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0화 수능 준비 (3)
거실이 어둑어둑했다.
얼핏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뜬 강우는 휴대폰을 찾았다.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각, 세상은 고요에 잠겨있었다.
낮에 잠을 많이 잔 때문인지 눈이 말똥말똥했다. 다행히 낮에 먹은 약이 효과가 있어 열이 많이 내리고 두통이 가라앉아 살만했다.
이곳이 기숙사가 아닌 차도도 아파트란 사실이 떠올랐다. 지금 차도도의 간호를 받고 있다는 행복감까지. 이번에는 아파서 얻은 게 더 많았다.
“나 때문에 쌤이 고생을…….”
미안한 기분이 가득했다.
바늘이 떨어져도 들릴 고요함이 어느 순간 깨졌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차도도가 서재에서 일을 마쳤나 보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이 시간까지 연구에 열중하고 있었다니. 혹시 어학 공부했나?
차도도가 왜 그렇게 열심히 연구에 몰두하는지 궁금해졌다.
졸업한다는, 또 유학을 가겠다는 선명한 목표를 지닌 신새벽과 달리 차도도는 그런 뚜렷한 달성 목표가 없다.
그렇기에 지금 차도도를 저렇게 몰아붙이는 요인이 무엇인지 짚이는 게 없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멈추고 난 후 강우는 휴대폰을 들었다.
“쌤?”
- 강우니? 필요한 것 있어?
“아뇨. 주무세요?”
- 아직, 이제 막 자려고.
“늦게 주무시네요.”
- 보통 이 시간이야. 무슨 일이니?
막상 할 이야기가 없다.
“서재 올라가서 공부할까 싶어요.”
- 안돼! 넌 환자잖아? 푹 쉬어. 아! 너 오늘 또 혼날 짓 했더라?
“뭔데요?”
- 내가 쉬라고 했었지? 오늘 낮에 또 서재에서 공부했지?
어떻게 알았는지 차도도는 귀신이다.
“낮에 잠시 몸이 괜찮아져서…….”
- 그래도 무리하면 안 돼.
같은 집에 있고 소리만 치면 들릴 거리이니까 괜히 전화 요금 낭비한다고 비웃을지라도 상대를 가까이에 두고 전화로 주고받는 것도 어딘지 모르게 운치가 있었다.
전화기에 따스한 정이 전해지는 느낌이다.
“쌤? 고마워요.”
- 그래, 나도 고마워. 그만 자렴.
“쌤? 혹시…… 유명해지고 싶으세요?”
- 응? 갑자기 뭔 이야기야? 난 유명해지는 거 싫어.
“예전에 방송에는 같이 나가셨잖아요?”
- 그건 너 때문이었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묻니?
“수능 전국 수석을 하면 담임 쌤이 인터뷰한다고 해서요.”
일전에 들었던 손차희의 말을 떠올렸다. 만일 차도도가 원한다면 정말 수능에서 사고를 쳐볼 용의도 있다.
- 무슨 담임 인터뷰야…… 난 그런 거 안 좋아해.
“네, 그러실 줄 알았어요. 그럼 없던 일로.”
잠시 침묵이 흘러간 후 급한 차도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설마 너…… 수능 대충 보려는 건 아니겠지?
“네?”
- 시험은 성실하게 쳐야지. 답지에 그림 그리라고 치는 거 아니야.
수능 작전을 들킨 듯하다.
“솔직히 수능 점수 쓸 일도 없는걸요.”
- 그래도 장난은 안 돼. 대충 치면 혼날 줄 알아.
차도도의 목소리에 진심이 깔려있었다.
“알았어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전화를 끊고 천장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방송 예능에 나왔던 천재, 올림피아드를 석권했던 천재. 그런 천재가 이번에는 수능에서 전국 수석을 한다면?
그 천재를 기른 담임 선생님은 어떤 기분일까? 그러잖아도 중학교 때 비해 고등학교에서 월등히 성장한 그를 두고 선생님의 역할이 컸다고 평가받는 상황에서.
차도도가 원한다면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이 없잖아 있건만 그녀의 진심을 전혀 알 수 없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수능 당일까지 그를 괴롭힐 듯했다.
* * *
오랜만에 상담실에서 신새벽과 만났다.
그를 보더니 신새벽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왜 그래요?”
“망했어.”
“뭐가요?”
