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67화 (267/325)

제267화 MIT 지원 (4)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차도도는 눈을 떴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눈에 아른거렸다.

“헉!”

어젯밤에 신새벽과 아이들을 모두 보내고 충동적으로 강우랑 소파에 앉아 다시 와인을 마신 것 같긴 한데…….

그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차도도는 과학자를 이야기하며 느꼈던 복잡한 감정을 떠올렸다. 스승과 제자라는 다소 고리타분한 장벽부터 강우의 심리적 갈등을 엿보았던 느낌까지.

‘혹시 실수한 건 아닐까…….’

술이 약한 게 문제다.

일단 상황 파악부터.

몸을 일으키려니 몸에 덮은 이불이 스르르 내려왔다.

강우가 덮어주었음이 분명하기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던 그녀는 순간 중심을 잃었다.

“으악!”

소파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잠이 든 강우가 누워 있었다.

쿵!

본의 아니게 그녀는 강우의 가슴팍에 머리를 처박았다. 당연히 두 사람의 몸도 누운 채 포개졌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이불이 두 장이나 복잡하게 얽혀 충격이 크거나 다칠 일은 없었다.

“으으…….”

차도도는 충격을 참으며 다급하게 강우를 쳐다봤다.

잠을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강우는 반쯤 정신이 나간 모습이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 눈이 동그래졌다가 위에서 짓누르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어이없는 듯 피식 웃었다.

괜히 부끄러워진 차도도는 별일 아닌 듯 손을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시, 실수로 떨어졌어. 다치지 않았어?”

“아, 아뇨.”

그냥 부딪친 것뿐이니까.

차도도는 급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술 때문인지 머리가 띵하고 몸이 휘청거렸다.

간신히 몸의 중심을 잡고 일어선 차도도는 아래에 누운 강우를 확인했다. 그런데 강우가 놀란 눈을 부릅뜨고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멋쩍은 기분에 차도도는 버럭 소리쳤다.

“너! 초딩이니?”

차도도가 소파 위의 쿠션을 들고 던질 기세다.

“으악! 쌤! 쫓아내려고요?”

따지고 보면 강우가 잘못한 일은 없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차도도가 치맛자락을 정리했다.

“됐다. 내가 참아야지. 옷 갈아입고 와서 식빵 구워줄게.”

* * *

학기가 시작되고 강우는 처음으로 학교에 다니지 않는 자유를 만끽했다.

손강우 시절에도, 강우 시절에도 눈을 뜨면 항상 학교에 다니거나 출근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입학 전이라 강요된 숙제가 없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이게 실업자의 고통이네…….”

이런 한가함이 익숙하지 않다.

다행히 교장 선생님이 고곽천재의 학교생활을 허락했다. 강우나 손차희가 학교 명예를 높인 업적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들은 고곽천재의 이름이 박힌 물리 3실험실 사용을 허락받았다.

좁은 원룸에서 갑갑하게 책을 들여다보던 강우에게는 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최대우마저 울릉도를 떠나 합류하면서 고곽천재는 다시 완전체가 됐다. 세미나실이 물리 실험실로 장소만 변경됐다.

“오늘이 발표날이지?”

서로 맞댄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오늘은 파이데이인 3월 14일. MIT 대학입학자 명단이 발표되는 날이다. 다만 미국과의 시차 때문에 아직 인터넷으로 조회가 되지 않았다.

“웬만하면 합격하겠지.”

느긋한 강우와 달리 손차희를 비롯한 학생들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했다.

사실 강우만 MIT 한곳에 넣었을 뿐, 다른 학생들은 여러 곳에 지원했고 이미 합격통보를 받은 곳이 상당수여서 딱히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떨어지면 갈 곳 없는 강우와 달리 다른 친구들은 갈 곳이 많은데도 이상하게 강우가 가장 여유로웠다.

다만 친구들의 표정을 본 강우는 책을 덮었다.

“오늘은 연구가 어렵겠네.”

머릿속이 합격자 발표로 가득하니 연구가 머리에 들어올 리 없다. 딱히 지금 당장 바쁠 일도 없고. 그렇다고 멍하니 실험실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일도 적성이 아니다.

