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3화 맞선 (3)
곧바로 신새벽에게 연락했다.
늦은 밤이고 상황이 상황인 만큼 신새벽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백번 유리했다.
기숙사 탈출은 어렵지 않았다. 예전에 천체관측을 빌미로 야간 출입을 가능하게 해둔 것이 이번에도 주효했다.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신새벽이 애마인 하얀 세단을 몰고 나타났다.
그녀도 급히 나오느라 흰 체육복을 대충 걸친 차림이었다.
“후아! 야간에 운전하려니 살 떨려서…….”
운전 초보는 어쩔 수 없다.
강우가 대신 운전석에 앉았다.
“어떻게 된 거야? 차 쌤 위치는 파악했어?”
“대충요. 쌤은 따라만 오시면 돼요.”
“지금 어디에 있는데?”
“S호텔이요.”
“멀지는 않네. 응? 호텔?”
신새벽이 놀라서 그를 다시 쳐다봤다.
강우는 차도도에게 줄 선물을 뒷좌석에 놓았다.
“저건 왜 가져왔는데?”
“오늘이 생일이니 드려야죠.”
“이야! 호텔에서?”
놀리는 신새벽에게 굳이 대꾸할 필요는 없었다.
길이 막히지 않아 차는 빠르게 움직였다.
다른 차를 휙휙 추월하면서 강우는 난폭하다 싶을 정도로 급히 차를 몰았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현재 상황을 재구성했다.
지금 차도도가 있는 곳은 어디일까? 예약을 확인해보면 마도환은 호텔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저녁 식사 후에도 S호텔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은…… 객실이거나 객실이 아니면 호텔 내 술집이거나.
이미 집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 그게 가장 좋은 상황이긴 한데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으니 그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 * *
차도도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술이 약한 그녀는 이것이 술에 취한 현상임을 금방 깨달았다.
칵테일의 향과 맛이 독특해서 조금 마셨더니 잠시 후부터 이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얼른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평소 술 마시던 경험을 고려하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한 그녀는 떠나려 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죠. 전 아직 술이 많이 남아서 말입니다.”
마도환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위스키 잔을 손으로 빙글 돌렸다.
“시간이 늦었는데요?”
“내일은 휴일이잖습니까?”
“요즘 바빠서…….”
“핵융합 연구하느라 물론 바쁘시겠지만…….”
마도환 앞에 놓인 위스키병을 보니 아직 술이 가득했다. 설마 저 많은 술을 다 마실 생각은 아니겠지.
그녀가 상대의 술병을 힐끔거리고 있자니 마도환이 술을 건넸다.
“위스키 드셔보셨습니까? 맛이 독특합니다.”
“제 칵테일도 남았어요.”
차도도는 칵테일 잔을 들어 올렸다. 칵테일이 이미 절반 이상 사라지고 없었다.
이 정도면 예의를 충분히 차렸다. 욕먹지 않을 만큼 상대해줬으니 돌아가서 적당히 퇴짜 놓으면 된다.
경계심을 놓지 않아서일까. 아직은 정신이 말짱하고 몸도 이상이 없었다. 와인도 한두 잔은 괜찮았으니까 칵테일도…….
차도도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술에 취하지 않은 것처럼 연기했다.
“술이란 게 말이죠. 특히 이런 위스키 종류는…….”
마도환이 뜬금없이 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얼른 마도환이 술자리를 끝내기를 바라면서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칵테일을 조금씩 홀짝였다.
* * *
호텔 로비에 도착한 강우는 데스크에서 신새벽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네이비색 정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호텔 직원이 두 사람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린 남학생과 젊은 여자. 강우가 보기에도 이상한 조합이긴 하다.
“저…… 3802호 객실에 연락 가능할까요?”
“3802호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분이 한국대 교수님이신데……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요.”
“휴대폰으로 전화해보시면 어떨까요?”
“전화를 안 받으시네요.”
직원이 시계를 확인했다. 자정을 넘은 시각이라 찜찜한 표정이다.
“정말 중요한 일이거든요.”
다시 신새벽이 재촉했다.
