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0화 졸업생 일상 (2)
“교수님? 일찍 오셨네요.”
“아, 신새벽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오늘따라 신새벽은 예뻤다. 신새벽의 얼굴을 보자 노창열은 기다리다 지친 불쾌함을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차 때문에…….”
“막혔나요?”
분명히 노창열이 올 때는 차가 막히지 않았었다. 그렇게라도 변명하는 여인이 귀여웠다.
“아뇨, 제가 운전이 서툴러서.”
그제야 생각났다. 신새벽이 가끔 한국대에 차를 몰고 오긴 했는데 초보라 극히 드물었다는 사실을. 운전이 서툰 것은 흠이 아니니까. 노창열은 신새벽이 늦게 온 이유를 충분히 이해했다.
“다음부터는 내 차를 타고 함께 오지.”
“호호, 그럴까요?”
신새벽의 반응이 밝았다. 예전이라면 분명히 왜 같은 차를 타야 하냐고 화를 냈을 여자다.
역시 졸업하면서 사회 물이 들었다고 짐작한 노창열은 기분이 좋아졌다.
내친김에.
“자, 주문할까요? 오늘은 내가 사지.”
“어머, 교수님, 오늘 제가 대접하려고 모신 건데요.”
“하하, 신 선생은 다음에 사세요.”
이렇게 다음 기회를 또 만들어 두었다.
그날을 위해서라면 오늘 사는 식사 한 끼 정도야 아깝지 않다.
제법 비싼 요리를 시켰고 노창열은 흔쾌히 맥주를 추가했다.
“교수님? 운전이…….”
“하하, 한잔은 안 걸립니다. 괜찮아요.”
예상외로 좋은 분위기에 노창열은 전략을 수정할지 고민했다. 일단 맥주를 놓고 기회를 엿볼 생각이었다.
“교수님,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교수가 하는 일이 항상 같죠. 신 선생은 어떻게? 계속 학교에 계실 건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다만 빠르면 온 여름에 휴직하고…….”
“아,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을?”
“네.”
신새벽이 수줍은 표정으로 웃었다.
노창열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여름에 후기입학이 가능한가? 박사과정 자리가 남아 있는지 불분명했다. 일단 그의 아래에는 자리가 없다. 그래도 무리해서 다른 교수에게 남은 자리를 얻어온다면 불가능하지는 않다.
신새벽이 이번 여름에 한국대 박사과정에 입학하겠다면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생각해보니 다음 학기 입학을 부탁하려면 지금이 딱 적절한 때긴 하다. 역시 추측이 착착 맞아떨어졌다.
“신 선생님 같은 인재는 더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요.”
언제 신새벽을 비난한 적이 있었던가 싶게 노창열이 구구절절 칭찬을 덧붙였다.
신새벽도 미소로 감사를 표했다.
식사하면서 노창열은 맥주를 잔에 따랐다.
신새벽에게 술을 따르게 하고 싶었으나 이 좋은 분위기를 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수 잔을 채워 신새벽에게 내밀었다.
넙죽 받아마시는 신새벽이 놀라웠다.
‘몇 잔 더 먹이면 운전을 못 할 테니…… 쉬다가 가자면 되겠군.’
나중을 노릴 생각이었는데 신새벽의 행동을 보니 오늘도 가능할 듯했다.
뜨거운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렇게 맛있게 요리를 먹고 맥주를 추가해서 술을 더 마셨다. 두 사람이 마신 술이 한 병을 족히 넘으니 이제는 운전이 어려운 상황.
‘게임은 끝났어.’
홀로 희희낙락하면서 노창열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올여름에 한국대 박사과정에 지원할 생각이죠? 내 밑으로 오시죠. 한국대 박사라면 타이틀도 괜찮잖아?”
“교수님 밑으로요?”
“그래, 내가 박사학위를 책임져주지. 해외 학술대회에 참석할 때마다 데려가고. 해외여행도 겸해서 말이야, 어떤가?”
다소 노골적인 제안에 신새벽이 방긋 웃음을 머금었다.
“노 교수님, 여전히 그 버릇 못 버리셨네요.”
“응?”
“갑질이 몸에 배셨어요.”
“어…… 뭔 소리야? 모두 신 선생을 위해서 하는 소리야. 그럼 정원재 교수 밑으로 갈 건가? 정년 퇴임이 얼마 안 남았을 텐데?”
노창열은 자신만만했다. 신새벽에게 다른 대안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신새벽이 미소를 거두지 않고 말했다.
“이미 결정했어요. 전 이번 여름에 떠납니다.”
“뭔 소리야?”
“미국 MIT 윈터 교수님 아래에 박사과정으로 들어가기로 했거든요.”
순간 노창열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바로 대응하지 못하고 버벅대고 있자니 신새벽이 조롱하듯 비웃음을 던졌다.
“교수님 덕분에 석사 잘 졸업했고요. 앞으로 미국으로 유학 가니까, 그것도 교수님보다 훨씬 유명한 교수님께 배우러 가니까 앞으로 교수님께 신세질 일 없을 거예요.”
