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2화 전국 수석 (2)
손차희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 고현성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무슨 승부?”
“그동안 했잖아? 최후의 승부가 임박했어!”
“상대가 돼야 하지.”
“난 오로지 의사가 되어 부인을 호강시켜줄 순수한 마음뿐이야! 그러니까 협조해.”
“꺼져!”
손차희가 손에 잡힌 물건을 집어 던졌다.
얼떨결에 피하면서 물건을 받은 고현성이 물건의 정체를 확인했다. 찹쌀떡이다.
“우왓! 차희의 기운이! 잘 먹을게! 차희야! 내기 확정한 거야! 내가 이기면 무조건 내 소원 들어줘야 해!”
이번에는 손차희가 책을 던지려는 순간 고현성이 후다닥 도망쳤다.
씩씩대는 손차희와 달리 친구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고현성이 저러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손차희를 앞지르겠다는 일념으로 고현성이 시험을 더 잘 치면 바랄 게 없다.
“모두 목표를 달성하길 바라. 유종의 미를 거둬야지.”
윤수아가 친구들에게 축복을 불어넣었다.
고곽천재는 수능에 목을 매지 않았기에 아무도 긴장하지 않았다.
평소 치는 모의고사와 같은 기분으로 그들은 시험에 임했다. 그들의 관심사는 수능 후 더 열심히 매달릴 핵융합 연구와 미국 대학입시에 쏠려 있었다.
* * *
차도도와 신새벽의 응원을 떠올리며 강우는 시험장에 들어갔다.
수학능력시험. 어떤 학생에겐 인생이 걸려 있으나 적어도 강우에게는 그렇지 않다.
문제지를 받고 강우는 호흡을 골랐다.
차분한 느낌이 나쁘지 않다. 시험지를 펴자 몸 구석구석에서 그의 천재성이 떠오르듯 발현되는 기분이다.
이런 기분을 안다. 어떤 문제라도 풀 수 있다는. 눈감고 찍어도 사고 칠 기분이다.
강우는 고민에 잠겼다.
이 시험을 어떻게 할까.
처음에는 답지에 막대를 그리고 잘 생각이었다. 괜히 시험을 잘 쳐서 타인의 주목을 받고 싶지 않다. 다른 학생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기도 싫고.
그런데 신새벽과 차도도가 절대 예술가는 되지 말라고 했다. 막대를 세울 작전이 원천봉쇄됐다.
‘그럼 어떻게 하지?’
그때부터 고민을 시작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는 차도도를 떠올렸다.
수능에서 전국 수석을 하고 차도도에게 MIT에 같이 가자고 할까? 이 요구를 차도도가 들어줄까.
다른 욕심은 없다.
‘진지하게 시험 치면 정말 만점 받을 기분인데…….’
차도도를 데려갈 방법이 눈에 보이자 욕심이 난다. 한편으로는 남들의 주목을 받기 싫다던 차도도의 말도 생각나고. 그 둘이 묘하게 어긋난다.
‘나의 선택은 무엇인가?’
한참 고민하던 강우는 마침내 연필을 들었다.
그리고 한 문제씩 신중히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 * *
- 윤수아 : 흑흑 또 틀렸어!
- 손차희 : 많이 틀렸어?
- 윤수아 : 아니. 차희 넌?
- 손차희 : 나? 비밀. 강우야! 넌?
- 강우 : 나도 비밀. 대우야?
- 최대우 : 흐아암(이모티콘).
- 강우 : 키스할 수 있을 것 같아?
- 최대우 : 물 건너갔어. 울음(이모티콘).
남들이 시험 결과를 물을 때면 강우는 비밀이라는 말로 일축했다.
마음을 먹으면 어떤 점수든 받을 수 있는 강우이기에 모두가 그의 점수를 궁금해했다.
차도도가 물었을 때도 강우는 미소만 짓고 고개를 저었다.
“학교에서 가채점해서 내라는 말 못 들었어?”
“진짜 기억 안 나요.”
“거짓말! 막 찍었니?”
“아뇨, 찍은 문제 없어요.”
“어휴.”
못 말리겠다는 듯 차도도가 고개를 저으며 물러섰다. 찍지 않았는데도 몇 점인지 모르겠다니 도무지 심보를 알 수 없었다. 최상위권은 몇 개 틀리지 않기에 가채점표가 거의 정확하다.
강우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쌤? 아무래도 각오 단단히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왜? 나는 신새벽 쌤처럼 맛있는 것 못 해 먹이는데?”