강우는 옆에서 신새벽을 응원했다.
‘잘한다! 신새벽!’
고민하던 직원이 객실로 인터폰을 넣었다.
잠시 후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객실에 안 계신 듯합니다. 응답이 없네요.”
강우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데스크를 물러나며 신새벽이 강우를 툭 건드렸다.
“너, 너무 표시 난다.”
“뭐가요?”
“차 쌤 걱정하는 게.”
그런가? 본인의 표정을 보지 못하니 인정하기 쉽지 않아도 어쨌든.
강우는 호텔 편의시설을 쭉 확인했다.
“지금부터 이곳을 다 뒤져볼 거예요.”
“이 많은걸?”
“몇 개 안 돼요. 늦은 시각이라. 특히 술집 위주.”
강우가 먼저 움직이고 신새벽이 바로 뒤를 따랐다.
* * *
라운지 바.
광고판을 보는 순간 강우는 이곳이라는 직감이 왔다.
마도환의 성향이라면 맞선을 본 여자를 데리고 가기에 이보다 더 나은 곳은 없다. 서울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로맨틱한 분위기와 다소 어둑어둑한 바의 분위기. 여자에게 작업 걸기 딱 좋은 장소다.
입구에서 강우는 신새벽에게 눈짓했다.
“확인해보세요.”
신새벽이 오만상을 찌푸리고는 그를 째려보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강우가 직접 들어갈 수는 없다. 그는 밖에서 초조한 심정으로 신새벽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렇게 찾던 차도도가 드디어 눈에 보였다.
신새벽이 옆에서 붙잡고 있긴 했으나 비교적 꼿꼿하게 몸을 세우고 조금은 휘청거리면서 밖으로 나왔다. 다행스럽게도 멀쩡했다.
차도도에게 반갑게 인사하려니 그 뒤로 마도환이 급하게 따라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차 선생님!”
얼마나 급했는지 소리마저 지른다.
강우는 곧바로 마도환의 앞을 막아섰다.
“넌 뭐야? 어? 가, 강우?”
그제야 누군지 알아차린 모양이다.
“마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네 녀석이 이 밤에…….”
마도환이 차도도와 신새벽과 강우를 번갈아 쳐다봤다.
강우는 매서운 눈으로 마도환을 노려봤다. 굳이 자잘한 변명은 불필요하다. 이 순간에 물러나면 차도도를 지킬 자격이 없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강우를 향해 마도환이 짜증이 난 기색으로 고개를 저으며 한발 물러나는 순간이었다.
신새벽이 곧바로 가세했다.
“차 선생님은 우리가 데려가겠습니다.”
강우는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마땅한 변명을 찾지 못한 마도환이 씩씩대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신새벽이 차도도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다음에 뵙지요.”
강우는 마도환을 내버려 두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자 갑자기 차도도가 축 늘어지며 휘청거려서 강우도 옆에서 부축해야 했다.
“쌤이 왜 이래요?”
“갔어.”
“네?”
“술에 취했다고.”
“조금 전엔 멀쩡해 보이던데…….”
“들어갔을 때는 도도가 똑바로 앉아 있었어. 그런데 데리고 나오는데 점점 체중이 실리는 게…… 애가 점점 상태가 나빠지네.”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지금까지 정신력으로 버티다가 신새벽을 확인하는 순간 마음을 놓으면서 정신이 풀려버린 것이다. 화가 나면서도 그녀가 안전하니 무엇보다 기뻤다.
엘리베이터가 주차장에 도착했다.
강우는 신새벽과 양쪽에서 차도도를 부축하고 차로 향했다.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차도도는 전형적인 술 취한 사람 그대로였다. 불과 몇 분 사이에 정상 상태에서 술에 취해 필름이 끊어진 모습이다.
뒷좌석에 태운 차도도를 신새벽에게 맡기고 강우는 조용히 차를 몰았다. 한밤의 차도도 구하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 * *
차도도의 아파트에 들어서니 고향에 온 기분이다.