“파이데이면…… 강당에서 행사하지 않아?”

2학년 때 이날 벌였던 원주율 암기 대회가 떠올랐다. 2년마다 한 번씩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오늘도 하겠네?”

“구경 가자!”

고곽천재는 의기투합했다.

* * *

역시 강당에는 학생들이 바글바글 모여 파이데이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과거의 그 날처럼 정명욱 선생님이 단상에 서서 사회를 봤다.

“……그래서 3월 14일에는 원주율 암기 대회를 엽니다. 여러분들은 며칠 전에 통보받으셨을 텐데요, 열심히 외웠죠?”

“네!”

열렬히 대답하는 학생들을 보며 강우는 새봄에 나들이 나가는 병아리를 떠올렸다. 불과 3년밖에 차이 나지 않는 신입생인데도 무척 어리게 느껴진다.

조용히 강당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정명욱과 눈이 마주치자 고곽천재는 꾸벅 인사했다.

갑자기 정명욱의 입이 확 벌어지고 흥분한 눈이 반달이 됐다.

‘설마…… 그때처럼 막무가내로 강연을 맡기지는 않겠지.’

정명욱이 무작위로 학생들을 호명했다.

“자 먼저 올해 최우수 신입생부터 확인해볼까요? 박한돌 학생?”

안경을 낀,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한 학생이 앞으로 나갔다.

본의 아니게 강우는 박한돌의 머리 위에 뜬 재능을 확인했다. 올해 신입생 1등이라는데 특별한 재능이 보이지 않아 강우는 다소 실망했다.

박한돌은 원주율을 소수 열두째 자리까지 암기하고 물러났다. 학생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다른 신입생도 마찬가지였다. 강우는 S급을 찾지 못했다. 어차피 찾더라도 졸업한 그가 어떻게 키워줄 방법이 없다.

여러 학생이 앞으로 나가서 원주율을 암기했고 그때마다 탄식과 환호가 교차했다.

옆에 앉은 최대우가 뚱한 얼굴로 강우를 툭 쳤다.

“이거 재밌냐? 그냥 편의점에 김밥 먹으러 가자!”

“기다려봐! 진짜 재밌는 거 있어.”

윤수아가 최대우를 달랬다.

“뭔데?”

“먹을 거 준다니까.”

“오올!”

최대우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먹을 것이라면 모든 게 해결되는 두 사람의 일차원적인 사고방식에 강우는 이 둘이 과연 고려 과학고를 빛냈던 영재가 확실한지 의문이 들었다.

많은 학생이 도전했다. 하지만 그들은 특별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 건성으로 참여했다.

파이데이 행사는 과거의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때처럼 돋보이는 학생이 없었다. 그때는 손차희가 빛났고, 권유성도 대단했다. 유혜림은 무려 100자리를 넘기고 2등을 했었는데……

원주율 암기에 뛰어난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20자리 정도였고 50자리를 넘기지 못했다.

보다 못한 정명욱이 한숨을 쉬었다.

“자, 예상외로 여러분들의 성적이 저조합니다.”

“이게 저조한 거예요?”

신입생들이 인정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그럼 여러분 선배들은 어떤지 확인해볼까요? 자, 3학년 전교 1등! 하은찬 군?”

어느새 하은찬이 3학년이다.

의기양양한 태도로 하은찬이 단상에 올라갔다.

“1, 2학년들 실력 보니 어때요?”

“한심합니다. 그 정도로는 우리 고곽에서 명함 내밀면 혼나요.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기숙사 앞에 사는 시그마도 그 정도는 외웁니다!”

“푸하하하!”

시그마는 작년 말부터 기숙사 앞에서 살기 시작한 고양이 이름이다. 과학고생이라 이름을 수학 기호로 붙였다.

“자, 자신만만한 하은찬 군! 과연 선배로서 놀라운 실력을 보여줄 것인가!”

하은찬의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2년 전 그때처럼 하은찬은 원주율을 외웠다. 어느새 소수 100자리를 넘어갔다.

신입생들은 완전히 질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은찬이 들어간 후 정명욱이 이번에는 유혜림을 불렀다.

