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2화 맞선 (2)
급히 상담실을 나서는 강우를 신새벽이 붙잡았다.
“아직 안 갔어?”
“은찬이랑 혜림이 가르쳤어요.”
“고생 많네.”
“누구 때문인데요.”
강우가 눈에 힘을 주고 째려보자 신새벽이 미소를 지으며 달랬다.
기분이 별로임을 눈치챈 걸까. 신새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 쌤이랑 약속 잡았어?”
“아뇨.”
“차 쌤 생일 내일 아냐?”
“근데 답이 없어요.”
“어? 이상한데?”
신새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민에 잠긴 그녀를 보니 뭔가 아는 눈치였다.
강우는 신새벽을 막아서서 다그쳤다.
“뭐가 이상한데요?”
“음, 오늘 너희 선생님이…… 꽤 예쁘게 차려입고 왔거든?”
“우리 쌤이야 원래 예쁘잖아요?”
“어휴, 그런 말이 아니라…….”
신새벽이 오늘 본 차도도의 남다른 모습을 설명했다.
3학년이 된 후 문제가 생겼다.
차도도는 B동이 아닌, 3학년 교무실이 있는 A동에 머물고 강우는 수업 시간을 제외하면 여전히 B동을 배회해서 만나는 시간이 팍 줄었다. 작년에는 B동 상담실에 오면 항상 만날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이 상담실에 차도도가 오지 않는다.
오늘도 차도도를 전혀 보지 못했다. 차도도를 만났다면 바로 약속을 잡았을 것이다.
“옷차림새로 보면 오늘 뭔가 있는 눈치였는데? 난 너랑 생일파티 하느라 그렇게 차려입은 줄 알았지.”
“생일은 내일이라니까요.”
“하루 당겨 할 수도 있잖아?”
“으이그! 쌤!”
고민해봐도 무슨 일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바쁜 일이 있으신가 보죠.”
“그래도 톡이 안되고 전화도 안 받으면…… 그거 좀 이상한데?”
“전 먼저 갈게요.”
기분이 언짢아진 강우는 신새벽을 내버려 두고 혼자서 기숙사로 떠났다.
* * *
평소라면 모두가 기숙사를 비운 이런 날에도 세미나실에서 공부했었다. 오늘은 기분이 별로라서 강우는 바로 기숙사로 왔다.
집에 갔을 리는 없는 최대우는 아직 자습실에 있나 보다.
오늘도 꿋꿋하게 공부하는 최대우가 부러웠다.
평소라면 그도 세미나실에서 연구에 몰두했을 텐데 차도도의 생일을 떠올리니 도무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
작년에는 생일을 몰랐던 그를 오히려 차도도가 불러냈었는데. 작년에 함께 다녀온 칠갑산과 출렁다리가 떠올랐다. 그날 차도도는 봄빛에 물들어 정말 예뻤었다.
방 한쪽 구석에 모셔놓은 생일선물이 눈에 들어왔다. 곱게 포장된 선물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기껏 준비했더니…….”
선물이야 뒤늦게라도 전달하면 된다지만…….
여전히 차도도는 답장이 없다.
마음이 싱숭생숭 떠돌자 강우는 노트북을 켜고 물리 블로그로 들어갔다.
오늘도 최대우, 애나, 몽상가 세 사람이 한 주제를 놓고 티격태격 토론 중이다.
“몽상가, 이 사람 대체 누구야? 대우가 밀리다니…….”
최대우는 올해 물리 올림피아드 최고 에이스다. 그런 녀석을 토론에서 앞서는 애나도 대단하기는 마찬가지. 따지고 보면 애나 역시 작년에 올림피아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런데 몽상가는…….
강우는 팔을 걷어붙였다.
“오늘 몽상가를 눌러주마!”
강우는 차도도를 향한 분노를 블로그에 풀었다.
순식간에 토론장이 격파됐다. 그의 날카로운 공격에 애나도 몽상가도 나가떨어졌다.
“어딜 까불고 있어…….”
여전히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 * *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맞선을 진행했다.
미쉐린 스타 셰프가 제공하는 고급 프랑스 요리가 식탁에 차려졌으나 차도도는 전혀 입맛을 느끼지 못했다.
평생 오늘처럼 불편한 자리는 처음이었다.
그녀 쪽 테이블에는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앉아 있었고 반대편에는 마도환과 그 부모들이 자리했다.
양가 부모의 덕담이 오가는 가운데 그녀는 입을 꾹 닫고 묵묵히 요리만 먹었다.
