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3화 전국 수석 (3)
최대우는 기숙사가 문을 닫으면 울릉도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곳에서 별 보며 지내겠다나.
그래서 일단 하던 일을 끝내야 했다. 물론 그도 계속 울릉도에 머무를 수는 없고 수시로 서울로 나들이를 해야 한다. 서울로 왔을 때는 잠시 강우네 원룸에서 숙식하기로 했다.
최대우의 논문이 마무리되자 이번에는 윤수아가 나섰다.
윤수아는 최근 들어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혼자만 뒤처질 수 없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그녀는 MIT의 슈퍼컴을 밤낮없이 혹사했고 지금은 그럴듯한 결과를 들고 실험 논문 결과와 비교하고 있었다.
다른 학생과 달리 국제 올림피아드 이력이 없는 윤수아는 입시에서 내세울 것이라고는 이 연구 논문밖에 없다.
“난 그동안 새로 개발한 알고리즘을 비교한 후 슈퍼컴의 연산 능력을 최대로 활용하는 병렬형 알고리즘을 구축했어. 다만 이 결과로 논문을 구성하기 곤란해서…….”
그녀는 아직 경험이 부족한 단점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수아야, 연말까지는 저널에 제출해야 하니까…….”
강우가 다그치려 할 때 차도도가 개입했다.
“수아 논문은 내가 봐줄게. 방금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차도도가 논문을 일부분 수정했다. 작은 고침이었으나 그 덕분에 논리가 명확해지고 풀어야 할 문제도 분명해졌다.
“아! 쌤! 그게 더 좋겠어요.”
윤수아의 안면이 환해졌다.
강우는 차도도의 해결책에 내심 매우 놀랐다. 지금 차도도는 완벽하게 지도교수 역할을 했다. 이제 그녀는 강우에게 배우는 처지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연구를 수행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단계에 올라섰다. 즉 대학교수 역할까지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마지막은 손차희. 손차희는 강우와 함께 연구해왔다. 윤수아나 최대우가 약간은 독자적인 노선으로 연구에 매달렸다면 손차희는 강우와 공동연구에 매진했다.
다만 손차희는 최근 들어 시간이 부족했다. 바로 수능 때문이다. 전국 수석 하는 바람에 유명세를 치르고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아 연구에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덕분에 가장 지지부진한 결과를 드러냈다.
“내가 막힌 부분은…….”
손차희는 미흡한 부분의 이유를 설명했고 강우는 손쉽게 해결책을 제시했다.
손차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미 3년이나 흘렀건만 그녀는 강우의 능력을 여전히 헤아리기 힘들었다. 이젠 비슷하게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설명하는 강우를 보니 아직도 먼 듯했다.
“연구의 진행 상황을 보니 연말까지 저널 제출은 어렵지 않아 보이네요. 모두 고생 많았어요. 지난 3년간 했던 연구를 모두 잘 마무리해요. 이 연구를 통해 한층 성장하셨기를 기대합니다.”
전체에게 공지하는 것이라 강우는 높임말을 했다.
마치 대단원의 막을 내리듯 마무리 짓자 윤수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프로젝트는 이제 절반인데?”
헌팅턴 프로젝트는 3년이고 이제 1년 반이 지났다. 아직 앞길이 창창하다. 실제 연구 내용으로도 그렇고.
“우리는 연구를 계속할 거예요. 예전에도 말했듯이 원한다면 진학 후에도 계속 이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어요. 다만 앞으로 프로젝트의 성격을 조금 바꿀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진학을 위한 실적 만들기에 급급했다면 앞으로는 핵융합의 상용화를 위한 실질적인 개발에 주안점을 둘 거예요. 대학 입학 후부터는 당분간 실적에 쫓기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럼 유학 가서도 계속하는 거야?”
“그렇죠.”
모두가 환영했다.
다만 차도도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처지였다.
고곽천재는 대입 원서를 어떻게 넣을지 즐겁게 의견을 교환했다.
“강우는 MIT? 다른 곳은 안 넣고?”
