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화 콘퍼런스 (1)
그 가장 큰 원인은 강우였다. 강우는 각자에게 연구할 주제를 따로 나누어주었고 예전처럼 그가 알아서 해주던 그런 시스템을 벗어났다.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자 모두 더 열심히 했다. 덕분에 강우는 가끔 들어오는 질문을 해결해주면서 본인의 연구에 매달렸다.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후 대한핵융합센터에서 콘퍼런스 초대장이 날아왔다.
강우와 차도도는 당연히 수락했고 덕분에 고곽천재 전부가 그날 대한핵융합센터를 방문하게 됐다.
모든 수업을 빠지게 된 것은 덤으로 얻은 이익이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지 않아?”
기숙사 침대에 누운 강우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정작 노트북에 정신 팔린 최대우는 답이 없다. 최근에는 걸그룹에 빠져 있지도 않으니 저 증상은 블로그 때문이다.
내일 아침에는 식사 후 곧장 서울역으로 뛰어가면 된다. KTX라면 10시에 열리는 콘퍼런스 개회식에 참석하고 논문발표를 첫 번째 세션부터 들을 수 있다.
머릿속에서 내일 일정을 그려본 강우는 행복한 마음으로 편히 누웠다.
가자미 눈으로 최대우를 흘낏 보니 녀석이 여전히 잠을 잘 생각을 하지 않는다.
“뭐 하는데?”
“몽상가가 이상한 논문을 올려서.”
몽상가는 블로그에 가끔 고난도 문제를 올리던 바로 그 사람이다. 요즘 블로그에서는 시리우스, 여신, 몽상가의 피 튀기는 전쟁이 벌어진다. 한 사람이 어떤 문제를 올리면 다른 사람이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게시판이 난리가 나는 장면이 반복된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은 관망했다. 세 사람의 싸움에 끼어들 수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한 논문? 질문 아니고?”
블로그에는 질문이 주로 올랐었는데 이번에는 논문인가 보다.
강우도 흥미가 동해서 태블릿을 켜서 블로그를 방문했다.
역시 유혈이 낭자했다. 고수 세 사람의 접전이다.
보통 때는 현대 물리학의 최신 문제를 두고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를테면 현대 물리학을 지배하는 표준모델을 검증하는 방법이라든가, 초끈이론의 수학적 해석 모델이라든가, 힉스입자의 검출 실험이 과연 타당했는가 하는, 일반인 기준에 다소 뜬금없는 그런 문제다.
2년 전에 중고등학교 교과서 수준의 물리 문제를 다루던 블로그가 이제는 초첨단 학문 토론의 장으로 탈바꿈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논문이라니?
“무슨 논문인데?”
“거기 있잖아? 최신 올린 글에.”
제목을 확인한 강우의 눈이 바로 찌푸려졌다.
“고온 플라스마의 안정성? 이거 우리 이야기잖아?”
물론 엄밀하게 따지면 약간 다르다. 오히려 이번에 차도도가 맡은 심사 논문의 주제와 유사하다. 다만 주요 내용은 판이하다.
“논문 저자는 지워져 있는데…….”
“저자가 누군지는 몰라. 몽상가가 토론해볼 만한 재밌는 문제라고 올렸거든.”
몽상가가 핵융합을 연구하는 관련 연구자일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한국어를 사용하니 한국 사람이긴 한데 여전히 누구인지 짚이는 인물은 없다. 마도환일 리는 없고.
그간 물리학의 다양한 분야를 가리지 않고 질문했던 이력을 보면 어쨌든 상당한 실력자임이 확실했다.
몽상가는 이 논문에서 제시한 고온 플라스마의 안정성이 의미 없다는 반론을 펴고 있었다. 1억 K라면 적어도 십여 분 동안 플라스마가 안정화되어야 핵융합에서 의미가 있다. 현재 기술로는 불과 몇 초에 불과하다. 그러니 안전성을 논할 가치가 없다는 주장이다.
최대우는 항성 내부에서는 1억 K 아래에서도 핵융합이 진행되므로 온도는 문제가 아니라고 역설했다. 물론 고압 조건을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진 않았다. 다만 자연적으로 핵융합 연쇄반응을 일으킬 새로운 방법 고안이 더 중요하다는 논리였다.
