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1화 유학 준비 (1)
3차 논문심사이자 최종심사에서는 지시한 수정 사항을 확인하고 심사위원의 도장을 받는다.
신새벽은 지도교수와 학과장의 도장을 받았으나 노창열의 도장을 받을 수 없었다. 정작 최종심사에서 노창열이 불참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노창열은 그녀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 저녁에 알려 주는 장소로 와서 도장을 받아라.
신새벽은 속에서 열불이 났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날 화장실 앞에서 노창열이 장담하던 말이 현실로 다가와 그녀를 옥죄었다.
고민하던 신새벽은 강우에게 털어놓았고 지금 강우와 함께 한국대로 왔다.
“그냥 기다려볼까?”
“그럼 더 힘들 건데요?”
노창열의 홈그라운드에서 그것도 단둘만 있는 장소라면 갑질이 더 심해질 것이 뻔히 눈에 보였다.
논문을 승인받기까지 적잖게 마음고생을 할 게 뻔했다.
당연히 강우는 신새벽의 고통을 모른 척할 수 없다. 애초에 그녀가 무난히 졸업할 수 있도록 신경 써 주겠다고 했었고. 맡은 일은 마무리해야 한다.
“쳐들어갔다가 더 혼나면 어떡하지?”
“그렇더라도 지금 해결하는 게 더 나을걸요?”
강우의 말이 일리가 있기에 신새벽도 잠자코 의사를 따랐다.
한국대 교정은 오가는 학생들로 붐볐다. 방학을 맞은 학생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강우는 손강우 시절의 대학 생활을 떠올리며 불현듯 MIT 유학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1년이 남았다.
신새벽이 학과 사무실에 연락해서 노창열의 소재를 파악했다.
“지금 학과회의실에 있데. 학과 교수님들 회의 중이라는데? 기다릴까?”
“더 잘됐네요.”
“응?”
“혼자 있을 땐 절대 안 찍어줄걸요?”
도장을 찍을 생각이 있었다면 저녁에 장소를 알려준다는 망언을 하지 않았겠지. 그렇기에 교수 연구실에 찾아가 봐야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강우는 이를 해결할 가장 쉬운 방법은 공개된 장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뜻을 짐작한 신새벽이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긴장을 억누르는 표정이다. 졸업의 마지막 관문이자 가장 힘든 순간이니 당연하다.
화학과 회의실 앞에서 작전을 짰다.
“어떻게? 그냥 들어가?”
“같이 들어가요. 최대한 당당하게”
강우를 본 노창열이 더 발끈하지 않을까 염려된 신새벽이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심사확인서 주세요.”
이미 두 사람의 도장이 찍힌 심사확인서를 받아든 강우는 쉴 틈을 주지 않고 노크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넓은 회의실에는 타원형으로 빙 둘러서 배치된 책상에 십여 명의 교수가 앉아서 토론에 열중하고 있었다.
강우와 신새벽이 들어가자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강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빠르게 노창열을 찾았다.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노창열이 불쾌한 적대감을 뿜어내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신새벽을 끌고 성큼성큼 노창열 앞에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이게 무슨 짓인가?”
노창열이 불쾌한 얼굴로 윽박질렀다.
끼어들려는 신새벽을 만류하면서 강우는 심사확인서를 내밀었다.
“도장 부탁드립니다.”
“무슨 도장?”
“석사 논문 승인 도장 말입니다.”
“허어, 자네가 왜 나서지? 신새벽 학생이 부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옆에 같이 오지 않았습니까?”
노창열이 신새벽과 강우를 훑고는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아나? 감히 학생이 교수 회의에 난입해?”
“교수님께서 도장을 거부하시니 그렇습니다.”
“논문이 논문 같아야 찍어주지 않겠나?”
노골적인 비웃음에 강우도 같은 웃음으로 반사했다.
“그럼 안 찍는 것으로 알고 행정 처리하면 될까요?”
노창열의 안면에서 비웃음이 싹 가셨다.
“이봐, 내가 저녁에 오면 찍어준다고 했잖아. 이게 대체 무슨 무례지?”
“저녁에 호텔 룸으로요?”
“그게 대체…….”
뜨끔한 노창열이 동료 교수들의 눈치를 봤다.
