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58화 (258/325)

제258화 수능 준비 (1)

고등학교 3학년생에게 2학기는 특별하다.

수능 임박으로 정신적인 압박을 받는 부작용 속에서 한편으로는 12년에 해당하는 긴 배움의 세월을 마무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또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옮겨가는 시기이기도 하고.

바쁘면서도 혼란스러운 그런 분위기다.

그런 가운데 9월 모의고사를 쳤고 그 결과가 발표됐다. 사실상 수능 전 본인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험이 끝났다. 이 시험 결과에 따라 입시 전략을 세우고 수시 원서를 쓴다.

고곽천재는 그런 분위기에서 조금은 동떨어져 있었다.

지금 그들은 수능보다 SAT와 토플 시험에 더 신경을 썼다.

세미나실에서 노닥거리며 공부하는 고곽천재 앞에 고현성이 들이닥쳤다.

“차희야! 모의고사 성적 잘 나왔어?”

“그럭저럭.”

내신이 우수한 손차희는 모의고사에서 발군의 실력을 자랑했다. 다른 고곽천재 멤버가 수능 준비 부족으로 모의고사 성적이 별로인 데 반해 손차희만은 모의고사에서도 고려 과학고에서 전교권을 달리고 있었다.

모의고사 성적이 유별나게 뛰어난 학생은 손차희와 주동식이었다. 이민찬은 유학을 준비하면서 모의고사 성적이 예전만 못했다.

손차희의 성적이 좋은 이유는 그녀가 모든 과목 공부와 시험에 성실하게 임하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왔는데?”

손차희가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강우는 고현성과 3년 연속 같은 반이다. 보통 인연이 아니고 꽤 친하다. 물론 그 덕분에 녀석을 많이 구박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녀석도 그게 애정임을 알았다.

“나 말이야, 드디어 결심했어!”

“무슨 결심?”

“의대 가기로.”

순간 세미나실 내부에 차가운 강풍이 휘몰아쳤다.

과학고에서 의대 선택은 금기이자 분란의 단어다. 의대를 선택하는 순간 수시 입학은 물 건너간다. 오로지 수능으로 정시를 노려야 하는 험난한 태풍에 맨몸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물론 이를 감수할 만큼 의대가 매력적이다.

평범한 과학고생이 비슷한 성적으로 공대와 의대로 각각 진학했을 때 10년 후 맞닥트릴 사회적 지위는 평균적으로 의대가 더 낫다.

물론 이를 단편적으로 비교할 수 없으나 일반적인 사회 인식, 지위, 혼인 등 모든 방면에서 의대가 더 주목받는다.

선택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질수록 과학고생도 정작 의대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 어느 순간부터 과학자를 향한 자부심이 사라진다. 주변 친구들이 하나씩 돌아설 때마다 심적 갈등은 더욱 심해진다.

“좋겠네.”

역시 손차희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고현성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다소의 경멸이 담겼다.

고현성이 변명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의사란 직업이…….”

“돈을 많이 벌지.”

“그래, 많이 벌어. 엄청 바쁘고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직업을 따져보니 의사란 본인에게 좋은 직업은 아니더라고.”

“그럼 누구에게 좋은데?”

“의사 부인.”

순간 손차희의 표정이 더 싸늘해졌다.

손차희가 손을 휙휙 저었다.

“그만 나가 줄래? 나 바쁘거든?”

“하여튼 내가 의사가 되면 나만 좋은 게 아니고 네가 더 좋아지니까…….”

“오늘 맞고 싶지?”

주먹이 올라가는 손차희를 피해 고현성이 재빨리 최대우의 뒤로 숨었다. 듬직한 최대우에게 가로막혀 고현성은 보이지도 않았다.

“어휴, 저걸…….”

전교권 성적은 아니어도 꽤 성적이 좋은 편에 속하는 고현성이기에 의대 진학이 불가능하진 않다.

위협에 굴하지 않고 고현성이 꿋꿋하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공부하는 거 도와줄 수 있어?”

“뭔데?”

“너를 목표로 경쟁하면 더 잘할 것 같으니까. 모의고사 쳐서 나랑 누가 더 성적이 잘 나오는지 내기하자.”

고현성의 입에서 오랜만에 내기가 나왔다.

당연히 강우의 관심도 고현성의 제안에 쏠렸다. 3학년 올라와서는 고현성과 내기를 하지 못해 녀석에게 얻어먹지 못했다는 억울함이 그를 깨웠다.