“내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데! 나도 영어 잘하거든? 그런데 어떻게 도도에게 밀리냐고!”
두 사람이 내기 삼아 친 GRE 시험에서 차도도가 간발의 차로 이겼다.
GRE 시험은 단순히 영어를 잘한다고 점수가 높게 나오지 않는다. 미국 대학교 졸업생 수준의 고급 영어 단어를 요구하기에 그야말로 단어 외우기 시험이라 할 수 있다. 작정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절대 잘 칠 수 없는.
그런 시험에서 이긴 차도도가 대단했다. 유학을 가려고 열심히 시험을 준비했던 신새벽을 이겼으니. 차도도가 시험을 준비한 기간은 길지 않았고 공부할 시간도 넉넉지 않았을 텐데. 그녀의 영어 실력은 예상보다 훨씬 대단했다.
미국에 갔을 때 차도도의 영어 실력은 놀라웠다. 요셉 교수나 헌팅턴 관계자들과 무난하게 대화했으니까. 하지만 회화와 영어시험은 다르다. 미국에 사는, 영어가 일상인 거지가 영어시험 성적이 잘 나올 리 없듯이.
두 사람의 대결에서 참패한 신새벽의 아쉬움을 충분히 공감했다.
아닌 듯하면서도 신새벽은 차도도에게 묘한 경쟁심을 품고 있다.
“내가 얼마나 이날을 기다렸는데!”
“아쉬워하지 마세요. 다음에는 이길 수 있을 거예요.”
강우가 위로했다.
정작 차도도는 시험 결과가 나온 뒤에도 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직은 유학에 뜻이 없다는 시위 같기도 하고.
하지만 영어시험을 끝냈으니 기본적인 자격은 마련한 셈이었다. 그다음에는 입학 원서를 내게 유도하면 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도도도 유학 가려나? 아직은 전혀 뜻이 없어 보이는데?”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 별다른 언질이 있었어?”
“그건 아니지만…….”
강우는 차도도의 노트북 바탕화면을 떠올렸다.
그곳에는 그들이 MIT에 갔을 때 함께 찍었던 고곽천재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 Passion for a better world.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정! 이 문구가 큼지막하게 들어간 사진이다. 아직도 이 사진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고곽천재를 향한 그녀의 애정과 미국 유학의 꿈을 버리지 못했음을 뜻한다.
무엇보다 이 문구가 차도도의 곳곳에서 눈에 띈다는 점은 희망적이다. 그녀가 연구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는 조짐이니까. 그리고 그때 그녀의 책에서 봤던 ‘이는 엠씨제곱’ 낙서까지.
그 모든 것이 그녀의 마음을 미국에 데려다 놓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강우는 그녀의 유학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했다.
“그건 그렇고 논문 준비는 어디까지 했어요?”
신새벽이 진행 중인 논문 연구를 펼치며 설명했다.
“이 부분에서 막혔는데…….”
화학이라기보단 수학으로 깊이 들어가는 부분이다. 차도도처럼 신새벽도 수학이 다소 약했다. 신새벽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했다.
설명해주려고 연필을 찾고 있자니 신새벽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런데 해결했어.”
“어떻게요?”
“은찬이가 정말 수학을 잘하더라? 괜히 올림피아드 메달리스트가 아니야. 이 개념을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증명하는데…… 입이 쩍 벌어지더라. 난 너만 천재인 줄 알았는데 은찬이도 만만찮았어.”
하은찬이라면 과학고에서 손꼽는 천재가 맞다. 워낙 그가 독보적이어서 다른 학생들이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예년이었으면 학교가 떠들썩했을 그런 학생이다.
그런 학생이 신이 나서 신새벽과 함께 고민했으니 그녀도 훌륭한 원군을 맞은 셈이다.
“혜림이에게도 연구과제 일부분을 떼줬어. 은찬이만큼은 아니어도 걔도 대단해. 성실하기도 하고. 예전의 나를 보는 기분이야.”
하은찬, 유혜림과 함께하는 연구는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훌륭했다. 중간중간에 그가 두 학생을 계속 지도하기도 했고, 두 학생의 능력 또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하기에 연구 속도는 매우 빠르다.
내버려 두어도 앞으로 1년 후면 만족할 결과를 뽑아낼 것이다.
