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5화 MIT 지원 (2)
- 차 선생님은 헌팅턴 프로젝트 기간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즉 본인 스스로가 프로젝트를 보유한 경우라 볼 수 있어요. 지도교수에게 별 부담이 없죠. 아! 물론 이건 행정적인 문제이고 차 선생님의 능력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차 선생님의 능력은 대학원에 입학하기에 충분하니까요.
차도도는 자신을 높게 평가해주는 요셉이 고마웠다.
“어쨌든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 그러니까 너무 고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한테 부담스러운 일도 아니고요. 사정을 들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언제든 결심하면 다시 학교에 다니시면 되지요.
“예, 감사합니다.”
차마 대답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차도도는 마음을 정리했다. 결심할 일이 과연 있을까. 강우가 MIT에 입학하고 요셉과 가까이 있게 되면 자신이 낄 공간은 사라지니까.
- 아, 그리고 최근에 보내신 논문은 모두 처리했습니다. 인터넷판에는 이미 출간되었고요. 강우 군이 서둘러 달라고 해서 조금 힘을 썼습니다. 그 학생들이 미국으로 오나 보죠?
“현재로는 MIT에 입학할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강우도 MIT에 원서를 넣었고요.”
- 우수 학생은 학교의 복덩이지요. 차 선생님도 언제든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차도도는 한동안 멍한 상태로 거실에 서 있었다.
진학하지 않을 줄 알면서도 내심으로는 조금 기대했었던가. 결정하면 마음이 후련해야 할 텐데 아쉬움이 더욱 짙어지고 기분이 가라앉으니.
밖에 보이는 도심의 불빛을 보면서 강우와 핵융합을 운운했던 때가 엊그제인데 이제 슬슬 그 궤도에서 이탈하는 자신이 보이는 듯하여 착잡해졌다.
* * *
요셉 교수는 연구실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강우와 차도도를 모두 받고 싶었는데 불가능해졌다.
그나마 핵심인 강우를 건진 것은 행운이어도 학부와 대학원을 다른 학교로 지원하는 경향이 강한 미국이니 강우가 대학을 졸업한 후에 자신의 밑으로 들어온다는 보장은 사실상 없다.
앞으로 4년간 강우를 옆에 둘 수 있는 복으로 만족해야 하나.
입학을 포기한 차도도는 불합격 처리하면 되고 입학이 확실한 강우를 곁에 두고…….
요셉은 다시 전화를 들었다.
긴 울림 끝에 반대편에서 전화를 받았다. 자고 있었을까.
- 요셉 교수님?
“강우 군! 밤늦게 미안하네.”
-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MIT에 지원했다고…….”
- 네, 원서 넣었습니다.
“다른 학교도 넣었나?”
- 아뇨. 굳이 넣을 필요가…….
자신감 넘치는 행동에 요셉은 실소를 머금었다. 저러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미리 축하하네. 논문은 잘 받았고 예정대로 처리했네. 앞으로 연구를 어떻게 할 건가?”
- 올여름에 헌팅턴과 프로젝트 계약을 연장할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요셉 교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의도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아직 1년 반이나 남지 않았나?”
- 본격적인 상용개발에 들어가려고요.
“독자적으로 추진한 연구 결과가 있나 보군.”
- 당연하죠.
요셉 교수는 짧은 강우의 설명을 경청했다.
강우의 주장은 놀라웠다. 핵융합 상용화를 확신하는 것도 놀라웠으나 그 기간을 대폭 단축했다. 적어도 지금까지 추정했던 기간을 무려 절반 이상 단축하겠다는 의지가 전달되어왔다.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인류역사상 정말 획기적인 일이네.”
- 별다른 변수만 없다면요.
“헌팅턴에서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겠군. 하여튼 강우 군이 얼른 미국으로 건너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겠네.”
연구계획을 모두 들은 요셉은 전화를 마무리하려 했다.
- 교수님, 차 선생님 입학을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학부생과 달리 대학원생은 지도교수의 의지에 입학이 달려 있다.
“본인이 고사하던데…….”
- 그러시리라 예상했습니다. 일단 합격을 시켜두고 휴학 처리하거나…… 이런 식으로 할 수는 없을까요? 물론 교수님께 폐가 되지 않는다면요.
