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69화 (269/325)

제269화 졸업생 일상 (1)

축하 술자리는 오래지 않아 끝났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던 탓이다.

집으로 돌아가기엔 늦어서 잘 곳을 나누었다. 위층은 차도도와 신새벽이, 평소 강우가 사용하던 아래층 침실은 손차희와 윤수아가, 거실은 강우와 최대우가 점거했다.

강우는 책을 잠시 보다가 자려고 서재에서 책을 골랐다.

침실을 정리해준 차도도가 들어왔다.

“강우야?”

“네?”

“섭섭하지 않지?”

무슨 말일까. 축하를 제대로 해주지 않아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자니 설명을 덧붙였다.

“난 함께 못 갈 것 같아.”

그 말이었나보다.

합격은 했으나 입학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붙으면 같이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고집이 세다.

“무엇 때문에요?”

“집안 사정으로.”

“결혼 때문인가요?”

일전에 마도환과의 맞선을 비꼬았다.

차도도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할 말이 많은 듯 한참 머뭇거리던 그녀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좋아. 어쨌든 유학 잘 가렴. 네 꿈도 이루고. 넌 분명히 할 수 있을 거야.”

“쌤은 뭐 하실 건데요?”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강우는 대충 눈에 보이는 두꺼운 책을 하나 들고서 서재를 떠나며 말했다.

“전 포기하지 않아요. 반드시 쌤을 비행기에 태울 거니까요.”

선언하듯 내뱉고는 계단을 내려왔다.

강우는 한쪽 구석에서 스탠드 등을 켜놓고 책을 넘겼다.

뉴클리어 퓨전. 하필 핵융합 기본서를 들고 왔다.

여기저기 뒤적이다 문득 예전에 맨 뒷장에 해둔 낙서가 떠올랐다. 강우는 가장 뒷장을 펼쳤다. 차도도와 그가 나란히 한 낙서가 보였다.

- 이는 엠씨제곱(E=mc²).

한참 차도도의 글씨체를 노려보다가 강우는 펜을 꺼냈다. 두 식 아래에 낙서를 추가했다.

- 차도도 = 강우.

조용히 낙서를 지켜보다가 그는 책을 덮었다.

* * *

강우는 출근하듯 학교 물리 실험실에 매일 들락거렸다.

남들이 보기엔 한량처럼 여유로워 보였으나 실상은 매우 바빴다.

그 와중에 때때로 하은찬과 유혜림을 불러 연구를 지도했다. 그를 누구보다 반긴 사람이 바로 이 두 녀석이다.

“이제 제대로 이해했어요.”

“예전엔 어땠는데?”

“그땐 아무것도 몰라서 이게 뭔가 싶었죠.”

두 사람이 신새벽의 지도를 받아 쓰던 논문이 신새벽 졸업과 맞물려서 급발진하는 바람에 이들은 어쩌면 단지 이름을 얹어 놓은 무임승차를 했다.

신새벽이 저널에 논문을 투고하면서 곧바로 윈터 교수에게 초안을 보냈을 정도였으니까. 그 다급한 상황에서 아직 미숙한 두 사람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물론 이를 내버려 둘 강우는 아니었다.

그는 다시 실험실에 거주하면서 두 사람에게 이 논문을 제대로 이해시켰다. 적어도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논문이라면 알고 있어야 하니까.

“다음 달이면 이 논문이 정식으로 저널에 출간되거든. 그러면 너희도 해외 저널에 한편씩 실은 실적이 생겨. 그것만으로도 유학이 어렵진 않겠지만…… 아직 일 년이 더 남았으니 논문 한 편 더 쓰자.”

보통 학생이라면 기겁하고 손을 저을 제안이었으나 하은찬과 유혜림은 반갑게 받아들였다.

첫 논문에 제대로 기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 탓이다. 게다가 연말까지 R&E도 남았고. 이들은 현재 신새벽과 R&E를 하고 있다. 물론 앞으로는 대부분을 강우가 대신해야 한다.

“어떤 걸 쓰죠?”

신이 나서 덤벼드는 하은찬에게 강우가 숙제를 냈다.

“주제는 너희가 정해봐.”

“그게 가능해요?”

던져주는 것을 잘 받아먹더라도 스스로 연구할 주제를 찾아내고 수행할 능력은 아직 부족하다.

