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7화 논문심사 (1)
그래서 강우는 논문을 둘로 쪼갰다. 내용의 절반을 저널에 공개하고 나머지 절반은 헌팅턴에 보낼 중간 보고서에만 넣었다.
당연히 헌팅턴사도 이런 방식을 더 좋아했다. 핵융합 핵심기술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면서도 핵융합 학계를 지원한다는 명분도 누릴 수 있고, 또 세계적으로 이 기술을 선도한다는 이미지도 쌓을 수 있어서다.
“저널에 실린 논문만으로는 명확한 연구 결과를 뽑아내기 쉽지 않을 거예요.”
마도환을 의식한 발언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헌팅턴에는 그렇게 많이 공개해도 될까?”
“문제없어요. 헌팅턴은 우리를 저버릴 수 없으니까요.”
“왜?”
“남은 기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해야 하는 이유도 있으나 그 이후가 더 크거든요. 바보가 아닌 이상 이 논문만으로는 실제 개발을 시작했을 때 난관 돌파가 쉽지 않다는 점을 알 거예요. 즉 우리가 아니면 헌팅턴도 답이 없죠.”
차도도도 동의했다.
네 번째 논문에서 강우만큼 수고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안개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지엽적인 부분에서는 충분히 강우와 대등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으나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추진할 수 있는 혜안에서는 강우에게 턱없이 미치지 못했다.
그러니 다른 연구자도 차도도와 마찬가지 기분일 것이다. 논문에 발표한 내용을 이해하더라도 그 이상 어떻게 할지 감을 잡지 못한다.
“그럼 다음 논문은 언제 낼 거야?”
“내년 초에요.”
차도도의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
강우가 졸업할 때쯤이다. 그녀와 강우가 헤어져야 할 시기다. 그날이 다가온다니 차도도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강우가 설명을 계속했다.
“다음 논문은 조금 복잡할 거예요.”
프로젝트 시작 후 1년 반이 되는 때 그가 발표할 논문은 모두 셋이다. 그와 손차희가 하나, 윤수아가 별도로 하나, 최대우가 별도로 하나다. 당연히 차도도와 요셉은 모든 논문에 이름이 들어간다.
이렇게 세 논문을 동시에 발표하는 이유는 헌팅턴사와의 협상 때문이다. 그는 이를 무기로 헌팅턴과 그 이후의 상용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내년 하반기부터는 인류의 꿈이었던 상온핵융합 기술을 드디어 현실화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어마어마한 자금이 투입되고 그 개발이익 또한 상상을 넘어서기에 강우도 쉽게 헌팅턴에 기술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밑그림이 바로 내년 초에 발표할 세 논문이다.
다른 이유도 있다. 고곽천재 친구들이 각자 독자적인 논문 성과를 내야 유학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계획은 아직 그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다.
“난 강우만 믿어.”
차도도는 변함없는 지지를 강조했다. 지금까지처럼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갈 작정이다.
강우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최근 들어 믿는다는 말을 신새벽과 차도도에게 많이 들었다.
간략하게 서로의 감정을 교환하고 강우는 차도도와 다시 잔을 부딪쳤다.
샴페인을 비우고 강우는 한참 차도도를 주시했다.
차도도도 눈을 피하지 않고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이렇게 서로를 바라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어둠이 내린 창밖에는 도심의 밝은 불빛이 백사장의 모래처럼 반짝였다.
“벌써 이 년 반이 지났네.”
차도도는 강우를 만난 때를 회상했다.
처음 봤을 때 중학생 티가 나던 어린 학생이 지금은 어엿한 성인으로 탈바꿈했다. 아직 고등학생 신분인데도 그녀에게는 학생으로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스승과 제자가 아닌 대학원생과 교수가 더 적합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최소한 같은 연구를 하는 동료 연구자이거나.
차도도는 그때의 오해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차마 드러내지 못했다. 선생님이란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때는…… 미안했어.”
“뭐가요?”