중간에 마도환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으나 그녀는 일체 무시하고 상대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바람과 달리 저녁 식사 자리는 늦게까지 이어졌다.
마침내 어색한 자리가 끝났을 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만난다죠?”
“하하, 부모가 옆에 붙어 있어서 어색한가 봅니다.”
“옛날이랑은 다르죠. 요즘엔 맞선 첫날에 술도 마시고 그러니까요.”
“아, 여기 좋은 라운지 바가 있더군요. 경치도 좋고. 자리를 옮깁시다.”
부모들이 의기투합해서 라운지 바로 자리를 이동했다.
식사만 하고 도망치려던 차도도의 계획에 제동이 걸리는 순간이었다.
서울 야경을 내려다보는 VIP 좌석에 마도환과 둘이 앉았다.
이번에는 양가 부모는 그들과 멀리 떨어진 다른 테이블에 자리했다. 그 바람에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이제 둘만의 시간이다.
마도환이 주문한 시그니처 칵테일이 배달됐다.
엄청난 가격답게 각종 과일 슬라이스로 화려한 치장을 두르고 잔을 채운 갈색의 술이 영롱하게 빛났다.
“불편하셨죠? 부모님들께선 곧 나가실 겁니다. 이제 편히 드시지요.”
신사의 탈을 쓴 마도환이 그녀를 달랬다.
차도도는 마음을 차분하게 다지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대체 뭐 하는 거죠?”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정식으로 혼담을 넣겠다고요.”
“그렇다고 맞선 자리를…….”
“그만큼 제가 진지하다는 거지요.”
“제가 차성그룹 딸이란 건 어떻게 아셨어요? 뒷조사했나요?”
“유명그룹이니 당연히 압니다. 그만큼 관심 있다고 생각해주시죠.”
능수능란하게 맞받아치는 화술에 차도도는 쉽지 않은 상대임을 깨달았다. 하긴 사회에 나와 이제 4년 차, 그것도 고등학교라는 공간에 갇힌 그녀에게 십여 년을 사회에서 구른 마도환은 버거운 상대가 당연했다.
“드시지요. 이거 꽤 비싼 겁니다. 양주보다 칵테일이 나을 것 같아 주문했습니다.”
“전 사양하겠어요.”
“칵테일은 술이 아니죠.”
차도도는 칵테일을 마신 경험이 없다. 칵테일에 대해선 아는 것도 거의 없었다.
“마 교수님, 그때도 말씀드렸죠? 전 아직 결혼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요. 그런데 이렇게 제 의사를 고려하지도 않고 추진하시면…….”
“괜찮습니다. 결혼을 늦춰도 상관없죠. 약혼이라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말이 통하지 않자 차도도는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이 자리를 끝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 걸까. 마도환이 빙그레 웃으며 칵테일을 쭉 들이켰다.
“만나보시면 저도 괜찮은 놈입니다. 오늘 바로 선을 긋지 마시고요. 저에게도 기회를 주시죠. 아니, 적어도 오늘은 양가 부모님에게 잘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차도도 선생님도 그러실 필요가 있을 텐데요.”
마도환이 그녀의 약점을 찔러왔다.
체면을 중요시하는 부모 때문에 차도도는 자리를 바로 박차고 나갈 수 없었다. 싫다고 거절하더라도 최소한 오늘 하루는 상대를 진지하게 만났다고 대답해야 한다.
그래도 마도환이 사회 엘리트층이니 말이 통하리라 여긴 그녀는 마음을 안정시키며 자리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렇게 하죠.”
“그럼 저는 술을 더 시켜도 되겠습니까? 이미 다 비워서요.”
그녀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마도환은 벌써 잔을 비웠다.
“좋을 대로 하세요.”
마도환이 위스키를 주문했다.
위스키에 얼음과 워터를 섞어 잔을 흔들자 달그락 소리가 났다.
“위스키는 향과 맛이 일품이죠. 드시겠습니까?”
“아뇨.”
“그럼 저 혼자 마시지요. 차 선생님도 편히 칵테일을……. 이 밤은 깁니다.”
차도도는 전의를 불태우며 칵테일을 맛봤다. 쓰고 단 오묘한 칵테일 맛이 혀를 자극했다. 보통 술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다시 마도환과 날카로운 대화가 이어졌다. 차도도는 이 시간이 언제 끝날지 시계만 바라봤다.
* * *
- 신새벽 쌤 : 연락됐어?
- 강우 : 아뇨.
점호가 끝나고 최대우도 침대에 누운 시각. 신새벽의 톡이 날아왔다.
- 신새벽 쌤 : 너 혹시 차 쌤이랑 싸웠니?