“오늘 배운 논문을 반복해서 검토하다 보면 후속 연구 주제가 보일 거야.”

연구 주제를 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자 기본적인 방법이다.

논문을 뒤적이면서 하은찬이 물었다.

“형은 여름 되면 떠나죠?”

“그래.”

“신새벽 선생님도요?”

“그럴걸?”

“동네 누나랑 같이 가네…….”

하은찬이 불만스럽게 투덜댔다.

여름에 신새벽이 떠나면 2학기부터는 이 두 사람의 연구를 봐줄 선생님이 없다. 학교에 남은 어떤 선생님도 핵융합을 다루진 않으니까.

3학년 2학기 때의 R&E는 다른 학기에 비하면 형식적이긴 하다.

차도도가 떠나지 않으면 그녀가 돌봐줄 수 있지만……. 강우는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았다.

“미국 가서도 내가 종종 살펴줄 테니까. 이메일이나 메신저 있잖아?”

두 사람의 안색이 밝아졌다.

“열심히 해. 실적은 쌓아놓을수록 좋으니까.”

“고마워요, 형!”

“고마워요, 오빠!”

두 사람에게 형과 오빠라는 말을 들으니 가슴이 따뜻해진다.

둘에게 과제를 던져준 강우는 헌팅턴 프로젝트를 재구상했다.

프로젝트 계약 기간인 3년간 할 일은 이미 완료했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실제 개발이 아닌 이론적인 체계의 구축이 목표이기에 강우의 천재성으로 비교적 손쉽게 해치울 수 있었다.

물론 헌팅턴에는 전부를 보고하지 않았고 연구 내용의 절반, 중요한 아이디어를 숨긴 채 저널에 실었다. 바로 연말에 무리했던 손차희, 윤수아, 최대우 보고서에 쪼개서.

이 세 논문을 잘 엮어보면 유추할 수 있어도 그마저 생략된 부분이 많아서 그의 연구 전체를 제대로 알아볼 사람은 없다.

“앞으로 남은 1년간 할 일은 이미 끝났고……. 문제는 그 이후인데…….”

당연히 강우의 관심사는 이후에 계속될 다음 프로젝트였다.

2차 헌팅턴 프로젝트는 아직 그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온핵융합 발전의 상용화다. 그가 미국에 있고, 헌팅턴이 지원한다면 어렵지 않다.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사업이기에 주도면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애초 그가 세운 계획에는 자신을 중심으로 요셉, 차도도, 신새벽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그를 제외한다면 가장 중요한 인물이 차도도다. 그런데 차도도가 삐걱대고 있다.

그녀가 미국으로 가지 않고 국내에서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강우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처럼 단지 이론적인 계산만 한다면 가능하나 실제 개발에 관여하려면 반드시 미국 현지에 있어야 한다.

“후우…….”

가슴이 답답하다.

최악의 경우에는 차도도를 다른 인물로 대체할 수 있으나 아직은 고려할 단계가 아니다. 사실 그녀만큼 천재성을 띠면서 그와 가까운 인물을 찾아내기 쉽지 않다.

“무조건 데려가야 해.”

재차 결심을 굳히고 강우는 2차 헌팅턴 프로젝트를 설계했다.

목표는 정해졌다. 상온핵융합 발전의 상용화. 이 프로젝트에 성공한다면 인류를 에너지난에서 구원하게 될 것이다. 그의 인생 목표이자 꿈이 눈앞에 있다. 그렇기에 절대 실패할 수 없다.

“헌팅턴을 끌어들이려면…….”

헌팅턴에게 프로젝트 성공을 확신시켜야 한다. 1차 프로젝트도 아직 끝나지 않았고 성공했다손 치더라도 이를 현실에서 상용화하는 기술은 완전히 격이 다르다. 헌팅턴도 쉽게 끌려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강우는 헌팅턴에게 보낼 제안서를 작성했다.

그들이 미끼를 물지 않을 수 없도록 완벽하게 제안서를 작성해야 한다. 그의 인생이 걸린 중대사다.

신새벽에게서 톡이 왔다.

수업시간 아니었나?

- 신새벽 쌤 : 강우야, 내가 좋은 생각이 났는데.

- 강우 : 뭔데요?

- 신새벽 쌤 : 노창열 교수랑 만나려고.