강우의 퉁명스러운 반응에 차도도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마 교수와 맞선이…… 네가 마 교수를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런데 그게 내 뜻은 아니었어.”
“알아요. 쌤이 그러실 리가 없으니까요.”
차도도의 안색이 그나마 밝아졌다.
“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진 못했어도 어쨌든 앞으로는 그럴 일 없어. 나는 확실하게 거부 의사를 전달했고 그쪽 집안도 수긍한 상황이니까. 난 부모님께 아직 결혼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고.”
강우는 내심 안도했다. 역시 차도도가 마도환 따위에게 마음이 끌릴 리가 없다. 그런데 문득 드는 염려는…….
“혹시 비혼주의자세요?”
“그건 아냐.”
차도도가 강우를 힐끔 살피다가 눈길을 돌렸다.
강우는 그녀의 눈치가 느껴져서 편하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제가 쌤의 사생활에 관여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편하게 해주려고 한 말이 차도도에겐 오히려 짐이 되었다.
“올해는 내 잘못으로 망쳐버렸으니까…… 내년 생일에는 확실하게 같이 할게.”
“내년에는 졸업 후인데요?”
“유학 가더라도 그때까진 국내에 있을 거잖아.”
대화하면서도 두 사람은 헤어짐을 눈앞에 둔 기분이어서 마음이 착잡해졌다.
눈치를 보던 차도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생일 선물은 고마웠어.”
“제가 얼마나 고심해서 고른 건데요. 입어 보셨어요?”
“아니. 아직은 입을 기회가 없었어. 당분간 입을 일이…… 없을 것 같아.”
옷을 고를 때 그러리란 예상은 했었다. 평소 차도도가 입는 스타일이 아니니까.
자축연은 여기까지.
이제는 강우도 과거처럼 그녀의 아파트에 머물기가 눈치 보인다. 아마 내년이면 더 어려워지겠지. 그가 성인이 되어갈수록.
그녀와 대등하게 만날 자격과 나이가 한편으로는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스럽다.
“그만 가볼게요.”
강우는 무알콜 샴페인을 비우고 일어났다.
현관문이 닫혔을 때 공허한 적막이 거실에 내려앉았다.
* * *
7월 초 신새벽의 2차 논문심사일이 됐다.
애초에 강우는 논문심사 자리에 참석할 계획이 없었다. 퀀텀 케미스트리 저널에 제출한 논문이 출간되었다면 그것으로 모든 방어가 가능했을 거니까.
그런데 저널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1차 때처럼 신새벽이 노창열에게 군소리만 듣고 울면서 돌아올 장면이 빤히 보였기에 어쩔 수 없이 그도 따라가게 됐다.
다행히 기말고사가 끝난 R&E 집중기간이어서 수업에 지장을 받지 않았다.
다시 찾은 한국대는 여름의 싱그러움에 잠겨 있었다.
과거 손강우 시절 숱하게 거닐었던 한국대 교정이 오늘따라 더 푸르게 눈에 들어왔다.
장소는 신새벽 지도교수 연구실. 정원재 교수와는 안면이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
“난 강우만 믿어.”
연구실로 들어가면서도 신새벽이 그에게 두려움에 찬 눈빛을 보내왔다.
그 기분을 강우도 안다. 그도 손강우 시절 논문심사 때는 한없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으니까. 교수 앞에 선 대학원생은, 그것도 논문심사 당일은, 회사 대표 앞에서 발표하는 평사원의 기분과 다르지 않다.
“별일 없을 겁니다.”
만일 오늘 심사가 일그러지면 논문 통과가 어려워지면서 졸업이 한 학기 미뤄진다. 물론 신새벽이 한 학기 늦게 졸업한다고 하여 문제가 될 일은 없다. 어쨌든 논문의 수준 때문이 아니라 노창열의 암수에 말려 피해를 봐서는 안 된다.
연구실에는 세 명의 심사위원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도교수인 정원재와 화학과 교수인 노창열 외에 안경을 낀 중년의 교수가 앉아 있었다. 나중에 강우는 이 교수가 화학교육과 학과장임을 알게 됐다.