“어렵지 않네만.”
- 그럼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계속 설득할 생각인가 보군.”
- 그래야죠. 차 선생님이 안 계시면 핵융합 연구가 확 늦춰지니까요.
요셉도 강우의 말에 동의했다.
강우와 차도도가 함께 MIT로 건너와서 연구에 매진하는 방식이 가장 좋은데 현실에서는 쉽지 않을 모양이다.
“알았네. 자네도 노력해보게.”
요셉은 강우가 MIT 역사상 가장 기묘한 천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미국으로 건너올 여름이 기다려졌다.
* * *
졸업 후 학교를 떠나니 고곽천재가 모일 일이 사라졌다.
강우는 좁은 원룸에서 연구 효율이 극도로 저하됨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버텼으나 책을 늘어놓을 공간마저 부족하니 효율적인 연구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근의 스터디 카페를 이용하기도 한계가 있었다. 답답함은 덜해도 개인에게 주어진 좁은 책상과 공간은 연구에 적합하지 않았다. 참고 도서와 참고논문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머리를 싸매야 하는데. 이런 환경을 여름에 미국으로 건너갈 때까지 감수해야 한다니 한숨만 쏟아졌다.
2월 마지막 날 저녁, 강우는 차도도의 아파트로 초대받았다.
오늘은 그의 생일이고 법적으로도 성년이 되는 날이다. 생일축하 파티가 열렸다.
차도도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방문했을 때 거실에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차도도와 신새벽, 거기에 손차희와 윤수아. 울릉도에 틀어박혀 있는 최대우만 빠졌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이 반가웠다.
“대우는 아직도 눈에 갇혀 있는 거야?”
“설마 지금까지?”
“굶어 죽진 않았겠지.”
시답잖은 농담을 윤수아와 교환하다가 강우는 최대우에게 톡으로 안부를 전했다. 3월이 되면 다시 서울로 오겠단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자! 강우야! 오늘 뭐 먹을래?”
앞치마에 국자를 든 차도도는 겉모습에서 자신감이 넘쳤다.
그녀가 설치면 오늘 생일 밥을 굶어야 한다. 이제는 요리실력이 나아졌다는 변명을 믿을 만큼 강우는 바보가 아니었다.
강우는 신새벽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내가 도도를 막 굴려서 맛있는 잔칫상을 만들어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
“나도 많이 늘었거든!”
“그래봤자 너보다 요리 못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몇 없을걸?.”
신새벽의 호통에 차도도가 바로 쪼그라들었다.
어쨌든 그렇게 차려진 생일상은 푸짐했다.
그들에게는 대학 진학이 화제였다.
손차희와 윤수아는 서너 군데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다. 지금은 MIT 발표를 기다리는 중이라 했다. 강우는 MIT 한 곳만 넣었고 마찬가지로 합격자 발표가 뜨기를 기다렸다.
차도도는 물리학과 요셉 교수 밑으로 석박사통합과정을 지원했고 신새벽은 화학과의 윈터 교수에게 박사과정을 지원했다.
“발표일이…….”
“3월 14일.”
“아! MIT는 파이데이 때 합격자를 발표하지.”
이 학교는 어딘지 모르게 이공계스러운 구석이 많다. 합격자 발표로 파이데이를 기념한다니. 어쨌든 아직 보름이 남았다.
“우와! 그럼 우리 모두 MIT에서 단합대회를 열 가능성도 있는 거죠?”
“그렇지.”
신새벽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떨어질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이 바로 신새벽인데 그 표정은 가장 자신만만하다. 이 모두가 강우를 향한 믿음이다.
“우리 모두 꿈이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꿈은 이루어진다! 잘 알잖아?”
“중앙고에서 강우가 했던 연설이 기억나. 꿈이 빛나는 것이 아니라 꿈을 좇는 사람이 빛나는 거라고.”
차도도가 강우의 흑역사를 꺼냈다.
모두가 그 연설이 감동이었다고 강우를 추켜세웠다.
강우는 고곽천재 모두가 꿈을 이루기를 바랐다. 거기에 차도도와 신새벽까지. 좋은 사람에겐 좋은 일만 있어야 한다.
밥을 먹은 후 거실 중앙에서 케이크에 초를 꽂았다.
