선물이 아니지.”
그렇게 다니다 보니 다리만 아프다.
강우는 지난겨울에 자신이 받은 선물을 떠올렸다. 2월의 마지막 날에 차도도와 신새벽은 힘을 합쳐 그에게 옷을 선물했다. 편하게 입고 다닐 수 있는 티와 바지였다. 꽤 실용적이었고 두 사람의 눈썰미가 워낙 좋아서 강우도 만족했다.
강우도 차도도에게 괜찮은 선물을 하고 싶어 신새벽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지금 하는 행동을 보니 오히려 방해만 된다.
“그냥 콱 돌려보내 버릴까…….”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자니 신새벽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너! 내 눈을 못 믿나 본데…….”
“믿을 사람이 따로 있죠.”
“야! 그래도 왕년에 내가…….”
“내가 뭐요?”
“시력이 2.0이었다고!”
신새벽도 자신의 말이 어처구니가 없었던 듯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강우도 한없이 약해졌다.
그래도 강우와 달리 신새벽은 계획이 있었나 보다.
“강우야! 내가 보니까 저기 3층에…… 그게 제일 낫더라.”
신새벽이 그를 끌고 3층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에는 젊은 여성에게 적합한 브랜드 패션이 진열되어 있었다.
“옷요?”
“그래, 내 나이 또래면 옷에 한창 관심이 많을 때잖아? 너도 옷을 받았으니까 옷으로 선물하는 게 좋아.”
차도도와 신새벽이 같은 나이란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다시 고민해봐도 옷이 제일 실용적이다. 다만 강우는 옷에 대해 아는 게 없다. 특히 여성 옷은 더더욱 모른다.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 강우를 신새벽이 인도했다.
“나만 믿어.”
몇 군데 브랜드를 전전하더니 한 곳에 딱 멈췄다.
“강우야? 저 옷 어때?”
한쪽에 예쁘장한 원피스가 딱 걸려 있었다. 연하늘색과 연분홍색의 두 원피스가 세트처럼 나란히 눈길을 끌었다.
보기에는 무척 예쁘고 고급스러운데…….
“조금…… 짧아 보이지 않아요?”
“차도도 쌤이 키가 크잖아? 저 옷을 입으면 잘 어울릴 것 같아.”
머릿속으로 차도도가 입은 모습을 상상해봤다. 예쁜 사람이니 무엇을 입어도 예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림이 예쁘게 그려졌다. 역시 그와 달리 신새벽은 보는 눈이 있다. 선물로서 꽤 괜찮은 선택이다.
“저거로 해. 차 쌤은…… 하늘색이 맞을 거야.”
차도도의 분위기로 보면 분홍색보다 하늘색이다.
“다른 걸 찾아봐도 되긴 한데…….”
주위를 휘휘 둘러보는 신새벽의 행동에 강우는 후다닥 결정했다. 매장을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다리가 아파서 결심이 빨라졌다.
“저 옷으로 주세요.”
예상외로 가격이 제법 나간다. 그래도 매달 연구비를 받으니 돈 부담은 없어 다행이다.
“포장해드릴까요?”
“선물 포장도 해줘요?”
가능하단다. 원피스를 예쁜 박스에 넣고 맵시 리본까지 달아 포장했다.
이로써 차도도 생일선물 준비를 완료했다.
막 떠나려는데 신새벽이 그를 붙잡았다.
“강우야? 내꺼는?”
“네? 쌤은…… 생일이 아직…….”
“생일선물을 당겨서 주면 안 될까?”
아무래도 신새벽의 술수에 말려든 기분이다. 어쩐지 돌아보지도 않고 곧바로 적합한 매장으로 직행하더라니. 차도도에게 맞는 선물이 아니라 본인의 욕심이 든 선물이었나 보다.
“그럼 10월에는 선물 없어요!”
“그래, 이거면 충분해.”
“뭔데요?”
생일선물을 사러 돌아다니려면 고역이기에 오늘 한 번에 다 처리할 수 있다면 환영이다.
신새벽이 하나 남은 연분홍색 원피스를 가리켰다.
갑자기 기분이 싸해진다.
똑같은, 색상만 다른 옷을 선물하면 차도도의 기분이 나쁘려나? 두 사람이 같은 옷을 입고 만날 일은 없으리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솔직히 이런 분야에서는 그는 천재가 아닌 둔재였다.
“쌤? 근데 입을 수 있어요?”
“왜? 내가 소화 못 할까 봐?”
“그건 아니고…….”
연분홍색 원피스를 차도도의 선물과 똑같이 포장해서 신새벽에게도 안겼다.
“득템!”
신새벽이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함박웃음을 짓는 그녀를 보니 그도 기분이 좋았지만…….
학생 신분에 오늘 지출은 너무 심했다. 옷이 왜 이리 비싼지.
* * *
차도도는 온종일 정신이 없었다.
오늘은 5월 4일 목요일이고, 내일은 어린이날에 그다음은 휴일이라 긴 연휴가 시작이다. 평소라면 휴일 전날이니 기분이 즐거워야 하는데 정작 그녀의 마음은 불안에, 초조함에, 긴장에…… 엉망이었다.
어떻게 수업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아무 생각 없이 EBS 교재 문제풀이를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었다.