신새벽이 들어가자마자 인사했고 강우도 그녀 뒤에서 꾸벅 허리를 굽혔다.
학과장은 강우가 누구인지 물었고 노창열은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고려 과학고 학생 강우입니다.”
강우는 스스로 소개한 후 신새벽 옆에 앉았다.
정원재가 먼저 다른 교수에게 양해를 구했다.
“강우 학생은 신새벽 선생님의 제자로 현재 고3입니다. 신새벽이 논문을 쓰는 동안 옆에서 도왔지요. 오늘 심사일을 맞아 논문 설명을 듣고자 불렀습니다.”
“일개 고등학생이 이 자리에 참여할 자격이 있습니까?”
곧바로 노창열의 반대가 튀어나왔다.
“교수와 대학원생처럼 신새벽 선생님 밑에서 함께 논문을 썼으니까요. 그리고 강우 학생은 일반 고등학생과는 격이 다릅니다.”
“고등학생이 달라 봐야…….”
“강우 학생은 고등학생 신분으로 이미 국제학술지에 세 편의 논문을 냈습니다. 국제 저널 세 편이면 박사학위를 받고도 남는다는 사실을 아시지요?”
“화학 분야 맞습니까?”
노창열의 반박은 날카로웠다.
이번에는 강우가 대답했다.
“노창열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예전에 고려 과학고에서 강연하셨을 때 뵈었었지요. 제가 쓴 논문은 핵융합 분야로 신새벽 선생님과 교수님이 연구하시는 양자화학 분야와 대단히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래서요?”
“요즘은 융합 과학 시대 아닙니까? 물리와 화학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게 벌써 백 년 전입니다. 타 분야를 받아들여 소화하지 못하면 뒤처지는 시대죠. 양자화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쓴 논문을 보시면 그 내용의 절반이 교수님께서 이미 고민하시던 문제임을 아실 겁니다.”
“그래도 고등학생의 참여는 스스로 격을 낮추는 문제입니다.”
노창열 교수가 학과장을 향해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강우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럴까요? 제 논문이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실렸습니다. 그들은 제 소속이 고등학생임을 알면서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저널에서조차 문제 삼지 않았는데 왜 하필 여기에서는 문제가 될까요?”
노창열은 입이 막혔다. 제대로 반박할 수 없었다.
“물론 저는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겠습니다. 심사가 정당하게 흘러가는지 살필 겁니다. 여러분께서는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저에게 질문하셔도 됩니다. 심사 과정에서 제가 특별히 개입할 일은 없으니 참관을 허락해 주시지요.”
강우의 요청은 정중했으나 한편으로는 정당한 심사가 아니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은근한 협박도 담겨 있었다.
그 뜻을 모를 리 없는 노창열이 안색을 붉히며 씩씩댔다.
정원재가 학과장에게 물었다.
“단순한 참관인인데 상관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요. 논란거리를 물어보기도 쉬우니까요.”
학과장이 허락했다.
노창열은 감히 학과장에게 반박할 수 없어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강우의 예상대로였다.
신새벽이 논문 발표를 시작했다.
1차 때는 발표 초반에 노창열이 개입해서 잔소리만 듣다가 끝났다고 했다. 그 바람에 전체 내용발표는 처음이었다.
평범한 대학원생에 비하면 신새벽은 교단에서 수없이 수업을 경험했다. 당연히 이런 발표에서 주눅 들지 않는다.
그녀의 발표는 유창했고 물 흐르듯 쉽게 설명했다.
지도교수와 학과장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럴수록 노창열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보다 못한 노창열이 중간에 개입했다.
“그 부분 수식 전개를 다시 해보시죠.”
심사위원으로서 당연한 권리이더라도 강우에게는 그 의도가 불순해 보였다.
신새벽이 설명을 끊고 화이트 보드에 수식을 나열했다.
“그 부분! 세 번째 항이 무엇을 뜻합니까?”
날카로운 지적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