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6화 MIT 지원 (3)
강우는 눈치를 보면서 대답했다.
“에이, 전 착한 학생이었다고요!”
“착하긴 뭐가 착해! 그 마음 누가 모를 줄 알고!”
정말 마시고 욕먹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강우는 답답해서 가슴을 탕탕 쳤다.
신새벽이 팔을 걷어붙이면서 제안했다.
“오늘 진실게임 해봐야 해. 반드시 진실만을 말하고 대답 못 하면 술 마시기!”
흥미 가득한 시선이 강우에게 모였다. 오늘 그를 희생양으로 삼을 모양이다.
이젠 모두 대학생이라고 대학생스러운 게임을 한다.
어쨌든 강우는 불리할 게 없어서 흔쾌히 가담했다.
남은 와인으로 잔을 채우고 빈 병을 만든 다음 중간에 병을 놓고 돌렸다. 놀랍게도 강우를 향해 병이 멈췄다.
“거봐라! 내가 질문할게. 수능시험 제대로 쳤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질문이다. 제대로 치고도 모든 문제의 정답을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으니.
“열심히 쳤는데 결과는…… 안 쳤어요!”
강우는 순순히 털어놓았다.
“거봐! 이 자식 제대로 쳤었으면 우리 학교에서 전국 수석이 두 사람 나오는 건데.”
신새벽이 방방 뜨는 사이 다시 와인 병이 돌았다.
초반에는 대답하기 어렵지 않은 질문이어서 벌칙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곧 분위기가 변했다.
“차 선생님이 사랑한 학생의 이름은?”
신새벽이 이상한 질문을 내고 답을 유도했다.
차도도가 거리낌 없이 바로 대답했다.
“손차희! 윤수아! 난 모든 학생을 사랑해.”
원론적인 대답이었다.
“야! 그런 질문이 아니잖아?”
“그럼 질문을 더 똑바로 하든가.”
“알았어. 두고 봐!”
신새벽이 전의를 불태웠다.
이번에는 윤수아가 걸렸다.
손차희가 눈을 찡긋하며 질문했다.
“수아가 좋아한 남학생 있지? 누구야?”
“어…….”
윤수아의 대답에 관심이 폭발했다. 윤수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와인을 한잔 마셨다.
“있었나 본데? 누구지?”
신새벽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윤수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절대 말 못 함.”
윤수아는 꿋꿋하게 버텼다.
다시 병이 돌고 이번에는 강우가 걸렸다.
신새벽이 곧바로 질문했다.
“나랑 차 쌤 중에 누가 더 좋아?”
이건 엄마 아빠 질문도 아니고 유치하게. 강우는 신새벽을 째려보았으나 그녀는 여유만만하게 그의 시선을 받았다. 차도도마저 그의 대답을 기다리자 강우는 손을 들었다.
와인을 마시자 신새벽이 허탈한 듯 입술을 삐죽였다.
“저 자식 술 처음 맞아? 처음 치곤 너무 잘 마셔.”
그렇게 몇 바퀴 질문이 돌았다.
손차희도 좋아하는 남학생 이름을 대라고 하자 대답을 거부하고 술을 마셨다.
신새벽이 걸렸을 때 강우는 복수를 날렸다.
“지금까지 사귄 남자 몇 명?”
“하루 미팅한 것도 치는 거야?”
“한 달 이상.”
“그럼 없어.”
의외였다. 신새벽이 모태솔로였다니.
나중에 같은 질문을 차도도에게도 했다. 차도도가 없다고 대답했다.
“강우야? 쌤들 굴려보고 싶었지?”
곤란한 질문에 차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어 강우는 대신 술을 마셨다.
대신에 강우는 차도도에게 복수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일 사귀고 싶었던 남자 말해요.”
차도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어머? 차 쌤 얼굴이 빨개졌어!”
신새벽이 놀렸고 차도도는 바로 술 때문이라고 부인했다.
한참 고민하던 차도도가 어쩔 수 없이 대답을 거부하고 술잔을 들었다.
저 와인을 다 마시면 차도도가 버티지 못할 게 뻔했다.
“제가 백기사 해드리죠.”
“흑기사 아냐?”
“무엇이든.”
강우가 차도도의 와인잔을 빼앗아서 대신 마셨다. 질문한 사람이 대신 마셔주다니. 이건 좀 꼬였다.
