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맞선 (4)
“자기 편하게 갈아입혔고…… 넌 어떻게 할 거니?”
서재로 건너온 신새벽이 그에게 물었다.
상념에서 깨어난 강우는 멍한 표정으로 신새벽을 쳐다봤다.
“저도 갈까요?”
“기숙사로 가야 하잖아? 어? 너 기숙사 어떻게 빠져나왔어?”
“그야 수가 있죠. 개구멍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뒤늦게 의문을 가지는 신새벽이 황당했으나 강우는 적당히 둘러댔다.
“기숙사 들어갈 수 있니?”
“들어가기엔 시간이 너무 늦어서…….”
굳이 가려면 갈 수 있어도 거기보다는 차라리 여기가 마음이 편하다.
잠시 고민에 잠기던 신새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여기에 있어. 혹시 밤에 차 쌤이 깨어나서 물 찾으면 얼른 갖다 줘. 괜히 술 취한 채로 계단 내려오다가 굴러떨어질라.”
“알았어요.”
신새벽이 거실로 내려가서 떠날 준비를 했다.
현관을 나서면서 그녀가 다시 당부했다.
“차 쌤, 잘 돌봐야 해.”
“네.”
거실에 홀로 남자 평화가 찾아온 기분이다.
낮부터 차도도와 연락이 되지 않아 노심초사했던 사건이 이제야 끝났다.
강우는 소파에 쓰러지듯 앉아서 안정을 되찾았다.
소파 탁자에 그가 준비한, 눈앞에 리본을 단 생일선물이 보였다.
“어쨌든 고생한 보람이 있어.”
마도환의 마수에 빠질 뻔했던 그녀를 구해 돌아왔다.
평소처럼 1층의 침실에 들어가 자리를 펴고 눈을 감았다. 피곤했던 탓인지 강우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 * *
아침이 되었을 때 차도도는 눈을 떴다.
익숙한 주변 광경에 평소처럼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가 띵한 데다 온몸이 축축 처졌다.
그제야 어젯밤 기억이 났다.
라운지 바에서 마도환과 술을 마셨다. 홀짝거리며 조심스럽게 칵테일을 맛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취기를 느꼈다. 위험을 느꼈었다.
그래도 정신을 붙들어 매고 결사적으로 허리에 힘주고 있었는데…….
신새벽을 본 기억이 난다. 강우를 본 기억도 나고 마도환과 헤어진 기억도. 다만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집으로 왔던 걸까. 신새벽과 강우가 있었으니 당연히 집으로 안전하게 오긴 했을 텐데.
차도도는 이불을 걷으며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
입고 나갔던 정장은 한쪽 벽에 걸려 있고 자신은 편안한 체육복을 걸치고 있다.
정상이었다면 제대로 잠옷을 입었을 텐데 왜 체육복을 입고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누군가가 갈아입혔다는 건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에 차도도는 안면을 찡그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술 때문인지 목이 말랐다.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군가가 있다.
냉장고 앞에서 물을 꺼내 마시는 사람을 확인한 차도도는 깜짝 놀랐다.
“강우?”
어젯밤에 얼핏 본 기억은 나는데 이 녀석이 왜 아직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 이 순간의 마주침은 그야말로 당황 그 자체였다.
“어? 쌤! 몸은 괜찮으세요?”
강우가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 얼굴이 반가우면서도 괜히 쑥스러웠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에이, 기억 안 나세요? 어제 제가 쌤 찾는다고 삼만리를 다 헤맸는데.”
“네가 나를 데려왔어?”
“쌤이 라운지 바를 떠난 후부터 인사불성이더라고요.”
차도도는 라운지 바를 떠올렸다. 그곳에서 마도환과 술을 마셨고…… 강우의 말대로라면 그곳에서 마도환과 헤어졌다는 뜻이니 적어도 마도환에게 곤란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서?”
“제가 여기까지 데려왔죠.”
이 순간 차도도는 자신의 행적을 강우가 어떻게 알았는지 논리적인 추론을 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강우가 그녀를 여기까지 데려와서 침실에 눕혔으며 심지어 옷까지 갈아입혔다는…….
갑자기 사고가 정지하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나가!”
