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9화 논문심사 (3)
이곳으로 올 때 담임에게 외출증을 끊었기에 차도도도 그의 행선지를 아는 상황. 그런데도 강우는 휴대폰을 들고 잠시 머뭇거렸다.
“네, 끝났어요.”
- 어떻게 되었어?
“잘 끝났죠.”
- 이제 뭐 할 건데?
“어…… 영화 보러 갈 것 같아요.”
잠시 침묵에 잠기더니 다시 차도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게 뮤지컬 티켓이 있는데 신 선생님에게 혹시 관심 있냐고 물어봐 줄래?
“제목이 뭔데요?”
- 오페라의 유령.
오페라의 유령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컬이다. 국내에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공연했던 작품이기도 하고. 물론 강우는 당연히 본 적이 없다.
신새벽에게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보러 가자는데요?”
- 그럼 지금 학교로 와. 같이 가게.
“예.”
전화를 끊었다.
“근데 오페라의 유령은 오페라 아니었어요? 뮤지컬이랑 오페라랑 같은 건가?”
신새벽의 주먹이 날아왔다.
“어휴, 무식하기는. 어디 가서 천재라고 하지 마. 쪽팔리게.”
“으아, 모를 수도 있는 거지.”
“그건 상식이야, 상식.”
역대로 보면 천재는 일상생활에서 남보다 못했던 경우가 흔했다. 아인슈타인은 대학 때까지도 은행 업무를 제대로 볼 줄 몰랐고 뉴턴도 과학 외의 다른 분야에서는 평범했었으니까. 뉴턴이 의회에서 말주변이 없었다거나 주식 투자에서 자산을 말아먹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천재라고 모든 분야에서 다 뛰어나다는 생각은 선입견이다.
“모두 잘하면 천재가 아니라 잔머리가 좋은 거죠.”
강우의 항변에 신새벽이 웃었다.
“어쨌든 차 선생님도 같이. 괜찮죠?”
“그래, 자기 담임이라고 꼭 챙기는데 내가 어쩌겠니.”
“에이, 저도 가끔은 신 쌤도 챙기거든요?”
다행히 신새벽의 기분은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다.
하긴 예전에도 셋이서 함께 다닌 적이 있으니까. 강우도 둘이서 보내는 시간보다 셋이 함께 만나는 시간이 덜 부담스럽고 즐겁다.
* * *
처음 본 뮤지컬 공연은 훌륭했다.
영화와는 다른 멋과 재미에 흠뻑 빠졌던 강우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무대에 시선을 집중했다.
극장을 울리는 감동적인 노래에 취하다 보니 어느새 뮤지컬이 끝났다.
그들은 부근의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뮤지컬 비용은 차도도가 냈고 저녁 식사는 신새벽 담당이었다.
“뮤지컬 처음이니?”
“시골에는 뮤지컬이 없거든요.”
차도도의 물음에 강우는 정상적인 답변을 했다. 물론 손강우 시절에도 딱히 관심이 없었다.
“얘는 뮤지컬과 오페라도 구별할 줄 모르더라.”
신새벽이 비웃으며 고자질했다.
한참 웃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두다가 강우도 물었다.
“표는 어떻게 구하셨어요?”
오늘 본 뮤지컬은 인기가 있어서 금방 표가 동난다. 그래서 표를 구하기가 별 따기다.
“우연히 생겼어.”
말을 삼가는 차도도에게 더는 묻지 않았다. 2장도 아닌 3장이 우연히 생길 리는 없으니 의도적으로 구했다고 봐야 한다. 그것도 VIP석이니 새삼 차도도의 능력이 놀랍다.
강우는 입을 닫고 칼로 스테이크와 씨름했다. 뮤지컬 이야기를 더해봐야 무식만 탄로 나니까. 대신에 정원재 교수의 질문이 떠올라 신새벽에게 물었다.
“쌤? 학위 받은 후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아직은 모르겠어.”
“학교에 계속 남으실 거예요?”
“그것도 잘…….”
말을 아끼는 느낌이다.
“지도교수께선 신 쌤 능력이 아깝다고 하시던데…….”
“나야 계속 공부를 더 하고 싶어도 세상일이 내 뜻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잖아.”
지금 신새벽에게는 세 가지 길이 놓여 있다. 학교 선생님으로 계속 남는 법, 국내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법, 해외 유학을 떠나는 법.