애나는 이 논문은 수학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현실에서는 불가하더라도 논리적인 문제가 없으므로 여건이 갖추어지면 충분히 실험적 안정성을 증명할 수 있다는 논지를 폈다.
같으면서도 다른 이들의 주장이 서로 얽혀 야밤을 달구고 있었다.
애나야 지금이 오전이니 그렇다고 치고 최대우와 몽상가는 지금이 한밤중인데 대체 무슨 짓인지. 아! 몽상가가 한국에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밤이라고 간주할 수 없으려나.
“어휴, 내가 보기엔 한심해 보인다.”
강우가 웃으면서 소감을 말했다.
“뭐가? 여기 주장들이?”
“아니, 하는 짓이. 자는 게 남는 거야.”
지금 피 튀기는 설전을 벌여봐야 결론이 날 문제가 아니어서 하는 말이었다.
“그렇지? 그래도 애나가 붙어 있잖아?”
“내일 콘퍼런스에 가야 하는데…… 그만 자. 혹시 애나가 꿈에서 나타날지 알아?”
“아! 그게 낫겠다.”
최대우가 조용히 노트북을 덮었다.
강우는 블로그에 올라온 세 사람의 주장을 확인한 후 마찬가지로 눈을 감았다.
차도도가 맡은 심사 논문과 몽상가가 올린 논문, 비슷하면서도 주장이 상반된다. 뭔가 관련이 있을 법한 기분도 들고.
지금은 내일을 대비해서 잠을 자야 한다.
강우도 잠에 빠져들었다.
그는 꿈속에서 최대우와 애나를 만났다. 꿈속에서도 둘은 토론을 벌이며 다투고 있었다. 시리우스와 여신 사이에 신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 * *
KTX를 타고 차도도와 고곽천재는 대전으로 움직였다.
이른 아침인데도 예상보다 승객이 많았다.
강우와 친구들은 열차 한중간의 마주 앉은 좌석을 이용했고 차도도는 그 옆에서 혼자서 논문을 검토하고 있었다.
뉴클리어 퓨전에서 의뢰한 논문의 심사기한이 임박해서 답변을 보낼 시점이 가까워졌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동 시간에도 논문을 들여다보며 고민 중이었다.
손차희는 인스타에 들어가서 노닥거리고 있었고 최대우는 어젯밤 못다 한 혈전을 마무리하러 블로그에 들어갔다가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윤수아는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MIT 슈퍼컴퓨터에 접속해서 열심히 프로그램을 테스트했다. 매트릭스로 표현된 연립방정식의 해법을 비교하고 가장 적합한 방법을 찾아내는 실전이다. 결론은 정작 핵융합 관련 본 게임을 시작도 못 했다는 뜻이다.
“흐음.”
강우는 태블릿에 열심히 낙서 중이었다.
열심히 수식을 써 내려가다가 생각에 잠기길 여러 차례, 어느새 수식으로 채워진 페이지가 계속 늘어났다. 최근 들어 강우는 태블릿을 낙서장으로 사용하는 방식에 꽤 익숙해졌다.
그는 어젯밤에 최대우가 씨름하던 그 논문에 나열된 수식을 다시 풀어보는 중이었다.
얼핏 보면 논문의 수식은 깔끔하게 정리된 풀이였으나 강우는 그 증명에서 빈틈을 찾아냈다. 애나마저 놓친 부분이다. 미분방정식 해가 존재할 조건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현실에서는 다른 결과가 얻어질 수 있음을 확인했다.
다시 풀어본 결과 그의 짐작이 옳음을 입증했다. 즉 논문의 증명은 부분적으로만 옳기에 이는 논문 저자의 실수였다.
감격에 사로잡혀 강우는 최대우에게 알리려 했다.
테이블에 놓인 과자와 음료를 마시느라 최대우와 윤수아의 손이 엇갈렸다.
“정답은…… 일단 참자.”
최대우, 애나, 몽상가 세 사람이 이 논문에 들러붙었으니 오래지 않아 방금 그가 발견한 오류를 찾아낼 것이다.
그 시기가 언제일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서울에서 KTX가 출발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한 인물을 발견한 강우는 안면을 팍 찡그렸다.
마도환. 녀석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도환이 우연히 같은 열차를 탈 리가 없으니 이 상황은 마도환 또한 그들과 같은 목적으로 이 열차에 올랐다고 봐야 했다.