신새벽이 차도도의 신발을 벗기고 강우는 그녀를 부축해서 거실로 들어섰다. 가져온 차도도 생일선물도 거실에 대충 던져두었다.
“아예 위층으로 데리고 올라가. 바로 재워야지.”
차도도는 전혀 의식이 없었다.
부축해서 올라갈 수 없는 계단이라 강우는 차도도를 공주님처럼 안았다.
기분 탓인지 전혀 무겁지 않았다.
“얼마나 마셨을까요?”
“거의 안 먹었을걸?”
차도도의 주량을 아는 신새벽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칵테일 한잔이 전부라고 짐작했다.
칵테일은 제조 방법에 따라 알콜 도수가 제각각이다. 게다가 향과 맛이 강해서 쉽게 도수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칵테일 경험이 없는 차도도라면 충분히 혼란을 일으킬 상황이다.
“어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생님께서 너무 무리하셨어요.”
“마도환 교수는 그래도 꽤 신사적인 이미지 아니야?”
“아닐걸요.”
갸웃거리는 신새벽을 앞지른 강우는 고개를 저으며 위층 침실로 올라갔다.
이곳에 수십 번도 넘게 왔었어도 차도도의 침실에 발을 들여놓기는 처음이다.
아기자기한 사진과 그림으로 장식한 벽과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 넓은 침대와 파스텔톤의 이불까지. 그녀답게 꾸민 방 풍경이다.
강우는 침대에 차도도를 눕혔다.
맞선에 나갔던 정장 옷을 걸친 그대로 두 팔과 다리를 쭉 뻗은 채 차도도가 누워 있었다.
강우는 그 모습을 한참 들여다봤다. 별별 상념이 머리를 채운다.
“후우.”
피곤함이 몰려온다. 어느새 올라온 신새벽이 어깨를 툭툭 쳤다.
“고생했어. 좀 무겁지?”
“아뇨, 가벼웠어요.”
“에이, 거짓말하기는. 어쨌든 침대에는 눕혔고 옷을 갈아입혀야 하나?”
새삼 차도도가 입은 정장이 불편해 보였다.
“전 내려가 있을게요. 선생님이 갈아입혀 주세요.”
“그래 내가 수고해야지 어쩌겠니?”
신새벽의 한탄을 들으며 강우는 몸을 돌렸다.
* * *
거실로 내려가려던 강우는 옆 방인 서재로 들어갔다.
그의 집처럼 애용했던 공간이다.
서재 풍경은 평소와 같았다. 한쪽에 수식이 낙서처럼 적힌 투명 보드와 벽을 가득 채운 책장들. 한가운데 떡 버틴 커다란 탁자와 의자. 탁자 위에는 각종 책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
강우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깊은숨을 쉬었다.
걱정했던 걸까? 일을 끝내고 나니 온몸이 축 늘어졌다. 그만큼 신경이 쓰였다는 증거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냈다.
눈앞에 두꺼운 책이 보였다.
뉴클리어 퓨전. 핵융합 기본 원서다. 핵융합 연구를 시작한 후로 차도도가 손에서 떼지 않던 책이다. 강우도 한때 열심히 공부했던 기본서이기도 했다.
반가운 마음에 강우는 책을 폈다. 영어로 가득한 페이지가 눈에 들어왔다.
하릴없이 책을 뒤적였다. 당연히 책의 내용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장 뒷장을 펼쳤을 때 익숙한 필체의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 이는 엠씨제곱(E=mc²).
언젠가 차도도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대답했던 수식이다. 바로 핵융합을 대표하는, 질량과 에너지의 관계를 서술한 법칙.
그 수식이 차도도의 고운 필체로 책 가장 뒤 페이지에 낙서가 되어있었다.
수식을 보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차올랐다.
그녀도 그와 같은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였다.
그녀의 마음에 호응하고 그의 마음 또한 전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가 항상 그녀 옆에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
“그럼 나도…….”
이심전심이다. 강우도 펜을 찾아 그 옆에 썼다.
- 이는 엠씨제곱(E=mc²).
필체가 다른, 같은 두 식이 나란히 서명처럼 뒷장을 장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