강우는 차도도의 표정을 슬쩍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유학 원하시면 저랑 같이 가요. MIT 화학과로. 적당한 교수님 한 분 있었잖아요?”
“그럴까?”
신이 난 신새벽과 달리 차도도의 안색이 확 변했다.
“같이 가면 재밌을 것 같은데요? 고곽천재는 모두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 쪽 대학으로 갈 것 같으니까 쌤도 그쪽으로 가요. MIT면 더 좋고요. 국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국내에 돌아와 한국대 화학과 교수로 부임하면…… 우와! 대학교수님이잖아요?”
“흠흠, 대학교수 신새벽? 괜찮네. 그런데 한국대는 힘들걸? 노창열 교수가 버티고 있어서.”
노창열 이야기가 나오니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강우가 신새벽과 열심히 유학을 떠들고 있으니 차도도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래서 나는 GRE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 넌?”
GRE는 미국 대학원 과정 입학을 위한 영어시험이다.
“저도 여름방학부터 시작해야죠. 토플이랑 SAT랑…….”
사실 강우는 그 세세한 내용을 모른다. 주변에 유학의 뜻을 둔 고곽천재가 있고 실제로 유학을 떠나는 산증인 권유성이 있어서 주워들은 정보다.
“그럼 같이 영어 공부하면 되겠네. 너 혹시 영어도 천재니?”
“그럴 리가요.”
“흐흐, 그럼 영어는 내가 이기겠는데? 내기할까?”
“어휴, 어린애도 아니고.”
차도도가 바로 옆에서 태클을 걸었다.
강우는 차도도의 눈치를 보면서 곧바로 응수했다.
“제가 이길 거니까…… 하여튼 엄청난 걸 걸어야지.”
“좋아! 서로 목표점수를 정해서 달성하는지 내기해. 공부도 목표가 있어야 효율이 생기는 법이지.”
무슨 속셈인지 몰라도 신새벽이 장단을 잘 맞춰준다.
슬슬 차도도도 들러붙을 때가 되었는데 어째 아직 조용했다.
강우는 차도도에게 슬쩍 운을 띄웠다.
“쌤도 같이 시험 치실래요?”
“난 유학 가지도 않는데 영어시험을 왜 쳐?”
“안 가도 쳐보시죠?”
“쓸데없는 일에 힘들이고 싶지 않아.”
“하긴 영어 울렁증이 있는 사람이 있어요. 다른 건 다 잘하는데 영어 성적이 엉망이라 회사에 원서 내기도 쉽지 않은 사람.”
“내가 넌 줄 아니? 나 영어 잘하거든?”
미국 갔을 때 유창한 영어로 요셉과 대화했으니 차도도의 영어 실력도 상당하다고 봐야 했다.
“그래도 영어회화랑 토플이나 GRE는 다르잖아요?”
“그것도 조금만 준비하면 금방 할 수 있어.”
“말만.”
강우가 슬슬 긁어대자 차도도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드디어 다 넘어왔다. 마지막 결정타.
“차 쌤과 신 쌤 두 분이 GRE로 대결해봐요. 이기는 사람에게 제가 큰 선물을 쏠 테니까요.”
신새벽의 눈이 동그래졌다.
“뭔데? 무슨 선물 줄 건데?”
“원하는 거.”
“강우에게 선물을 받을 수 있다니 당연히 해야지! 콜!”
신새벽이 적극적으로 나왔다.
당연히 차도도도 물러서기는 늦었다. 그녀는 신새벽과 강우를 번갈아 살피면서 연신 마음을 정하지 못하다가 간신히 대결에 응했다.
강우는 내심 환호성을 질렀다. 차도도를 유학 가게 만들 일 단계 작전이 성공했다. 영어 성적이 있어야 입학 원서라도 내어볼 것 아닌가.
그날 저녁 식사에는 유학과 영어시험에 대한 화젯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 * *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시작될 때쯤 프로야구는 올스타전 브레이크가 걸린다. 시즌이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뉘는 시점이어서 일주일간의 휴식이 있기도 하다.
강우는 DD 파이터즈 구단에서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았다.
덕분에 차도도와 함께 하루를 방문하게 됐다.