아침부터 점수를 물으며 괴롭히는 신새벽에게 한소리 한 것이 차도도에게도 들어갔나 보다.
“에이, 제가 어떻게 하늘 같은 선생님이 만든 요리를 먹어요?”
“너 지금 내가 요리 못한다고 흉보는 거지?”
점수 알아내기를 포기한 차도도가 그를 노려보다가 가버렸다.
전국 수석이 눈앞에 보인다. 물론…….
* * *
수능 성적이 발표됐다.
3학년 3반이 물리강의실에 모두 모였다.
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자신의 성적을 기다렸다. 일생에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서류봉투를 열고 차도도가 개인 점수표를 꺼냈다.
이어서 다소 굳은 표정으로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 반에서…… 무려 전국 수석이 두 사람 나왔습니다!”
“와아!”
학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로 환영했다.
다시 학생들을 쭉 둘러보면서 차도도가 호명했다.
“손차희!”
“네!”
손차희가 일어나서 앞으로 나갔다.
차도도가 손차희에게 개인 성적표를 주면서 칭찬했다.
“이번 수능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은 전국에서 모두 세 명입니다. 손차희가 당당하게 그 한 자리를 차지했어요! 축하해요!”
우레 같은 박수 속에서 손차희가 학생들에게 허리를 굽혔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학생들의 환호 속에 자리로 들어간 후 차도도가 한숨을 쉬며 성적표를 꺼냈다.
“강우!”
“와아!”
바로 전처럼 학생들이 환호했다.
강우는 뻘쭘하게 일어나서 앞으로 나갔다.
한숨을 푹푹 쉬던 차도도가 말했다.
“강우 군도…… 전국 수석이에요. 뒤에서. 무려 수능을 빵점 받았어요!”
“억!”
학생들이 비명을 터트렸다.
“물론 수능 빵점 엄청 많아요. 당일 결석해서 시험 안 쳐도 빵점이고 몰라서 공란으로 답지를 비워도 빵점이고. 그런데 강우 군은…….”
차도도가 매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무려 다 풀었는데, 한 문제도 비워놓은 문제가 없었는데 하필이면 모조리 정답을 피해 가서 빵점을 받았습니다. 당당하게 실력으로 전국 수석을 뒤로 차지했어요.”
“큭큭큭.”
학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차도도가 성적표를 주면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정답이 저랑 안 친한지 자꾸 피해가더라고요.”
“그래도 빵점이 말이 돼?”
“그날따라 뭐에 씌었는지…….”
“이게 입만 살아서는!”
차도도가 손을 번쩍 들었다.
“으아악!”
강우가 재빨리 피하려는데 강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김윤택이었다.
강의실로 들어선 김윤택이 강우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차도도 선생님? 손차희 학생과 교장실로 오랍니다. 기자들이 몰려와서…….”
입술을 깨물며 차도도가 개인 성적표 더미를 강우에게 넘겼다.
“강우 넌 성적표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집에 가지 말고 강의실에서 두 손 들고 벌서고 있어!”
차도도와 손차희가 강의실을 나갔다.
내심 못마땅한 듯 혀를 차던 김윤택마저 사라진 후 학생들은 자신의 성적표를 받았다.
윤수아와 최대우도 그럭저럭 괜찮은 점수를 받았다.
성적표를 받은 고현성은 환호성을 지르며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예쓰!”
“어? 현성이 너 차희 이겼어?”
손차희가 만점이니 손차희를 이기기는 불가능하다.
“아니.”
“그런데 왜 좋아해?”
“이 성적이면 차희를 의사 부인으로 만들 수 있어!”
“어휴, 미친 녀석!”
고현성도 성적이 잘 나왔다. 그동안 강우와 손차희에게 구박받으면서 열심히 노력한 결과다.
정작 이 미친 녀석은 강우를 향해서는…….
“아오! 아깝다! 강우 너랑 내기했으면 무조건 내가 이겼는데!”
“그러길래 내가 내기하자고 했잖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고등학교 내내 강우를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는데 정작 유일하게 이길 기회를 놓쳐 버렸다.
어떤 학생은 성적표에 환호하고 어떤 학생은 성적표에 절망했다. 수시로 대입을 결정지은 학생들은 비교적 무덤덤했고 다른 학생들은 희비가 엇갈렸다.
그들은 12년간 노력한 결과를 수능 최종점수로 받았다. 대입이 끝나면 잊힐 점수여도 그 영향력만은 영원히 남아 그들의 인생을 조종한다.