생일축하 노래와 박수 소리. 왁자지껄한 소동이 한차례 지나갔다.
“쌤! 우리 오늘 술 마셔요!”
윤수아가 호기롭게 제안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이제는 술을 마셔도 될 나이다. 이곳에 올 때마다 차도도의 와인을 노리더니 기어코 목적을 달성하려는 기세다.
“이 집에 술이 있어?”
말리는 차도도를 무시하고 신새벽이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갔다.
“있네! 와인 천지다!”
윤수아도 신이 나서 신새벽에게 붙었다. 한참 후 신새벽과 윤수아가 와인을 골라 왔다.
“이게 제일 맛있을 것 같아.”
“와인 전문가?”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거야! 제일 예쁜 거로 골랐지!”
신새벽의 항변에 차도도는 한숨만 내쉬었다.
“쌤? 술 괜찮아요?”
강우는 유독 술이 약한 차도도를 염려했다.
“괜찮아. 한잔이야 뭐.”
예전에도 와인 한 잔에 맛 가는 걸 본 적 있었는데? 어쨌든 본인이 괜찮다니까.
반쯤 채운 와인잔을 받아들고 모두가 둘러앉았다.
“선물 없어요?”
강우의 재촉에 선물이 펼쳐졌다. 대부분 옷이다. 이젠 대학생이니 옷 스타일도 바꿔야 한다나. 실용적이라 강우는 충분히 만족했다.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가 강우는 최근의 고민을 꺼냈다.
“쌤! 요즘 원룸에서 연구하다 보니까 효율이 별로예요. 제가 학교에 잠시 나가면 안 될까요?”
“세미나실 쓰게?”
“저도 그래요. 예전처럼 모여서 같이 연구했으면 좋겠어요.”
손차희도 거들었다.
프로젝트의 가장 큰 목적이었던 대학 입학 실적이 마무리되고도 아직 프로젝트 기간이 절반이 남았다. 지금처럼 비효율적으로 각자 연구할 수는 없다.
강우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차도도 역시 최근에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신 쌤도 요즘은 상담실 안 쓰시죠?”
신새벽은 여름에 휴직한다고 확신해서 신학기에는 담임을 맡지 않았다. 차도도는 다시 1학년을 담당했다. 작년에 전국 수석을 차지한 손차희의 담임이었다고 알려져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선생님이 됐다.
예전에는 미모 때문에, 티비에 나온 덕분에 인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실력마저 최상인 선생님으로 인정받았다.
“나도 요즘은…….”
논문이 급하지 않으니 신새벽이 애용하던 상담실은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갔다.
“물리 실험실을 저희가 쓰면 안 될까요? 저희가 기증한 기자재를 둔 3 실험실은 실제로 실험을 거의 안 하잖아요? 어차피 비어있으니까…….”
차마 세미나실을 점거해서 후배에게 민폐를 끼칠 수 없었기에 강우는 다른 방안을 꺼냈다.
“그래, 거기면!”
손차희와 윤수아도 찬성했다.
학생들의 제안이 나쁘지 않아 차도도도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교장 선생님께 말씀드려볼게. 너희가 유학 떠나는 여름까지 연구실로 쓰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해볼게.”
학교에서 공부할 자리가 생기면 최상이다.
“으, 맛없어.”
손차희가 와인의 쓴맛에 얼굴을 찡그렸다.
“난 맛있는데?”
윤수아가 와인 품평에 가담했고 저마다 평을 늘어놓았다.
강우도 감격 속에 와인을 입에 머금었다.
술 마시는 경험이 인생의 처음이 아니라…… 손강우가 죽고 강우로 빙의한 후 처음이었으니 무려 3년 만이다.
과거의 술맛을 아직 잊지는 않았다. 손강우 시절에도 술꾼은 아니었건만 오늘 마시는 술이 무척 달았다.
입에 머금고 맛을 음미하고 있자니 신새벽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 자식! 술꾼이었잖아!”
“에이, 술꾼은 무슨!”
강우가 얼른 손을 저었고 미심쩍은 듯 차도도가 그를 노려보았다.
기세를 잡은 신새벽이 그를 다그쳤다.
“야! 제대로 말해! 너 술 마신 적 있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