“흐음, 이거 분위기가 묘한데?”
신새벽이 수상쩍은 눈빛으로 두 사람을 관찰했다.
“쌤 백기사도 해드릴게요.”
“진짜지?”
“쌤도 반했던 남자 말해봐요!”
손차희가 신새벽에게 질문했고 신새벽은 눈치를 보다 답하지 않았다.
곧바로 강우는 반박했다.
“에이, 이건 저를 술 먹이려고…… 일부러 답 안 한 거잖아요?”
“내 맘이다. 네가 기사 해준댔잖아?”
티격태격하다 보니 이래저래 술을 많이 마셨다. 바닥에 와인 병 두 개가 돌아다니고 반쯤 찬 와인병이 탁자에 놓여 있었다.
늦은 시간이 되었을 때 모두 그럭저럭 취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
“술을 제일 많이 마신 사람이 누구야?”
강우였다.
집으로 가려는 강우를 차도도가 적극적으로 말렸다.
“넌 오늘 술을 처음 마셔서…… 위험해. 술이란 게 본인도 모르게 취하거든.”
“그건 쌤이고요.”
예전에 마도환과 술을 마셨던 차도도가 생각나서 바로 반박했다.
“강우야! 다음에 학교에서 보자!”
“고곽천재가 다시 학교에서 모이는 거로!”
“조심해서 가세요!”
신새벽을 비롯하여 모두가 집을 나섰고 강우는 배웅한 후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차도도와 단둘이 이 집에 있는 시간은 정말 오랜만이다. 과거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오늘따라 괜히 설레는 이 기분은 술 탓일지도 모른다.
탁자를 치우던 차도도가 남은 와인을 두 잔에 적당히 나눴다.
잔을 부딪치며 차도도가 뒤늦게 적극적으로 생일을 축하했다.
“생일 축하해!”
“고마워요. 그런데…… 술 괜찮겠어요?”
“괜찮아. 많이 마시지 않았어.”
강우는 차도도와 함께 창밖을 바라보면서 잔을 비웠다. 도심의 화려한 불빛과 조용한 거실의 분위기가 그의 기분을 감상에 젖게 했다.
“강우, 벌써 많이 컸네.”
“쌤도요.”
차도도가 눈을 흘기며 빙그레 웃었다.
아마 차도도의 눈에 그는 어린 고등학생이자 이제 막 성인으로 발돋움하는 희망찬 청년으로 보일 것이다.
정작 그는 그렇지 않다. 비명횡사한 손강우의 복수를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있는 승냥이일 뿐이다. 한편으로는 핵융합 연구를 위해 전력을 다하는 과학자이다.
이제 성인이 되어 고등학교를 벗어나게 되었으니 그만큼 자유로워졌으면서도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문득 강우는 과학자들이 느끼는, 평범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정신적인 고뇌를 떠올렸다. 지금 강우가 그 고뇌에서 자유로운 이유는 어쩌면 차도도 덕분일지도 모른다.
“쌤, 일전에 신 선생님께 화학을 전공하시게 된 이유를 물어봤거든요?”
“그런데?”
“그때 캐러더스라는 화학자를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과학자 때문에 화학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캐러더스?”
당연히 물리 전공인 차도도가 알기엔 다소 어려운 화학자다.
“그런데 그 캐러더스는 일찍이 자살했거든요. 생각해보니 의외로 자살한 과학자가 참 많아요.”
과학자의 자살률이 일반인보다 높은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강우는 심정적으로 그러리란 생각이 들었다. 손강우도 세상에는 사고사 또는 자살로 알려져 있으니까.
“흠, 그래?”
차도도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강우는 떠오르는 이름을 나열했다.
“프랑스 물리학자인 앙드레 마리 앙페르 있잖아요?”
“전류의 단위 암페어 말이지?”
“네, 그 사람요. 앙페르가 어렸을 때 프랑스 혁명으로 아버지가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했었죠. 그리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도 죽었고…… 그래서 평생을 슬픔에 잠겨 지냈다고 해요. 그는 죽으면서 비석에 ‘마침내 기쁨을 찾았노라.’라고 적었대요.”
강우는 몇몇 과학자를 더 떠올렸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볼츠만도 자살한 과학자였다. 그는 엔트로피를 통계 열역학적 개념으로 정립하여 19세기 후반 물리학의 확장에 기여했다.