“네?”
“나가라고!”
차도도는 엉겁결에 소파의 쿠션을 던졌다.
쿠션이 강우의 머리에 부딪혔다.
“허억!”
강우의 비명에도 아랑곳없이 차도도는 다시 쿠션을 냅다 던졌다.
“나가!”
“으아악! 알았어요!”
영문도 모르는 채 강우는 쫓기다시피 현관문을 나섰다. 그가 나가는 순간 다시 쿠션이 날아와서 문에 부딪혔다.
강우를 쫓아낸 차도도는 소파에 주저앉듯 쓰러졌다.
“아아, 이게 무슨 꼴이야!”
그녀는 어제 술을 마시고 이런 사태를 자초한 자신이 미워졌다. 앞으로 강우를 무슨 얼굴로 봐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휴대폰으로 톡이 날아왔다.
- 애제자 강우 : 쌤! 쌤! 그게요…….
문자를 보는 순간 차도도는 한쪽으로 휴대폰을 던져버렸다. 지금은 강우라는 글자조차 보기 싫었다.
그녀의 눈에 소파 탁자에 놓인 선물상자가 보였다.
리본을 맨 포장에서 정성이 느껴진다. 그녀는 강우가 주는 생일선물임을 알아챘다. 다만 지금 상황에선 전혀 감동적이지 않았다.
찌뿌둥한 표정으로 선물을 노려보다가 포장지를 뜯었다.
예쁘장한 박스에 연하늘색 옷이 들어있었다.
무엇보다 강우가 준 선물이라 감격했고 스타일도 예쁘고 색상도 마음에 들었지만…….
옷을 꺼낸 차도도는 헛웃음이 나왔다.
“어휴, 이 자식이…….”
옷을 한쪽에 던져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점차 상황 파악이 돌아왔다.
집에 돌아올 때까지 그녀를 부축하던 강우와 그 옆에서 염려하던 신새벽까지.
밤늦게 라운지 바까지 찾아와 준 강우가 고마웠다. 강우가 아니었다면 자칫 낭패를 볼 뻔했기에 감사해야 하는데…….
한순간의 오해로 그런 강우를 다짜고짜 쫓아낸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하고. 대체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쏟아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나? 다시 부르기엔 자존심이 상하는데……. 강우가 다시 돌아오긴 할까.
그녀가 혼란에 잠겨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신새벽이다.
- 일어났어?
* * *
강우는 부근 우동 집에서 눈물의 우동을 삼키고 있었다.
“어휴, 무슨 일이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목이 말라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는데 갑자기 나타난 차도도가 그에게 쿠션을 던지며 쫓아냈다.
집주인이 나가라니 손님 처지에 따질 수도 없어 그는 정신없이 밖으로 나왔을 뿐이다.
배가 고파서 분식집에 들어가 우동을 먹으니 그나마 살 것 같다.
휴대폰을 켜고 톡 창을 노려봤다.
톡을 읽었는데 여전히 답장이 없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지?”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고 차도도를 원망하거나 괜히 꿍해 있을 그는 아니다.
오늘은 놀지 말고 학교에 처박혀 연구하라는 신의 계시인가보다. 다행히 선물을 두고 왔으니 알아서 풀어보겠지.
홀가분한 마음으로 강우는 우동 그릇을 싹싹 비웠다.
분식집을 나서는데 톡이 울렸다.
- 차도도 쌤 : 밥은 집에 와서 먹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쫓아낼 때는 언제고 집에 와서 밥 먹고 가라니?
벌써 우동 먹었는데? 먹기 전에 연락을 줬어야지.
괜히 씩씩대면서 강우는 지하철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굳이 돌아가고 싶지 않다. 학교에서 할 일도 있으니까.
오해가 있으면 다음에 풀자.
지하철로 이동하는 와중에 다시 톡이 왔다.
- 차도도 쌤 : 나 오늘 생일인데 케이크는 줘야지.
문자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강우는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가던 지하철을 되돌릴 방법은 없으니. 답답하면 그녀도 학교로 오겠지. 어린이날이자 생일날 도서관에 처박혀서 함께 열심히 연구에 매진하면 얼마나 좋은 일이야.