“자, 그럼 3학년 전교 2등 실력자를 모셔볼까요?”

유혜림이 단상에 나섰다.

아래 학년들이 유혜림을 연호했다. 유혜림은 후배들에게 인기가 많다.

“몇 자리까지 자신 있나요?”

“적어도 은찬이보단 많이 해야죠. 전 차희 선배만 아니면 누구든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강우 선배보다도요?”

“그 선배는 3.14까지밖에 모르잖아요?”

유혜림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강우는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저게 나 없을 땐 저렇게 돌려 까고 있었어!”

“너 원주율 외우는 거 보면 당연하지.”

손차희마저 그를 무시했다.

과거의 그 날처럼 유혜림은 대단했다. 당시 165자리까지 외웠던 유혜림은 이번에는 181자리까지 외웠다.

“여러분 어때요?”

환호와 시기가 엇갈렸다.

“쌤! 암기 잘한다고 좋은 대학 가는 건 아니잖아요?”

어떤 신입생이 반박했다.

정명욱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상관관계가 높더라고요. 자! 이 속설을 증명해줄 사람을 모셔볼까요? 손차희!”

갑자기 손차희가 호명됐다.

강우는 그들이 강당에 들어왔을 때 목격했던 정명욱의 미소를 떠올렸다. 웃은 이유가 있었다.

손차희도 마다하지 않았다. 앞으로 나간 그녀는 당당하게 요구했다.

“저는 피아노가 필요해요.”

졸지에 윤수아가 불려 나가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한국을 빛낸 위인들 노래를 반주했다.

강당이 조용해졌다.

손차희의 노래는 끝이 없었다.

그녀는 2년 전 파이데이 때처럼 무려 600자리까지 암기했다. 사실상 인간 승리였다.

완전히 넋이 나간 신입생을 향해 정명욱이 말했다.

“여러분들 선배인 손차희 학생은 수능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했어요. 지금 아이비리그를 포함한 다수의 명문 대학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죠. 원주율 암기와 공부가 과연 비례하는지 저도 궁금합니다!”

1, 2학년들은 완전히 기가 죽었다.

무려 수능 전국 수석이 등장해서 원주율을 600자리까지 암송해버렸으니……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강우는 긴장에 휩싸였다.

예전처럼 이 대회가 끝나면 정명욱이 그를 불러 또 강연을 시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자니 옆에서 누가 그를 툭 쳤다. 돌아보니 차도도다.

“어? 쌤?”

“강우, 대우! 날 따라와.”

거부할 권한은 없기에 강우는 최대우와 함께 차도도를 따라갔다.

강당 앞에 물류 트럭이 서 있고 그곳에는 사과 파이가 잔뜩 실려 있었다.

“자, 지금부터 사과 파이를 나른다.”

“하아! 쌤! 이걸 왜 갑자기 쌤이 하세요?”

“난 1학년 담임이잖아? 1학년이 많으니까 행사를 도와야지.”

사과 파이 상자를 짊어지는 순간 강우는 예전에 강당에서 의자를 나르던 기억이 떠올랐다. 입학하기 전부터 노가다를 도맡아서 하더니 졸업한 후에도 도무지 이 역할을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재수가 없는 건지 최대우가 재수가 없는 건지 모르겠다. 막노동할 때마다 최대우도 함께였으니까.

“우와아! 사과 파이다!”

정작 최대우는 사과 파이를 보는 순간 얼굴이 활짝 폈다.

끙끙대면서 강당 안으로 들어갔을 때 단상 위에서는 손차희가 미소를 지으며 수능 소감과 공부법을 학생들에게 조언하고 있었다.

“수능이라고 별다른 시험이 아닙니다. 평소처럼 편하게 임하는 게 중요해요. 실력은 배신하지 않거든요. 자신감을 가지고…….”

수능 전국 수석의 위엄이 돋보였다. 당연히 학생들은 쥐죽은 듯 경청했다.

공부가 전부인 학생들에게는 강우보다 손차희가 훨씬 본받을 점이 많은 선배다. 그녀는 고려 과학고를 빛낸 학생 중에서도 첫손에 꼽힐 것이다.

올해 파이데이의 승자는 단연 손차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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