즉 마도환도 오늘 대한핵융합센터에서 열리는 콘퍼런스에 참가하는 모양이다. 저쪽에 식당차가 있으니 아침이라 빈속을 채우고 자리로 돌아가는 걸로 보였다.
강우는 고개를 숙이고 마도환이 그들을 지나쳐 가기를 기다렸다.
하늘은 그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어? 차도도 선생님?”
무심코 지나치다 차도도를 발견한 마도환이 말을 걸었다.
차도도가 난감한 표정으로 마도환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어디 가십니까?”
“핵융합센터요.”
“아!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 저도 거기 갑니다. 하하!”
역시 콘퍼런스에 참석하려고 아침에 이 열차를 탄 게 맞았다.
강우가 알기로는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지난 맞선 이후 처음이다. 당연히 두 사람은 서로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정작 마도환은 안면이 얼마나 두꺼운지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초청받으셨군요. 저도 받았습니다. 국내에는 핵융합 권위자가 몇 안 되니까요. 한 다리 건너면 모두 친구이자 아는 사람입니다.”
마도환이 자신의 인맥을 과시했다.
인사를 주고받던 마도환이 비어있는 차도도의 빈자리에 눈독을 들였다.
“잠시 앉아도 될까요?”
난감한 표정을 짓던 차도도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내어줬다.
원래 차도도는 창가 쪽에 앉아 통로 쪽의 빈 좌석에는 심사하던 논문과 참고논문을 늘어놓고 있었다.
마도환 때문에 그녀는 그 논문 꾸러미를 자신에게로 치워야 했다.
“뭐하십니까?”
“논문을 살펴보고 있어요.”
“역시 열심히 연구하시는군요.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일보다 연구가 더 적성에 맞으시나 봅니다. 한국대 물리학과 대학원에 입학하세요. 제 밑으로 오면 특별히 차 선생님께는 프로젝트 수행의 자유를 보장해드리겠습니다.”
마도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차도도에게 찝쩍거렸다.
강우는 속에서 열불이 났다. 열심히 풀던 수식이 갑자기 방향을 잃고 딴 동네로 풀려간다.
‘젠장!’
마도환은 대학원생을 인격적으로 대할 인간이 아니다. 차도도가 부딪칠 난관이 뻔히 보인다.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지금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이 심히 눈에 거슬려 강우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강우야? 잘 안 풀려?”
세심한 윤수아가 안경 너머로 그를 확인했다.
강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것 같은데?”
강우는 그녀에게 눈치를 주며 마도환을 쫓아낼 방법을 고민했다. 저 인간은 지정된 좌석에 앉지 않고 남의 자리에 와서 뭐 하는 짓인지.
이번에는 하늘이 그의 바람을 무시하지 않았다.
정복을 입은 승무원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표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승무원이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도도 옆에 앉은 마도환에게 정중히 요구했다.
열차표 매매 현황에서는 빈자리인데 정작 사람이 앉아 있으니 검사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하하, 표요? 당연히 있죠.”
마도환이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고는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 화면을 체크한 승무원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이 자리가 아니신데요?”
“하하, 자리로 돌아가다가 아는 분이 있어서 잠시 앉았습니다.”
“그게 아니라…….”
“어차피 빈자리 아닙니까? 어디에 앉든 상관없잖아요?”
마도환의 음성이 높아졌다.
객차 내 사람들의 시선이 마도환에게 쏠렸다. 그의 말대로라면 빈자리인 이상 승무원이 굳이 간섭하기 힘들다. 열차 요금을 냈고 빈자리에 앉았는데 좌석 주인이 나타나지 않은 이상.
그런데 승무원의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강우는 금방 뭔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챘다.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지려나 보다.
승무원이 다시 마도환의 휴대폰을 요구했다.
“손님! 그런 문제가 아니라 열차를 잘못 타셨습니다. 무임승차인데요?”
“그럴 리가? 분명히 이 시간 맞잖아!”
마도환이 항의하자 승무원이 조용히 지적했다.
“날짜를 보세요. 내일 날짜입니다. 내일 타셔야 하는데요?”
“뭐?”
마도환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티켓을 다시 확인했다.
강우는 어떻게 된 일인지 금방 눈치챘다. 마도환을 수발하는 대학원생 김상원의 실수였다. 마도환은 제대로 표를 확인하지 않았고.
‘불쌍한 상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