두 사람의 대화가 날이 시퍼레지자 다른 교수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노창열이 강우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 연구실로 가 있어.”
당연히 연구실에서 노창열과 단독으로 만나면 모든 일이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 자리에서 찍어주시죠. 주머니에 도장 있는 거 다 압니다.”
“이게…… 무슨 짓거리지? 내가 아무 논문이나 승인할 사람인 줄 알아?”
“그러니까 확실하게 의사를 밝히시지요. 논문 수준이 미달이라 못 찍어준다든가, 아니면 호텔 룸으로 와서 말을 잘 들으면 찍어준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이 녀석이!”
노창열이 재빨리 강우의 말을 잘랐다. 보는 눈이 없으면 사람을 칠 기세다. 그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다른 교수의 눈치를 심하게 보는 노창열을 비웃으면서 강우가 느긋하게 말했다.
“연구실에서 찍으실 거 이 자리에서는 왜 못 찍습니까? 어차피 찍을 거라면 지금 찍으시지요. 그동안 하신 말씀 그대로 다 밝히기 전에 말입니다.”
상황이 역전됐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노창열은 멋대로 할 수 없었다. 대충 무슨 일인지 짐작한 교수들이 노창열에게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다.
노창열이 눈에 힘을 주고 강우와 신새벽을 노려봤다. 하지만 두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갑이 갑질을 하기에도 난감한 상황이다.
심사를 통과한 이상 노창열이 당연히 도장을 찍어야 하기에 강우는 당당하게 나갈 수 있었다. 지금 와서 뒤늦게 논문 수준을 운운해서는 노창열도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노창열은 신새벽을 단둘이 만나 약간의 굴욕을 줄 계획이었으나 강우의 개입으로 그마저 물 건너가 버렸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노창열이 결국 동료 교수의 눈총을 감당하지 못하고 품에서 도장을 꺼냈다.
“다음에 두고 보자고.”
나지막이 강우와 신새벽에게 경고하면서 노창열이 도장을 꾹 눌렀다.
목적을 달성했다.
강우는 심사확인서를 회수한 후 꾸벅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는 다른 교수들에게도 정중하게 사과했다. 옆에 있던 신새벽도 얼떨결에 머리를 숙였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강우야, 노창열 교수가 나중에 복수라도 하려고 하면 어떡하지?”
“이런 식 아니었으면 절대 도장 못 받았을걸요?”
강우가 없었더라면 지난 2차 심사에서 노창열이 갖은 핑계를 대며 판을 엎었을 것이다. 그렇게 졸업을 미루게 한 후 한 학기 동안 그녀를 더 괴롭혔겠지.
“그래도…… 이래도 되나 싶어서.”
“상관없어요.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려면, 특히 한국대에서 학위를 받으려면 노창열에게 잘 보여야 하는데 쌤은 그럴 생각이 없잖아요?”
“내가?”
“계속 선생님 하면 어차피 필요 없고, 진학한다면 외국에 유학 갈 테니 노 교수랑 무관해요.”
신새벽도 강우의 말뜻을 이해했다.
어쩌면 노창열과 먼 훗날 다시 대립할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아니다.
“녹음은 하셨어요?”
“그래, 했어. 써먹을 일이 없으면 좋겠네.”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겁니다.”
나쁜 놈들은 결국 다시 꼬리를 드러내는 법이다.
강우는 심사확인서를 그녀에게 돌려준 후 주차된 차로 이동했다.
“이제 다 끝났죠?”
“응, 이것만 제출하면 행정처리는 끝. 논문 제출은 졸업 때까지 도서관 홈페이지에 올리면 되고.”
“그럼 얼른 움직이죠.”
강우가 앞장서서 서둘렀다.
“어디 가는데?”
“에이, 제가 이렇게 도와줬는데 그냥 넘어가실 건 아니죠?”
“그야, 그렇지만…….”
수긍하던 신새벽이 강우의 입가에 걸린 야릇한 미소를 확인했다.
“야! 너…… 우리 집 기둥뿌리를 뽑으려고 그러지?”
“이번에도 라면으로 때울 수는 없죠.”
“그건 네가 욕심부리다가 그렇게 된 거잖아?”