- 강우 : 제가 싸울 급이라도 되나요?
- 신새벽 쌤 : 근데 나랑은 왜 싸워?
- 강우 : 쌤은 대학원생이잖아요. 난 교수. ㅋㅋㅋ.
- 신새벽 쌤 : 어휴. 화남(이모티콘).
밤 12시가 넘어가는데도 연락이 되지 않으니 강우는 점점 불안해졌다.
낮에 잘 차려입고 있었다니 일이 있는 게 분명한데……. 집안 행사일까? 단순한 집안 행사라면 그의 전화를 거부할 일이 없지 않을까.
12시가 지났으니 엄밀하게 따지면 차도도의 생일날이다.
- 강우 : 쌤? 최근에 차 쌤에게서 특별한 조짐 있었어요?
- 신새벽 쌤 : 글세, 요즘 조금 불안해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 강우 : 어휴. 잘 생각해보세요.
- 신새벽 쌤 : 아! 생각났다. 엊그제인가? 차 쌤이 주임 쌤에게 마도환 교수에 관해 물었다고 하더라.
- 강우 : 새삼스럽게 김윤택 쌤을 왜요?
- 신새벽 쌤 : 난 모르지.
갑자기 싸늘한 기운이 머리를 휘감았다.
차도도도 마도환을 아는 만큼 새삼 물어볼 일은 없을 텐데? 마도환과 무슨 일이 있나?
불길한 기분이 든 강우는 얼른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마도환 연락처가 있어도 이 밤에 그가 바로 전화할 수는 없다. 차도도 선생님과 일이 있냐고 물어봐야 가르쳐 줄 사람도 아니고.
지금 그에게 마도환과 접점이 형성된 유일한 사람이 있다. 바로 마도환의 박사과정 대학원생인 김상원이다. 일전에 겨울학교에서 한국대 실험실에 갔을 때 전화번호를 받았었다.
시간이 늦었으나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대학원생이라면 학교 실험실에 있거나 연구에 몰두할 시각이니 상관없나.
다행히 금방 전화가 연결됐다.
“형? 저 누군지 아세요?”
- 누구지?
역시 모른다.
“강우라고요. 예전에 실험실 탐방 갔을 때…….”
- 아! 강우? 너 요즘 유명하더라? 헌팅턴과 프로젝트 한다며? 우리 교수님이 자주 말씀하시는데…….
다행히 금방 말이 통했다.
연구와 관련해서 가볍게 말을 주고받다가 강우는 슬쩍 물었다.
“혹시…… 오늘 마도환 교수님 어디 계신지 아세요?”
- 교수님? 당연히 알지. 내가 담당하니까.
“어디 계신데요?”
- 어…… 근데 그걸 왜 네가 관심을 가지니?
대답할 말이 막혔다. 대답으로 봐서는 마도환이 퇴근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게 차도도와 관련이 있으려나? 그런데 어떻게 입을 열게 하지?
강우의 머리가 어지럽게 회전했다.
“에이, 저도 핵융합을 연구하잖아요? 하다 보니 갑자기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 교수님께 여쭤보려고요.”
- 이 밤에?
“제가 궁금한 걸 못 참는 성격이라…….”
- 그건 알겠는데, 교수님 행적은 극비인데.
“별게 다 극비…….”
- 오늘은 극비 맞아. 내가 예약했거든.
대학원생을 하인처럼 굴리는 교수이니 당연히 그러리라 예상했다. 강우는 마음이 급해졌다.
“형? 그래도 제가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실은 사람이잖아요? 앞으로 제가 자주 도와드릴 테니까…….”
- 아! 그렇지! 네가 날 도와주면 땡큐지!
마도환에게서 고생하는 줄 알기에 떡밥을 던졌더니 바로 물었다. 마도환의 대학원생을 스파이 삼아 인연을 만들어 두면 나쁘지 않다.
“그래서 마 교수님이 지금 어디 계신데요?”
- 오늘 마 교수님이 맞선을 보셨거든?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동시에 강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갑자기 맞선은 왜요?”
- 결혼 계획이 있으신가 보더라.
“어디서요?”
- 강남 테헤란로에 S호텔이라고 있잖아? 거기 레스토랑에서 저녁 8시에 가족 모임을 예약했고 그 호텔에 객실도 하나 잡았어. 근데 웬만하면 교수님 방해하지 마라. 우리 교수님도 장가가야지 않겠니? 아마 지금쯤 그 객실에 계시겠지? 호실 번호가 3802…….
강우는 고맙다고 인사 후 전화를 끊었다.
S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