그나마 3학년 수업이라 다행이었다. 3학년 수업은 기계적으로 가르쳐도 표시가 나지 않으니까. EBS 위주 수업이 이럴 때는 큰 도움이 된다. 만일 고급 물리 수업이었다면 오늘처럼 혼란한 정신으로는 엉망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간신히 수업을 끝내고 교무실로 돌아온 차도도는 꺼놓았던 휴대폰을 켰다.
톡과 메시지가 우르르 쏟아졌다.
- 준비는 잘했니?
- 오늘 꼭 참석해야 한다. 늦지 않도록 해라.
- 우리 쪽 인원 셋, 저쪽 인원도 셋이다.
- 맞선이니 예의를 차려야 해.
어머니에게서 날아온 메시지다.
마도환과의 맞선이 정해졌다. 그녀의 거부는 통하지 않았다. 체면을 중시하는 집안이라 예의를 차리라는 말만 계속 들었다. 정말 싫으면 나중에 거절해도 된다고.
하필이면 그 맞선 자리가 오늘이었다.
애초에는 내일 어린이날로 정했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일이라고 거부했다. 투쟁의 결과로 간신히 생일을 피했다. 그 덕에 하루 전날인 5월 4일 저녁으로 잡혔다.
오늘 저녁 양쪽 집안이 부모 동반으로 만나 선을 본다. 서로 통하면 곧바로 약혼까지 하겠다나?
차도도에게는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부모와 연을 끊지 않으려면 그녀는 맞선을 보지 않을 수 없고 부모님의 체면을 세워주려면 최소한 오늘 하루는 순순히 응해야 했다.
“하아아…….”
곤란한 처지에 한숨이 쏟아졌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발생할 줄 알고 있었으나 하필이면 그 상대가 마도환일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여기까지 온 과정을 돌이켜보면 마도환의 마수에 빠진 게 확실했다. 그녀를 이렇게 몰아붙였다는 것만으로도 마도환은 참 똑똑한 사람이자 무서운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었다.
“어쨌든…… 오늘은 적당히 예의를 차리고 나중에 싫다고 통보하자.”
상대가 한국대 교수여도 명분은 충분하다. 그녀 타입이 아니고 남자의 나이가 너무 많다고 우기면 된다. 그래도 압력이 들어오면 그때 가서 처리하고.
차도도는 자신의 옷매무시를 점검했다.
맞선이라고 평소와 달리 우아한 옷을 입었다. 격식을 갖춘 치마 정장 스타일.
보통 사람은 구분하지 못해도 알 만한 사람이라면 지금 그녀가 걸친 옷이 얼마나 비싼 명품인지 안다. 그녀 집안의 위상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다.
학교를 떠나면서 그녀는 톡을 확인했다.
강우에게서 온 톡이 다수다.
- 애제자 강우 : 쌤? 내일 어떡해요?
- 애제자 강우 : 어디에서 만나요? 몇 시에?
- 애제자 강우 : 쌤? 바쁘세요? 그럼 내일 약속 시간만 알려줘요.
계속 톡을 씹을 수는 없다. 그런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 저녁에 맞선을 보니 내일은 시간이 비어있다. 그래도 차마 지금 생일 약속을 잡기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고민하던 그녀는 휴대폰을 닫았다. 답장은 내일 보내기로 했다. 오늘 닥친 일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니까.
* * *
저녁 식사 후 강우는 상담실에서 하은찬과 유혜림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쩌다 신새벽에게 두 후배 녀석을 떠맡은 뒤로 자주 핵융합 강의를 하게 됐다. 두 사람이 빨리 궤도에 올라서 신새벽과 연구하기를 원하기에 최근에는 이 두 녀석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의 졸업과 유학 시기를 고려하면 이들에게 남은 시간은 불과 일 년 정도. 그렇기에 시간이 빠듯하다.
“자, 오늘 내용은 이해하지?”
“네. 그런데…… 수식이 너무 어려워요.”
유혜림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수학적 기반이 부족한 그녀에게 지금 강우가 가르친 수식은 너무 고차원이다. 대학 교양 수학을 당연히 넘고 물리를 전공한 대학원생이어도 머리를 싸매는 수식이기에 그 어려움이 당연하다.
“하다 보면 익숙해질 거야. 모르면 은찬이한테 물어보고.”
“얘도 모를걸요?”
“내가 왜 몰라. 너보다 수학 잘하거든?”
여기에서 다루는 수학은 미적분의 심화 내용이어서 수학경시와는 상관없다. 그래서 실제로는 하은찬도 쉽지 않다.
강우도 참고서적을 챙기면서 말했다.
“그럼 이만 가렴. 오늘은 집에 가지?”
“네, 내일부터 휴일이니까요.”
연휴 때는 대부분이 집에 돌아가고 기숙사가 텅 빈다.
“형은 내일 뭐 해요?”
“나? 기숙사에서 자야지.”
“놀이공원 안 가고요?”
“내가 애냐?”
“전 조카랑 같이 갈 건데.”
하은찬의 자랑에 강우는 얼른 가라고 손을 저었다.
둘을 보내놓고 강우는 휴대폰을 열었다.
차도도는 여전히 답장이 없다. 톡을 읽고도 답을 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수업이 끝났을 시간이어서 전화를 걸어보았다. 예상과 달리 받지 않았다.
이런 적이 없었기에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