‘오랜만에 밥을 얻어먹을 기회인데…….’

강우의 심상찮은 눈빛이 빛났다.

비록 고현성이 의사 부인이 어떻고 하는 헛소리를 하긴 했어도 공부하려는 욕심을 높이 산 손차희는 일단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달라고?”

“사설 모의고사 문제지를 풀어서 누가 잘하는지 내기해. 이기는 사람이 밥 사주기로.”

공부를 잘하는 손차희와 경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성적이 오른다고 예상한 고현성이다.

손차희의 미간이 살짝 모였다.

“나랑 내기하면 네가 항상 밥 사야 할걸? 감당할 수 있어?”

고개를 끄덕하는 고현성을 대신해서 윤수아가 말했다.

“현성이는 차희한테 밥 사주는 거 좋아해.”

윤수아의 폭탄에 손차희가 비웃음을 날렸고 정작 당사자인 고현성은 안색이 붉어졌다.

손차희가 진지하게 강우를 지적했다.

“그런데 어떡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네 상대는 내가 아니라 강우 같아. 1학년 때도 둘이 내기 많이 했잖아? 강우랑 내기하면 딱이겠네?”

“강우가 내 상대가 되냐? 모의고사 성적으로는 내가 압도적이야!”

고현성이 발끈했다. 어떡하든 손차희와 밥을 먹는 관계를 달성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드러났다.

순식간에 무시당한 강우가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내 모의고사 성적이 어때서?”

“넌…… 음, 하여튼 올해 모의고사 쳐서 나보다 성적이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

“수학은 어떤데?”

“나도 9월은 1등급에 만점이거든!”

고현성의 항변이 틀리지 않는다. 올해 모의고사에서 강우는 매번 그저 그런 성적을 남겼다. 수학과 물리는 항상 만점이었으나 전 과목을 다 합하면 중간보다 약간 나은 수준을 유지했다. 당연히 고현성이 훨씬 점수가 높았다.

강우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나랑은 내기하기 싫어? 무조건 이길 것 같아서? 질 게 겁나서가 아니고?”

고현성이 우물쭈물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당연하지. 난 차희랑 승부 볼 거야.”

“내가 지면 밥 두 끼 살 건데?”

고현성의 표정이 흔들렸다.

살살 놀리는 강우를 유심히 쳐다보던 손차희가 끼어들었다.

“좋아. 그럼 세 사람이 같이 내기하면 어때? 모의고사 쳐서 제일 점수 낮은 사람이 밥을 전부 사는 거로.”

손차희가 끼어들자 고현성이 곧바로 승낙했다.

“좋아. 그 방식은 내가 대환영이지. 난 적어도 강우에게 지지 않으니까.”

꿈에도 바라던 손차희와 공부하며 겨룰 수 있으니 고현성은 대만족이었다.

“강우야? 어때? 콜?”

손차희가 웃으며 물었다.

“당연하지. 난 내기는 무조건 콜이야. 남자라면 일일이 따지며 승부하면 안 되지.”

고현성을 곧바로 디스하며 강우가 최종 승낙했다.

그렇게 세 사람의 모의고사 대결이 성사됐다.

강우는 손차희가 그를 끌어들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손차희는 그가 모의고사 시험을 건성으로 본다고 짐작했다. 그 진실 여부를 확인하고 싶었으려나. 고현성과 둘만의 내기가 신경 쓰이기도 했고.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당장 한판 하지? 현성이 네가 제안했으니 사설 문제지 네가 사와.”

학교 앞 서점에 가면 사설 모의고사 문제가 널려있다. 고현성이 환호하며 세미나실을 뛰쳐나갔다.

* * *

수능과 같은 형식의 모의고사는 시험 시간이 길다. 거의 온종일 시험을 쳐야 했다.

세미나실을 잡고 심판을 자처한 윤수아의 지휘하에 세 학생이 승부를 가리기 시작했다.

강우는 첫 교시 국어 시험지를 들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손차희와 고현성을 힐끔 보니 진지한 표정으로 시험에 임하고 있었다.

강우는 고민했다. 이 대결을 어떻게 풀까.

수능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다. 그렇더라도 수업시간에 어쩔 수 없이 했고 자습시간에도 남의 눈치 때문에 조금은 공부를 했다.