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은 강우다. 향후 그가 있을 학교가 나머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
“그러려고. 굳이 많이 넣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 나도 MIT에만 넣을까?”
“언제는 아이비리그라며?”
윤수아와 손차희가 툭탁거렸다. 보통 여러 대학에 지원하고 그중에서 입학 허가가 난 학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
그들이 잡담을 대충 마무리했을 때 강우는 손차희에게 조용히 신호를 보냈다.
“쌤? 쌤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손차희의 질문이 모두의 시선을 차도도에게 집중시켰다.
당황한 차도도가 조용히 손을 저었다.
“난……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난 학생을 가르치는 게 좋아.”
“쌤도 같이 가요. 미국에.”
“그럴 처지가 아니란다.”
모두가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최근 들어 강우 못지않게 차도도도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지난 3년간 그들 사이에 든 정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왜 못 가시는데요?”
“그건…….”
차도도가 입을 닫았다.
궁금해도 다그칠 수 없었다. 분위기가 급격하게 식었다.
결심한 손차희가 다시 말했다.
“쌤? 예전에 전국 수석 하면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잖아요?”
“그랬었지.”
“그럼 지금 소원을 말할게요. 쌤도 대학원 과정에 지원하세요. 같이 유학 가는 거로.”
“그건 안 돼.”
“약속 어기면 안 되잖아요?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인데.”
차도도도 난감해졌다.
그런 약속을 하기는 했는데 이렇게 당당하게 요구할 줄은 몰랐다.
차도도는 강우를 노려봤다. 이 사태를 유발한 장본인은 강우가 분명했다.
강우는 눈을 돌리지 않고 차도도와 시선을 맞췄다. 여기서 밀리면 차도도를 데려갈 수 없으니까.
“그래도 안 돼.”
차도도의 버티기와 고곽천재의 고집이 맞물렸다.
아무리 약속이어도 상대의 미래를 옭아맬 권리는 없다.
“미안해.”
차도도는 여전히 물러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강우는 전략을 가다듬었다. 차도도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그가 꿈꾸는 찬란한 핵융합의 미래에서 차도도는 큰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녀가 유학 갈 수 없는 이유를 추궁하고 싶어도 이 자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없을까.
“쌤? 그럼 소원을 원서 제출까지로 하죠. 합격하고 안 가도 되니까. 그건 어때요?”
그나마 차도도가 수용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차도도는 거절했다.
“대입은 그래도 상관없어. 보통 서너 군데 합격해두고 고르니까. 그런데 대학원은 달라. 원서 제출부터 지도교수와 상담해야 해. 가겠다고 했다가 가지 않으면 그 교수도 타격이 크거든. 그래서 함부로 원서를 낼 수 없어.”
“요셉 교수라면 이해하실 거예요. 요셉 교수는 예전부터 쌤에게 대학원 진학을 권하셨었잖아요?”
“그렇지만…….”
“일단 원서를 제출하죠. GRE도 쳤으니 써먹어야죠?”
그제야 차도도는 전반적인 계략을 눈치챘다. 예전에 신새벽이 GRE 시험 내기를 요구한 것도 이런 상황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손차희의 전국 수석이 순전히 이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만일 손차희가 수석이 아니었다면…….
차도도의 시선이 강우에게 꽂혔다.
‘저 녀석이 수석을 해버렸겠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녀와 함께하고픈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녀가 뭐라고 변명할 틈도 없이 강우가 선언했다.
“그럼 결정합니다. 쌤은 일단 원서를 내시고요. 정말 입학할 건지는 천천히 결정하기로 하고요. 거절은 없습니다.”
학생들을 좋아하기에 차도도는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그 시점에 고곽천재는 전원 미국 유학을 결정지었다. 물론 원서를 낸다고 뽑아주리란 보장은 없다.
* * *
강우에게는 급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신새벽의 거취다. 신새벽은 하은찬과 유혜림의 미래와 맞물려 있다.
다행히 신새벽은 MIT 화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할 의지가 있기에 차도도와 같은 문제는 없었다.
다만 그녀는 연구 실적이 따라주지 못했다.
