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50화 (250/325)

제250화 논문심사 (4)

강우의 조언대로 신 구종을 장착하면 사실상 신재균은 네 가지 구종을 던지게 된다. 그런데 그중에 세 구종은 매우 비슷하면서도 궤적이 조금씩 차이 나고 공의 성질도 다르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끌어낼 수 있다.

“시즌 중이라 새로운 구종을 장착하기 힘드니까 방금 말씀드린 방식이 최선입니다. 어떻습니까?”

강우의 권유에 신재균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립만 달라지는 거니까 이번에도 가능할 겁니다.”

김 감독과 홍 감독도 상황을 이해했다.

시즌 중에 변화를 주기는 무척 어렵다. 그런데 강우는 그런 현실을 인식하고 손쉽게 해결책을 제시했다. 역시 천재다운 발상이다.

야구인이 아니면서도 이렇게 놀라운 처방을 내놓다니!

“당장 시험해봅시다.”

1군 김 감독이 가장 먼저 벌떡 일어났다.

* * *

실내 투구 연습장에서 신재균이 새로운 구종을 시험했다.

여기부터는 강우의 소관이 아니다. 당사자인 투수와 1군 감독의 문제다. 감독 옆에 한 사람이 더 붙었는데 대충 투수 코치인 듯하다.

강우는 구경꾼이 되어 테스트를 관망했고 예상대로 신재균이 잘 적응해서 흡족했다. 아마 신재균은 이 구종의 추가로 작년과 같은 활약을 끌어낼 것이다. 최근의 부진을 단숨에 만회할지도 모른다.

그의 곁에서 차도도 또한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과학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장면은 언제 보아도 감격스럽기에 강우는 그녀의 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치 감독처럼 신재균의 투구를 뒤에서 열심히 지켜보면서 공의 궤적을 고민하는 모습이 전형적인 과학자다.

‘설마 유체역학에 뛰어드는 건 아니겠지.’

괜히 쓸데없는 상상을 하면서 실없는 웃음을 짓던 강우는 주변 다른 선수들이 그들을 쳐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정확하게는 그가 아닌 차도도다.

대충 넋이 나간 선수들의 눈빛을 보니 이럴 때는 확실히 차도도의 미모가 방해물이다.

‘얼른 돌아가야겠어.’

오늘 방문목적을 달성했기에 마무리하려는데 한쪽 구석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는 선수가 눈에 들어왔다.

팡-

공이 묵직하고 빨랐다. 잘 모르는 강우가 보기에도 보통 선수가 아니었다.

잠시 그 선수가 공을 던지는 장면을 지켜봤다. 공 하나하나에 들이는 정성이 남달랐다.

“저 선수는 누구죠?”

공정혁이 오히려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유명한 선수인데 몰라?”

“그게 잘…….”

“권광인 선수. 국내 대표적인 마무리 투수야.”

이름은 들어봤다. 강력한 속구 하나로 리그를 평정하고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한 노장이다. 30대 중반인 지금은 에이징 커브에 이르러 과거 대비 기세가 한풀 꺾였으나 여전히 팀에서는 마무리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구속의 하락을 경험으로 메우면서 노장 파워를 과시하는 선수다.

“아! 이름은 들어봤어요. 얼굴과 잘 매치가 안 되어서.”

마무리 투수는 대개 최고의 구위를 가진 선수가 맡는다. 역시 공이 남다르다고 놀랐더니.

강우는 예전에 구단으로부터 받은 선수 프로필을 떠올렸다.

강력한 포심과 슬라이더로 타자를 압도했던 전형적인 투피치 스타일 투수다. 신재균과 비슷한 스타일로도 볼 수 있는데 두 번째 구종이 슬라이더와 스플리터인 차이가 있다. 사실 슬라이더는 우리나라 선수들에게 흔한 변화구이기도 하다.

그와 차도도가 나란히 서서 관찰하고 있자니 권광인이 피칭 연습을 멈추고 다가왔다.

나름대로 미소를 짓는다고 지은 듯한데 얼굴이 펑퍼짐하고 각이 져서인지 인상이 다소 험악하다.

“그분들?”

권광인이 옆에 선 공정혁에게 짧게 물었다.