그가 생전에 고민했던 기체분자 운동론은 끊임없이 다른 물리학자의 공격을 받았고 그럴수록 그는 철학에 몰두하며 깊은 우울증을 앓았다. 그는 다른 과학자들의 비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휴가 중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독일의 화학자 에밀 헤르만 피셔는 퓨린이라는 물질의 특성을 연구하여 노벨 화학상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중에 전쟁에 나간 두 아들이 사망하자 슬퍼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 에밀 헤르만 피셔의 조수로 일했던 한스 피셔는 포르피린의 구조를 밝혀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공습으로 실험실이 부서지자 실망해서 자살했다.
“그밖에도 많아요. 지구 나이를 알아낼 방법을 연구했던 볼트우드, 질소 고정법을 발명했던 하버, 사진의 대중화를 실현했던 이스트만, 소다를 이용해서 화학 비누를 만들었던 르블랑, 무선 기술의 발전에 공헌했던 암스트롱, 처음으로 인조 다이아몬드를 만들었던 브릿지맨…….”
강우의 입에서 자살했던 과학자들이 끝없이 쏟아졌다.
“너는 그런 것만 보는구나?”
“네?”
“난 앙페르를 떠올리면 다른 게 보여.”
“뭔데요?”
차도도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천재는 엉뚱하잖아? 앙페르는 강의에 몰입하면 자신도 모르게 손수건으로 칠판을 닦고 칠판지우개로 얼굴의 땀을 닦았지. 또 강가에서 조약돌로 계산하다가 강의 시간을 놓치자 급히 조약돌을 강에 던지고 뛰어갔는데 알고 보니 회중시계를 던지고 조약돌을 들고 뛰고 있었다든가, 갑자기 떠오른 물리학 개념을 나무판에 적었는데 하필 그 나무판이 마차 뒤에 실린 짐이어서 마차가 출발하는 통에 죽기 살기로 쫓아갔다는 일화 말이야.”
어? 새삼 강우는 신기한 눈으로 차도도를 쳐다봤다.
“너도 그런 사람들 못지않게 엉뚱해. 그러니까 우울한 생각을 하지 말고 재미있는 생각을 하렴.”
하긴 과학자 중에는 자살한 놈보다 엉뚱한 행동을 하던 미친놈이 더 많긴 하다.
소파에서 옆에 나란히 앉은 차도도가 다시 와인잔을 부딪쳤다.
쨍!
“강우야, 그동안 고마웠어.”
“에이, 뭘요. 제가 더 고마운걸요.”
“넌 아니라고 해도 나에게 정말 많은 것을 주었어.”
강우는 차도도와 눈을 마주치며 와인을 마셨다.
차도도 또한 와인잔을 비웠다.
강우는 그녀와 바짝 붙어 앉은 채 창밖을 쳐다봤다.
“무슨 생각 하니?”
“음…… 그게요.”
순간적으로 인류의 에너지난을 고민한다고 말할 뻔했다.
“난 알아.”
“네?”
“너, 또…… 핵융합 고민하지?”
정곡을 찔려서 차마 아니라고 대답하진 못했다.
“그게 네 매력인걸…….”
“쌤? MIT 같이 가요.”
“글쎄…….”
여전히 차도도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녀가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댔다. 강우는 한동안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 * *
한동안 차도도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던 강우는 점점 증가하는 무게에 몸이 저렸다. 사랑이 모든 것을 극복한다는 말은…… 헛소리다.
“쌤?”
대답이 없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보니 잠이 든 차도도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역시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지.”
예전에도 그녀는 와인 한잔을 마시고 뻗었던 이력이 있으니 지금 이런 상황이 새삼스럽지 않았다.
“쌤?”
조심스럽게 어깨를 빼고 그녀를 받치면서 몸을 흔들었다.
전혀 정신이 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 거실에서 공부하다가 거실 바닥에 나란히 누워 잠을 잤던 기억이 났다. 행복했던 그때를 떠올리며 강우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강우는 조심해서 일어나 차도도를 소파 위에 반듯하게 눕혔다. 이래저래 복잡한 심경이 머리를 스쳤다.
“후우우우-”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안정시킨 강우는 1층 자신의 방에서 이불을 들고 왔다.
조용히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줬다.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해서 태평양을 건너겠다는 결심이 굳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