“이번에는 문 닫았으면 문 열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강우는 오늘 맛있는 저녁을 먹을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그의 뒤를 신새벽이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따라왔다.
* * *
여름방학이 되자 고곽천재는 바쁜 일상을 보냈다.
3학년 마지막 여름방학을 맞아 그들은 최후의 도전에 직면했다.
바로 국제 올림피아드다.
손차희와 하은찬은 무난하게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 출전했다. 장소는 영국 런던. 덕분에 손차희는 미국과 영국을 모두 방문하는 기회를 누렸다. 이민찬도 올해는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함께 떠났다.
최대우는 국제 물리 올림피아드에 나갔다. 장소는 호주. 최대우는 누구보다 호주를 반겼다. 호주는 남반구에 있어 그곳에 가면 남천의 별을 볼 수 있다나. 예전에 제주도에 갔을 때 남쪽 지평선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랬던 최대우이기에 그 심정이 익히 짐작됐다.
최대우는 올해도 최우수상을 받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정작 강우는…….
“애나에게 홀리지 말고. 그녀는 적이야, 적.”
“여신인데?”
“경쟁자지.”
“좋아! 애나의 마음을 확 잡아서 온다!”
아무래도 걱정되는 녀석이다.
유혜림은 국제 화학 올림피아드에 나갔다. 대회 장소는 일본이어서 가장 편했다.
고려 과학고에는 이들 외에도 출전 학생이 더 있었으나 강우의 관심 밖이었다.
결과적으로 학교에 남은 사람은 강우와 윤수아뿐이다.
“아쉽지 않아?”
뜨거운 여름날 답답한 세미나실에서 책을 펴놓고 잡담을 했다.
윤수아의 질문에 강우는 고개를 저었다.
“후배들한테 길을 터줘야지. 괜히 가로막고 그러면 안 돼.”
“너 아직 졸업 안 했어. 이제 3학년이야.”
“3학년이니까 하는 말이지.”
“나라면…… 국제 화학 올림피아드에도 나가서 거기에서도 금메달을 땄을 거야. 그게 진정한 전설의 탄생이지.”
“내가 화학을 해봐야 얼마나 한다고.”
“작년 교내경시에서 가볍게 우승했잖아?”
윤수아의 말을 듣고 보니 조금 아쉽긴 했다.
수학, 물리, 화학.
총 세 분야에서 금메달리스트가 되면 고려 과학고의 전설로 남을지도 모른다. 다만 진정한 천재로서의 의미는 없는 일이었다. 현대 과학에서는 옛날과 달리 여러 분야에 발을 걸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한곳에 집중해야 효율적이다.
스포츠에서도 어릴 때 여러 종목을 겸하다가 성인이 되면 한 종목에 집중하듯 말이다.
이제 고등학교 생활도 끝을 보이니 강우는 핵융합 연구에 더 집중해야 한다.
손차희의 인스타를 구경하며 윤수아는 영국의 정취에 취했다.
“차희를 보면 부러워. 나도 가고 싶다아!”
유럽식 고풍스러운 대학 건물 앞에서 포즈를 취한 국가대표단을 보니 익숙한 인물이 제법 있다. 하은찬은 여전히 어린애였고 이민찬은 거기에서도 빨대로 음료를 쭉쭉 빨며 손차희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
강우는 작년 여름을 회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처럼 고곽천재에 차도도까지 함께 외국을 돌아다닐 일은 아마 앞으로도 없겠지.
“강우야, 대우는 어떻게 지내?”
“잘 지내고 있어. 애나 만났다고 좋아죽더라. 어젯밤에는 남반구 밤하늘을 찍은 사진을 보내왔어. 남십자성이 빛난다고 난리야.”
강우는 개인적으로 날아온 사진을 윤수아에게 보여줬다. 환하게 웃는 최대우의 얼굴이 화면을 채웠다. 물론 그 옆에는 금발 여신인 애나가 바짝 붙어 있다.
이 둘을 보니 작년과 달리 올해에는 꽤 가까워진 듯했다. 거의 일 년간 블로그에서 치고받고 싸운 결과다. 둘은 경쟁적으로 이상한 문제를 들고 와서 토론을 벌였다. 물론 정체를 알 수 없는 몽상가도 함께였다.
역시 애들은 싸우면서 정이 드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