공정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권광인이 강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권광인입니다.”

얼떨결에 강우는 악수했고 권광인은 이어서 차도도에게도 정중하게 인사했다.

“잠시 대화 가능할까요?”

연습장 구석에 놓인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권광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알다시피 저는 수년간 마무리투수로 활약해왔습니다. 이제는 팀에서 최고참이라 할 만큼 나이가 들었지요. 그런데 이 나이가 되면…… 선수라면 누구나 고민이 있어요.”

차도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강우도 무슨 말이 이어질지 눈치챘다.

“몸은 멀쩡한데 구속은 조금씩 떨어지고, 후배들은 계속 치고 올라오고, 거기에 성적은 하락하니 마음이 무거워지죠. 선수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자괴감도 들고요. 사실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거든요.”

권광인의 안면에서 짙은 고뇌가 엿보였다.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솔직히 말이 안 된다는 것도, 또 어렵다는 것도 압니다만…… 에이징 커브를 늦추거나 아니면 구속을 조금이라도 복구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구종을 장착하거나…… 방법이 있을까요?”

강우는 지금까지 자신이 손을 봤던 공정혁, 신재균과의 차이를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가 조언했던 선수들은 대부분 프로야구에 뛰어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인급이다. 길어봐야 5년을 채 넘기지 않은 선수다.

반면 권광인은 10년을 훌쩍 넘어 15년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자신에게 적합한 변화구를 무수히 연구했고 장착했다가 버렸을 것이다.

그런 선수가 최후에 도달한 구종이 포심과 슬라이더이니 거기에 어설프게 다른 구종을 연습해보라고 제안할 수 없다.

“방금 보니 아직 공이 무척 좋던데요?”

“전성기 때 비하면 미흡합니다.”

겸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강우는 작년에 구단의 자료집을 연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일전에 조언할 투수를 뽑아냈을 때 권광인도 처음에는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권광인의 나이가 많고 유명 투수라 조언을 삼갔을 뿐이다.

이렇게 만나고 나니 그때 연구했던 조언이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 나이에도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의 마음가짐을 물어봤다. 고참에 대투수였으니 실제로 조언이 쉽지 않다.

“그래도 해야죠. 살아남으려면.”

꽉 다문 입술에서 각오가 엿보였다.

“바로 조언이 힘드시면 시간을 두고 해주셔도 됩니다.”

권광인이 미안함을 표했다. 아무리 유명한 선수나 코치라도 단번에 명확한 해법을 낼 수 없다.

잠시 머릿속에서 여러 구종의 과학적인 시뮬레이션을 거친 후 강우는 조언을 꺼냈다.

“커터라는 구질 아시죠?”

권광인이 모를 리 없다. 커터는 포심과 슬라이더의 중간 정도의 구속과 궤적을 보이는 구종이다. 빠르고 횡으로 휜다.

“당연히 알죠. 젊었을 때 열심히 연구했었으니까요. 그런데 커터는 저에게 쉬운 구종이 아니었습니다. 커터를 던지려면 손가락 힘이, 특히 가운뎃손가락이 강해야 하는데 저랑 신체적 구조가 잘 안 맞나 봐요.”

짐작했던 일이다. 이 투수는 그 경력만큼 많이 경험하고 시도해보았을 테니까.

“커터를 잡는 방법에는 포심 그립과 슬라이더 그립이 있죠. 둘 다 해보셨나요?”

“하다가 말았죠.”

“공을 줘보세요.”

강우는 야구공을 받아서 슬라이더 그립으로 잡았다.

“슬라이더네요?”

“그렇죠. 이 그립에서 공을 살짝 돌리면…….”

손가락에 잡히는 실밥 영역이 조금 더 증가했다.

권광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반적이지 않은데요?”

“새로운 구종이 대부분 일반적이지 않은 약간의 차이에서 발생하죠. 손목이나 팔의 회전을 조금 바꾸거나 아니면 손가락에 들어가는 힘을 조정하거나. 또는 그립을 변형하거나.”

권강인이 강우가 알려주는 대로 그립을 쥐었다.

“포심 그립으로도 똑같이 쥘 수 있어요. 즉, 슬라이더 그립이나 포심 그립이나 둘 중에 편한 것으로 하나만 해보세요. 아마…… 신세계가 열릴걸요? 대충 변형 커터라 이름 붙여보죠.”