구단 사무실에서 강우는 DD 파이터즈 1군의 김 감독과 육성 감독인 홍 감독을 만났다. 두 감독 외에 네 명의 선수가 참석했다. 공정혁과 신재균을 비롯하여 강우가 손을 봐주었던 선수들이다.
인사를 마치자마자 김 감독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급히 모신 것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물론 강우는 이 구단과 프로젝트를 2년째 하고 있기에 전혀 불만이 없었다. 사실 별로 하는 일도 없이 2년째 연구비랍시고 돈을 받고 있으니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다.
“먼저 올해 성적은…….”
이번 시즌 전반기 팀 성적은 작년과 비슷했다. 다소 예상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이었으나 주축 선수가 부상으로 빠졌음에도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어 겉으로는 나쁘지 않다. 다만 후반기가 문제라는 지적이 많았다.
강우의 조언을 받았던 공정혁은 올해도 필승조에서 활약했다. 특유의 변화구와 강우가 개발한 서클 커브로 연타를 허용하지 않아 대박 났던 작년과 비슷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제 1군에 제대로 뿌리를 내렸다고 분석했다.
선발투수인 신재균은 올해는 작년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거뒀다. 뛰어난 직구에 스플리터를 구사했던 그는 강우가 새롭게 알려준 변화구를 추가하여 작년에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런데 올해는 새로운 구종을 간파당하고 전략무기가 노출되자 한계에 이르렀다.
올해 강우가 조언했던 다른 두 투수는 성공적인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 강우가 도와줘야 하는 사람은 신재균이었다.
“신재균 선수에게 해줄 조언이 있을까요?”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김 감독이 조언을 구했다.
분위기를 살피던 신재균이 덧붙였다.
“솔직히 제가 변화구에 재능이 없습니다. 오로지 직구 하나 믿고 던지는 스타일이거든요. 과거에도 변화구를 장착하려고 노력해봤는데 모두 실패했어요. 그나마 익혔던 게 스플리터였고…… 강우 군이 알려준 신 구종은 기존과 비슷해서 금방 적응했지요. 그런 구종을 하나 더 익힐 수 있다면…….”
강우는 A/S가 필요하다는 신재균의 뜻을 알아들었다.
사실 투수가 다양한 변화구를 던지기는 무척 어렵다. 새로운 구종을 장착하다가 기존 투구폼을 상실하여 오히려 악영향을 얻기도 한다. 예전의 신재균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문제점을 들은 강우는 곧바로 해결책을 제시했다.
“지난번 구종도 기존 스타일에서 공의 궤적이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방식이었죠. 그런 신 구종은 익힐 때 문제가 없었습니까?”
“그때는 금방 익혔습니다. 다른 구종에 영향도 미치지 않았고요. 그런 구종이 또 있을까요…….”
선발이니만큼 다양한 구종이 필수다. 신재균은 어떻게든 선발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순식간에 강우의 머릿속에서 공의 회전과 주변 공기의 흐름이 실시간으로 분석됐다. 공의 그립에 따라 변화하는 궤적이 다양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자, 그럼 그때 알려준 대로 공을 잡아보세요.”
신재균이 신 구종의 그립을 쥐고 강우에게 보였다.
“야구공의 실밥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공의 궤적이 달라진다는 정도는 아시죠?”
“물론입니다.”
“그럼 이렇게 한 번 쥐어 보시죠.”
강우는 공을 빙글 돌려 실밥의 다른 부분을 쥐게 했다.
신재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반적인 그립 방법과 달랐기 때문이다.
“지난번 알려드린 구종과 같아 보여도 공의 실밥이 걸리는 위치가 달라요. 이대로 공을 던지면 어떻게 될까요? 팔의 궤적은 같다고 보구요.”
“공의 회전이 줄어들겠는데요?”
“그렇죠? 공의 낙차는 조금 더 거치고 속력은 줄어듭니다. 딱 방망이 폭만큼. 이 공은 타자들이 쳐봐야 멀리 날아가기 힘들죠.”
신재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작 옆에 있던 공정혁이 강우의 뜻을 먼저 눈치챘다.
“투구 폼과 그립도 같은데 쥐는 실밥만 차이가 있으면 타자들이 눈치채기 힘들겠죠? 게다가 기존 스플리터와 신 구종이 비슷한데 거기에 또 비슷한 새로운 구종이 장착되면…… 와우!”
천재의 적절한 처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