강우가 조금 손을 보면 그 일정이 빨라져서 내년 여름이면 논문이 완성된다. 처음에는 그 정도를 기대하고 시작한 일이었으나…….
신새벽의 박사과정 유학을 고려하면 일정을 더 앞당겨야 한다. 입학 원서 제출 시한을 고려하면 내년 초까지는 논문을 저널에 실어야 한다. 그것도 완벽하게.
그래서 다시 확인했다.
“쌤? MIT에 박사과정 원서 넣을 거예요?”
“강우야, 넌 MIT가 확실하지?”
진지하게 그와 시선을 마주치는 신새벽의 눈동자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지금까지는 그냥 막연하게 MIT를 외쳤는데 확실한 결정을 내릴 때가 왔다. 그가 MIT로 간다면 신새벽도 MIT를 고수할 모양이다.
“네. 내년 여름에 무조건 입학해야죠.”
“좋아. 그럼 나도 같이 갈 거야.”
고마웠다. 같이 가자고 그렇게 말해도 대답 없는 차도도와 달리 신새벽은 자진해서 같이 가겠다고 했다.
그 고마움은 일단 마음 깊이 묻어두고.
“쌤? 그럼 우리 논문을 서둘러야 해요. 올해가 끝나기 전까지 저널에 제출하죠. 두 편 모두.”
현재 신새벽의 논문 실적은 두 편뿐이다. 석사학위 받을 때 썼던 국제 저널 하나와 국내 학술지 하나. 노창열이 뒤로 막았던 국내 학술지 게재는 국제 저널에 논문이 실리면서 자연스럽게 풀렸다. 모두 순리대로 된 셈이다.
다만 박사과정 입학 심사에서 그녀가 내세울 수 있는 이력은 국제 저널 하나뿐이다. 석사 논문으로 나쁘지 않은 실적이어도 논문 1편으로는 MIT에 명함을 내밀기 쉽지 않다.
그렇기에 하은찬, 유혜림과 쓰는 논문을 빨리 서둘러야 한다.
“나도 알아.”
신새벽도 상황이 급함을 안다. 따지고 보면 생일에 놀 정신이 없다.
“그러니까 앞으로 두 달, 무리해서라도 어떻게든 끝내보죠.”
“좋아!”
“열심히 안 하면 막 굴리는 거로…….”
“야!”
다시 신새벽의 주먹이 머리로 날았다.
“자꾸 그렇게 때리면 머리 나빠지거든요?”
“넌 좀 나빠져도 돼.”
티격태격하면서 계획을 짰다.
하은찬과 유혜림에게 다소 부하가 걸릴 듯하다. 지금부터 연말까지 두 학생의 앞에는 기말고사라는 거대한 암초가 도사리고 있어서 R&E에 전력을 투입하기 어렵다. 자칫 내신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다.
두 학생의 목표가 해외 유학이 아니라면 실행하기 어려운 계획이다. 그들도 강우를 따라 유학 가겠다고 목표를 잡고 있으니까 그나마 부담을 덜었다.
“쌤? 그러니까 열심히 해보자고요.”
“그래, 나도 노력할게.”
어째 학생과 선생님의 역할이 역전된 것 같지만, 그에게 신새벽은 훌륭한 선생님이다. 때로는 엉뚱하면서도 항상 신선한 활기를 불어 넣어주는. 어쩌면 먼 훗날에는 훌륭한 과학자가 되어 그의 연구 동료로 자리 잡을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뜻이 맞는 선생님을 학교에서 만난 것은 그에게 행운이었다. 차도도와 신새벽이 그와 함께하지 않았다면, 김윤택과 마도환 사이에서 얼마나 고생했을지 눈에 훤히 보였다.
신새벽 쪽은 대충 해결했고…… 남은 것은 고곽천재다. 그들도 곧 원서를 써야 하기에 급하기는 신새벽 못지않다. 역시 세월은 빠르고 3년은 너무 짧았다.
천재인 그에게 실패는 없다. 당연히 그가 작정하고 연구원으로 키우는 친구에게도 실패는 없다. 고곽천재는 졸업 후 그와 함께 유학길에 올라야 한다.
그때가 되면 그를 중심으로 훌륭한 연구 사단이 꾸려질 것이다.
차도도는…… 고곽천재를 챙기면 실적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녀는 석사 입학이니 실적 면에서는 단연 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