평범한 사람들이 들으면 기함할 일이지만 연구에 미친 과학자라면 충분히 납득할 만한 하루다. 아마 차도도라면 충분히 수긍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강우는 과학자가 자신의 천직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대신에 앱에 접속해서 케이크를 선물했다. 이 정도면 뜻이 전해졌을 것이다.
* * *
R&E 시간에 최대우와 손차희, 윤수아에게 연구할 내용을 던져줬다.
예상보다 그들이 연구를 잘 따라와 주었기에 강우도 마음이 편했다. 권유성의 MIT 유학이 확정되었고 이를 목격한 모두가 의욕을 불태웠기에 강우도 훨씬 편해졌다.
최대우는 항성 내부의 핵융합 반응을 연구했고, 윤수아는 플라스마 거동의 수학적 모델을 수치해석 방법으로 풀었으며 손차희는 강우와 함께 핵융합에서 뮤온 입자의 활용법을 분석했다. 여기에 차도도의 연구마저 덧붙이자 강우의 핵융합 연구는 완전히 하나의 팀처럼 움직였다.
마치 대학교 교수가 여러 명의 대학원생을 데리고 연구하는 체제가 갖추어졌다. 모르긴 해도 MIT의 요셉 교수 본진과 비교해도 절대 꿀리지 않을 드림팀이다.
그는 이 팀에 ‘강우 사단’이란 이름을 붙였다. 물론 혼자만이 명명한 이름이다.
시간이 좀 남아서 자신만의 연구를 해치우며 숨을 고르고 있자니 신새벽에게서 전화가 왔다.
- 강우야, 나 좀 볼래?
“어디세요?”
- 학교 정문.
“금방 갈게요.”
강우는 친구들에게 말하고 세미나실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신새벽의 논문심사 날이었다. 졸업 논문심사는 학교별로 다르고 석사, 박사가 다르다, 한국대에서는 석사 논문을 세 번에 걸쳐 심사한다. 그중에 3차인 최종심사는 사실상 심사위원들이 도장을 찍고 수고한 심사 교수들에게 대접하는 날이어서 실제 심사는 1차와 2차가 전부다.
1차 심사는 심사위원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고 해당 대학원생이 그 앞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가장 고된 시간이다.
오늘 신새벽은 그 시간을 통과하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정문에 신새벽의 하얀 세단이 한쪽에 세워져 있었다. 아예 조수석에 타고 있어 그에게 운전하라는 의도가 엿보였다.
강우는 운전석에 앉으며 신새벽을 돌아봤다. 갑자기 가슴이 콱 막혔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흥건했고 눈화장이 왕창 번졌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 데나 갈래?”
일단 시동을 걸고 학교를 벗어났다.
이럴 때는 멀리 드라이브도 나쁘지 않다. 강우는 한강 변을 따라 미사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으흐흑.”
급기야 감정이 격해진 신새벽이 울음을 터트렸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대체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모르겠다. 그의 앞에서 우는 여자도 처음인데 더구나 학교 선생님이다.
남이 보면 오해받기 딱 좋을 지경이다.
시내를 벗어나면서 속도를 늦췄다.
좌측으로 한강 물이 시원하게 보인다. 정작 오른쪽에는 신새벽이 흘린 눈물이 흥건하다.
급하게 달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그래서 묵묵히 앞을 보며 차만 몰았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신새벽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 바람이 신새벽의 설움을 조금씩 날렸다.
달리는 차 안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감정을 진정하는 듯했다.
논문심사에서 가장 열심히 깨지는 때가 1차 심사 때니 상황이 대충 짐작된다.
아마 심사위원인 노창열 그 자식이 문제였겠지. 그래도 박사과정도 아니고 석사과정이니 심하게 다그치며 무안을 주지는 않을 텐데?
이윽고 울음을 삼킨 신새벽이 말을 내뱉었다.
“노창열 그 자식 나쁜 놈이야.”
그 자식이 나쁜 사람이란 건 이미 알기에 새삼스럽지 않다.
강우는 천천히 차를 몰면서 맞장구를 쳤다.
“원래 그런 놈이잖아요.”
“그 자식이 나를 막 까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