강우의 지적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권광인이 다시 투수 플레이트에 섰다.

이어서 가볍게 공을 몇 번 던졌다.

팡-

강우는 차도도와 함께 타석 뒤쪽에서 공의 궤적을 지켜봤다.

포심과 슬라이더에 이어 강우가 알려준 방식으로 던진 공이 들어왔다.

“어때요?”

강우는 옆에서 지켜보는 공정혁에게 물었다.

공정혁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감독을 불렀다.

“홍 감독님!”

김 감독과 홍 감독은 여전히 신재균이 새롭게 장착한 공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 자식아, 바쁜데 왜 불러?”

“여기 좀 보세요.”

“강인이 잘하는데 왜?”

투덜거리면서 홍 감독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팡-

횡으로 살짝 휘는 공이 날아와서 빠르게 포수 미트에 꽂혔다.

“뭔 슬라이더가 이리 밋밋해?”

“잘 보세요.”

다시 공이 날아왔다.

“고속 슬라이더?”

“아뇨, 커터.”

“응?”

“정확하게는 변형 커터!”

홍 감독의 눈이 동그래졌다.

다시 공이 날아왔다. 권강인이 던진 공은 완벽한 커터의 궤적을 보였다. 포심보다 느리면서 마지막에 횡으로 변화를 보이는.

“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DD 파이터즈에서 뼈를 묻은 홍 감독은 권강인이 젊었던 시절 커터를 장착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안다. 몇 년 동안 비시즌 기간에 커터를 연마하다가 결국 포기했었으니까.

그 인고의 세월과 아쉬움을 알기에 누구보다 많이 놀랐다.

“강인아!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커터를 어떻게 던져?”

흥분이 범벅된 외침이었다.

“커터 맞아요?”

“그래, 완벽해. 언제 이걸 다 연마했어? 이야! 몇 년 동안 뒤에서 절치부심 노력했구나!”

“방금 몇 번 만에 완성했는데요?”

“그래 몇 년……, 어……, 응?”

홍 감독이 동공에 지진이 나서 말을 잇지 못했다.

몇 차례 공을 추가로 던진 권강인이 웃으며 강우에게 다가왔다.

“저는 슬라이더 그립으로 신 구종을 던지는 게 더 편하네요. 제구도 잘 잡히고. 당장 실전에 써먹을 수 있겠습니다.”

강우의 예상대로였다.

이로써 권강인은 포심과 슬라이더에 변형 커터를 장착하게 됐다. 슬라이더와 커터가 비슷한 구종이어도 운용에 따라 강력한 무기가 된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저도 잘 몰라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니까 커터가 뚝딱 나오던데…….”

권강인이 엄지를 척 올리더니 강우와 차도도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했다.

홍 감독은 혼이 나간 듯 김 감독을 불러 상황을 설명했고 동시에 김 감독의 입도 쩍 벌어졌다.

팀의 마무리 투수가 새로운 구질을 장착하고 제 성적을 내면 팀 성적이 수직으로 상승한다. 그 어떤 투수보다 팀 성적에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바로 마무리투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보자마자 바로 새 구종을 알려주고 선수는 바로 그 구종을 소화해? 이게 인간이 할 짓이냐?”

김 감독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참 쉽죠? 그래서 천재 아닙니까?”

홍 감독은 티비에 나왔던 차도도와 강우의 예능 프로를 떠올렸다.

방금 벌어진 일만 보아도 이 두 사람은 천재가 확실했다.

김 감독은 커터를 무기로 구사하는 권강인을 그렸다. 저 공이라면 몇 게임을 더 승리로 이끌기 어렵지 않다. 긴박한 상황에서 손쉽게 삼진을 잡을 수 있으니까.

김 감독이 강우와 차도도에게 감사를 표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두 분 덕에 후반기 성적이 수직 상승 확정입니다.”

“뭘요. 돈을 받았으니 당연히 해드려야죠.”

차도도가 대수롭지 않게 인사를 받았다.

금융치료가 좋긴 하지만 이런저런 연구 일정을 고려하면 야구단 방문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강우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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