그 결과 의도하지 않게 수능 문제 유형과 과목에서 그의 천재성이 발휘됐다. 과목에 익숙해지면서 마치 수학이나 물리처럼 그는 완벽하게 해당 과목을 이해했다.

만일 그가 마음먹는다면 모의고사 만점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다른 학생의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았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의 사기를 꺾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고현성은 진심이네.’

고현성에게서 수능에서 손차희를 이기겠다는 열의가 엿보였다. 손차희는 전교권을 넘어 전국권에 해당하는 학생이니 손차희를 따라잡는다면 고현성의 의대행은 현실이 된다.

‘비록 사설 모의고사라도 고현성이 손차희를 따라잡기는 쉽지 않겠지. 평소처럼 져줄까? 아니면…….’

강우는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열심히 문제를 풀었다.

이 모의고사 대결은 점심시간이 지난 후에도 계속됐다.

마침내 과학탐구 시험까지 끝났을 때 윤수아가 세 사람의 답지를 채점했다.

“크크, 강우! 밥 살 준비해.”

“너야말로 지갑에 돈 넣어놔.”

“에이 도토리 키 재기하니?”

손차희의 비웃음에 강우와 고현성은 입을 다물었다.

채점이 끝나고 윤수아는 눈이 동그래져서 결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왜 그래? 얼른 발표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고현성이 재촉했다.

윤수아가 점수표를 탁자에 펼쳤다.

- 강우 : 400점.

- 손차희 : 392점.

- 고현성 : 376점.

“허억! 사, 사백 점?”

수능에서 원점수 400점은 만점을 뜻한다. 놀란 고현성이 나라를 잃은 표정을 회복하지 못했다.

손차희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강우를 노려봤다. 강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376점? 개못한 거지?”

“으아아! 강우 너! 이 문제 미리 풀어봤지? 그렇지?”

“뭔 소리야? 크크, 개못하는 녀석.”

강우는 한방에 일축했다.

고현성은 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모의고사에서 항상 그에게 뒤졌던 강우가 이런 점수를 받을 리 없다. 유일한 방법은 사전에 풀어본 경우뿐이다.

“으아! 다시 해!”

고현성이 분을 삼키며 재도전을 외쳤다.

물론 강우는 도전을 받지 않았다.

“일단 밥부터 사고 다음에 또 붙자고. 내가 출출할 때면 언제든 환영이야.”

사실 이런 결과를 예상했기에 강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볼 때 고현성의 점수는 일견 타당했다. 하지만 손차희의 점수는 아니다. 정상이라면 손차희는 고현성보다 조금 나은 380점대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390점대를 받았다는 것은…….

강우는 이것이 그와 함께 공부한 효과라고 유추했다.

그의 천재성 효과에는 남을 가르치는 능력, 또는 남을 이해시키는 힘이 있었다. 손차희는 그와 함께 공부하면서 이 천재성의 영향을 받았다.

처음에는 이 천재성이 연구에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능 모의고사에도 적잖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윤수아와 최대우가 유학으로 방향을 잡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수능에 소홀한데도 모의고사에서 크게 떨어지지 않고 성적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그의 천재성이 이들에게 도움을 준 게 확실했다. 그와 함께 공부한 동료는 능력이 향상된다.

모의고사 공부를 열심히 하는 손차희에게는 그 영향이 더 뚜렷하다.

“현성아? 오늘 밥 사. 떡볶이. 콜?”

손차희의 강요에 고현성이 분루를 삼키면서 수락했다.

고현성과 고곽천재는 그날 저녁 떡볶이를 먹고 노래방에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당연히 모든 비용을 고현성이 냈다. 그 대가로 고현성은 노래방에서 손차희와 듀엣을 부르는 영광을 누렸다. 녀석의 의지를 다지게 한 시간이었다.

심기일전한 고현성은 일주일 후 재차 도전했다.

놀랍게도 순위는 바뀌지 않았다. 강우는 이번에도 400점 만점을 받았다.

“으아! 귀신같은 놈!”

고현성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여전히 도전 의지를 불태웠다. 어쨌든 녀석은 강우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 굴욕 속에서도 손차희에게 도전하려던 목적을 달성했다.

그 후 반복된 몇 번의 대결에서도 같은 양상이 계속됐다. 덕분에 강우는 대결 때마다 고현성에게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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