차도도의 석사과정 지원과 달리 신새벽은 박사과정이다. 해외 저널 논문 한 편으로는 명문 MIT에 명함을 내밀기 어렵다. 그 때문에 그녀에게 논문을 서두르자고 했는데…….
아직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하은찬과 유혜림이 연구에 익숙지 않아 제 역할을 하기 쉽지 않아서다. 그렇다고 신새벽 혼자서 두 논문을 한꺼번에 처리하기도 만만찮고.
이래저래 총체적인 난국에 빠져 있었다.
정작 신새벽은 그리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상담실에서 만났을 때 신새벽은 딴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강우야? 넌 왜 수능을 그렇게 쳤어?”
“뭘 어떻게 쳐요? 전국 수석 했잖아요? 뒤에서. 답안지를 모두 써넣고 빵점인 사람은 제가 유일해요.”
모든 문제를 다 틀리기도 쉽지 않다. 확률로 따지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푸흐흐, 그러니까 그게 바로 모든 문제를 다 알았다는 거잖아? 마음먹었으면 차희처럼 수석 했을 텐데.”
“그러니까 다행으로 아세요.”
“다행이라니?”
“수석 했으면 쌤을 팍팍 굴렸을 거거든요?”
퉁명스러운 강우의 대답에 신새벽이 안면을 확 붉히고는 버럭 소리쳤다.
“야!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야! 이게 다 컸다고 머리 위로 기어오르고 있어! 오늘 한번 맞아볼래?”
“으아악!”
강우는 과장된 신음으로 두 팔을 들어 그녀의 주먹을 막았다.
그렇게 툭탁거리던 신새벽이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졸업하고는 어디에서 살 거야?”
“원룸 하나 구했어요. 기숙사 나가면 바로 입주.”
“잘했어. 어딘데? 내가 가끔 가서 밥해줄까?”
귀가 솔깃했다. 신새벽의 요리 솜씨야 충분히 탐이 나니까.
“안타깝게도 냄비랑 그릇이 없네요. 아직 숟가락도 없는데 무슨 요리를…….”
“어…… 그렇네.”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신새벽이 시무룩해졌다.
지금은 이런 시답잖은 고민을 할 때가 아니다. 신새벽을 확실하게 미국으로 끌고 가려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자, 그래서 원서는 어떻게 할 거예요?”
“써야지.”
“붙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강우가 알아서 붙여주겠지.”
“어휴, 내가 MIT 입시 책임자도 아니고…….”
“예전에 네가 책임진댔는데?”
“그건 쌤 졸업이었어요.”
“그거나 이거나.”
“엄연히 다른 건데…….”
“여자를 책임지겠다고 했다가 발을 빼면 나쁜 자식이야.”
이게 왜 그렇게 해석되는지 모르겠으나 신새벽은 천하태평이다.
조금의 흔들림 없이 그를 믿고 있다는 의지가 확연해서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다.
지금부터라도 논문을 어떻게든 마무리 지어 저널에 제출하면 원서 제출 마지막쯤에 출간될 가능성도 있다 해도 그 일정에 목숨을 걸기엔…….
차도도는 이미 그녀 이름으로 저널에 세 개씩이나 냈고 막강한 파워를 지닌 요셉이 뒤를 받치고 있다. 그렇기에 논문의 심사 기간이 매우 단축된다.
반면 신새벽에겐 그런 뒷배가 없다. 출간 논문도 오직 한편이다. 신속한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국제 저널 논문 한 편으로는 지도교수의 마음을 얻어 입학 허가를 장담하기 쉽지 않다.
MIT 화학과 교수 측에서 보면 신새벽 정도의 학생은 널려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레 포기할 수는 없는 일. 그와 함께 유학 가겠다고 의지를 불사르는 그녀에게 차마 못 할 짓이기도 하고.
“그…… MIT 화학과 교수가 누구였죠?”
“브라이언 윈터.”
지도교수라고 확고하게 방향을 잡은 듯 신새벽은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같은 MIT여도 요셉에게 부탁해서 청탁할 수도 없으니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강우의 고민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