갑자기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

* * *

울긋불긋 꽃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정원, 주변을 쭉 두른 소나무와 푸른색 기와가 얹힌 가옥이 어울려 멋들어진 풍경을 수 놓았다.

서울 외곽에 있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한 한식집이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노창열은 정돈된 주변 정원에 감탄하면서 잔디밭 가운데로 난 징검다리 돌판에 발을 디뎠다.

“괜찮군.”

입구로 들어서자 유니폼을 갖춰 입은 종업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한복까지는 아니어도 일사불란한 종업원을 보면 이곳이 꽤 비싼 고급 음식점임을 알 수 있었다.

“신새벽이란 이름으로 예약했다던데…….”

“난실로 가시지요.”

구분된 특실에 매난국죽이란 이름이 붙어 있나 보다.

난실에서 하얀 테이블보가 놓인 탁자의 가장 안쪽 자리에 노창열은 자리를 잡았다.

“아직 안 왔나 보군.”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원래 이런 자리는 높은 사람이 제일 늦게 오는 법이다. 오늘 이 자리는 신새벽이 그에게 접대하는 자리이니 당연히 그녀가 먼저 와 있어야 했다.

“그래, 봐주자. 5분 지각은 에티켓이라지.”

노창열은 휴대폰 톡을 열고 약속 장소를 재차 확인했다. 이곳이 정확했다.

그의 상상은 곧장 신새벽으로 옮겨갔다.

며칠 전 갑자기 신새벽에게 전화가 왔었다. 논문이 통과되었으니 한 끼 대접하고 싶다고.

예상치 못한 제안에 노창열은 그 의도가 궁금했다.

같은 학과 교수도 아니고 접점이라고는 논문 지도교수였을 뿐이다. 정확하게는 논문심사 교수. 그마저 나중에는 의견이 맞지 않아 마지 못해 도장을 찍어준, 절대 가까울 수 없는 사이다.

그동안 그가 데이트를 요구할 때마다 튕겼던 그녀를 생각하면 이런 고급 음식점에서의 접대는 의미심장했다.

한때는 이런 곳에서 식사하고 적당히 시간을 끌다가 교수 지위를 이용해 갑질을 하려고도 했었는데 난데없이 그런 기회가 왔다. 물론 오늘은 영문을 몰라 거기까지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무엇이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지?”

이미 졸업해버린 신새벽이 다시 만남을 요구할 일은 없다. 유일하게 짐작되는 이유라면…….

“설마 박사과정을 밟겠다는 건가?”

화학교육과에서보다 화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것이 훗날의 발전성을 따져보면 훨씬 낫다. 고등학교에 머무르지 않겠다면, 학위 취득 후 지방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노린다면 한국대 박사는 최적의 선택이기도 하다.

신새벽의 석사 논문 성격으로 보면 마땅히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밟기 쉽지 않다. 신새벽 석사 지도교수였던 정원재는 나이가 많고 비슷한 세부 전공 교수는 한국대에서 자신이 유일했다.

즉 그가 볼 때 신새벽이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밟는다면 그의 아래 외에는 대안이 없다.

“그렇군. 박사가 되고 싶었나 보지.”

처음 신새벽과 상담했을 때 그녀의 진학 욕심을 알아봤었다. 학교 선생님으로 만족할 여자가 아니었다.

박사를 밟으려면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숙이고 기어들어 와야 한다. 그러려면 그와 관계개선이 필요하고 그래서 이런 자리를…….

“흐음, 좋아.”

급하면 체하는 법이다. 신새벽이 박사과정에 입학한 후면 절대적인 갑을 관계가 형성된다. 시간도 많다. 게다가 오늘 이런 자리를 마련할 만큼 이 여자도 사회 물을 먹었다.

앞으로 절대 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겠지.

“오늘은 서두르지 말자…… 괜히 놀라서 달아날지도 모르니까. 일단 관망하면서 동정을 살피는 거야. 오늘 잘 되면 내일이 있고, 내일 잘 되면 먼 훗날까지 잘 되는 법이니까.”

작전을 세웠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성에게 주목받은 적이 없었던 그였기에 그 기쁨은 대단했다.

그만큼 신새벽은 그가 바라던 여자이자 구미에 맞는 사람이었다. 그의 권위가 적절하게 먹히는 대상이다.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가 상상에 잠겨 있을 때 문이 열리고 종업원과 함께 신새벽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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