성적표를 받은 학생들이 강의실을 떠나고 실내에는 강우와 윤수아, 최대우만 남았다.
“강우야? 왜 그랬어?”
“뭘?”
“뒤에서 전국 수석.”
“난 기둥을 세우고 싶었는데…… 신 쌤이 못 세우게 하니까 어쩌다 보니…….”
시험 당일 강우가 결정한 최후의 방법은 모든 문제를 풀어서 정답이 아닌 답을 체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차도도 쌤이 나에게 시끄러워지기 싫다고 분명히 말했었거든.”
결과적으로 손차희 때문에 차도도의 바람은 달성되지 않았다.
그날 저녁 그들은 손차희와 차도도가 출연한 뉴스를 시청했다.
- 수능에서 만점을 받은 손차희 학생은 고려 과학영재고에서도 전교 일등을 다투는 수재로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은상, 금상을 딴 천재였습니다. 수능 만점을 받은 비법은 친구들과 즐겁게 공부한 것이 주효했다고 말했습니다. 손차희 학생은 3년 동안 도서관을 지킨 성실파로…….
- 고려 과학영재고에서 수능 수석을 차지한 손차희 학생의 담임 차도도 선생님이 화제입니다. 남다른 미모를 자랑하는 차도도 선생님은 한때 세간의 주목을 받은 천재, 강우를 키운 선생님으로 알려졌습니다. 우수한 학생을 키우는 남다른 재주가 이번에도 확인된 셈입니다. 차도도 선생님은 작년 말에 예능프로에서 놀라운 미모와 천재적인 머리로 관심을 끌었고 가수를 뺨치는 가창력은…….
그 아래 달린 댓글도 가관이었다.
- 여신 납셨다!
- 대한민국 최고 천재 선생님!
- 아니지, 대한민국 최고 미녀 선생님이다!
- 웬만한 가수 쌈 싸 먹지.
- 미녀 쌤 밑에서 공부되겠냐? ㅋㅋㅋ
- 근데 그때 그 천재는 수능 어케 됨? 아는 사람?
손차희와 차도도의 기사를 강우는 즐겁게 훑어보았다.
“어휴, 이번에도 오래가겠네.”
차도도를 향한 세간의 열기가 식으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다. 티비 출연 후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유튜브에서 예능 클립이 돌아다니며 관심을 끌고 있으니 이번에도 그 불씨가 쉽게 꺼지기 어렵다.
손차희의 전국 수석은 미처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손차희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으나 정말 만점을 받을 줄은.
물론 강우는 자신의 행동에 후회가 없다.
그는 진심으로 손차희를 축하했다. 그리고 차도도를 어떻게 유학의 길로 보낼지 여전히 걱정했다.
* * *
물리 3실험실.
고곽천재의 이름이 붙은, 이 학교에서 가장 비싼 장비가 설치된 바로 그 실험실이다.
정작 강우는 이 값비싼 기자재를 한 번도 사용할 기회가 없었으나 지금 이곳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동이었다.
이 실험실 관리를 차도도가 맡았기에 이 실험실의 출입이 가장 편했다.
졸업을 앞둔 고곽천재는 세미나실을 선점해서 후배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이곳에 모여 프로젝트를 논의하고 연구했다.
실험장치를 피해서 한쪽 구석 탁자에 둘러앉아 네 사람은 연구에 몰두했다.
“요셉 교수님이 대우 논문을 저널에 제출했다고 하더라. 아마 조만간 다시 연락 올 거야. 수정 사항은 거의 없을 거라고 예상하시던데.”
차도도가 최대우 논문의 현황을 알렸다.
최대우가 주먹을 쥐고 환호했다.
강우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뭘 그리 좋아해?”
“방학 때 놀아도 되잖아?”
“졸업인데 방학은 무슨.”
물론 강우는 최대우의 기쁨을 눈치챘다.
기숙사가 문을 닫으면 최대우와 강우는 갈 곳이 사라진다.
강우는 서울 외곽, 학교 근처에 적당한 원룸을 구해서 유학을 떠날 여름까지 거주할 예정이다. 그는 차도도, 신새벽을 비롯해 고곽천재와 계속 연구를 진행해야 하기에 시골에 처박혀 머물 수 없었다. 헌팅턴 연구비로 원룸을 유지할 비용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서 내린 결정이다.
차도도와 신새벽이 자기네 집에 와 있어도 괜찮다고 했으나 예의가 아니라며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