“신 선생?”
“앞으로는 대학원생 괴롭히지 말고 성희롱은 더더욱 하지 마세요. 오늘 것도 모두 다 녹음해뒀으니까 이후부터는 착하게 사세요.”
신새벽은 손에 든 맥주잔을 앞으로 휙 뿌렸다.
맥주가 튀어 노창열의 얼굴을 뒤덮었다.
“이년이!”
맥주에 절은 얼굴로 노창열이 그녀를 노려봤다.
신새벽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지품을 챙겨 벌떡 일어났다.
“먼저 갑니다. 밥은 잘 먹었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는 신새벽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노창열도 부리나케 달려갔다.
“손님 계산을…….”
곧바로 입구에서 잡힌 노창열은 다급하게 카드를 긁었다.
신새벽이 주차장에 세워진 하얀 차로 걸어가고 있었다.
“차에 시동을 거는 순간 내가 바로 신고해버릴 거다! 빼박 음주운전이야!”
노창열이 주차장으로 달려갔을 때 신새벽의 차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가 내렸다.
“끝났어요?”
“응, 이제 가자. 넌 밥 굶어서 어떡하니?”
“가다가 김밥이나 먹죠.”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노창열은 눈을 비비고 신새벽과 말을 나누는 남자를 확인했다.
어디에서 많이 봤던, 눈에 익은 녀석이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그제야 논문심사 기간에 사사건건 부딪쳤던 강우라는 학생임을 알아챘다.
“저놈마저…….”
강우가 다시 운전석에 타고 신새벽이 조수석에 올랐다.
부우웅-
신새벽의 하얀 차가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떠났다.
“저것들이 감히 나를 놀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노창열이 자신의 차에 시동을 걸고 신새벽의 차를 추격했다.
그리고 약 5분 후, 그의 차 뒤에서 경찰차 사이렌이 울렸다.
- 거기 검은 차! 갓길로 대세요! 음주운전 단속하겠습니다!
* * *
- 강우 군, 이 계획이 실현 가능한가?
“물론입니다.”
- 지금까지 낸 논문만으로도 엄청난데…….
“그건 헌팅턴 때문에 절반 숨긴 거죠.”
강우는 요셉 교수와 통화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연구한 내용을 요셉 교수에게 전했다. 논문으로 출간한 부분, 헌팅턴사에 보고서로 넣을 부분, 그리고 자신이 쥐고 있는 추가 연구 내용까지.
사실상 지금까지 수행한 모든 연구를 가감 없이 밝혔다.
- 강우 군이 천재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요셉이 말을 잇지 못했다. 강우가 수행한 엄청난 연구 내용에 질린 탓이다.
요셉의 환호가 눈앞에 그려졌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인지라 강우는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게 가능했던 까닭은 차도도를 비롯한 고곽천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덕분이다.
고곽천재가 각자 연구를 독자적으로 수행하면서 강우는 연구 부담이 줄어들었다.
당연히 본인의 연구에 여유가 생겼고 올해 들어 졸업과 함께 시간적 여유가 늘어나자 결과물도 비례해서 많아졌다.
“이 내용을 조금 더 보완하면 상용화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습니다. 현재 예상으로는 향후 5년 이내에 시범적인 핵융합 발전소를 건설할 수 있거든요. 이 연구를 그대로 헌팅턴에 넘기려니 아까워서 말이죠.”
-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가?
“합당한 이익을 받아내야죠. 저는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 뭔가?
“상용화를 끌어내는 근본적인 이론을 다룬 논문을 써야겠죠. 역사에 길이 남을 논문요. 핵융합이 이 논문에서 현실화되었다고 기념할 수 있는 논문요.”
- 좋은 생각이네.
강우는 이 논문으로 노벨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까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요셉 교수라면 절반쯤은 눈치챘겠지.
“그리고 헌팅턴과 장기계약을 맺을 겁니다. 상온핵융합 발전 상용화 기술요.”
- 그것도 좋아. 자네가 미국으로 건너오면 추진하도록 하세. 올여름에 만나서 의견을 조율하지.
“여름에 헌팅턴과 계약한 다음 건너갈 계획입니다.”
- 그래?
요셉이 의문을 표했으나 강우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굳이 요셉과 대립할 생각은 없다. 그가 요셉에게 도움을 얻은 것도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다만 그 또한 여기까지. 앞으로도 계속 요셉이 무임승차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없다.
물론 요셉 같은 석학을 무임승차로 표현하기엔 어폐가 있고 지금도 요셉이 담당한 부분이 많다.
그래도 미국에서 계약을 체결하면 요셉의 입김이 커지고 헌팅턴 또한 본거지라 강우에게 유리할 일이 없다. 강우는 유학 가기 전에 헌팅턴이 계약을 목적으로 한국으로 들어오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헌팅턴이 계약을 서두르도록 압력을 넣어주세요.”
- 계약을 빨리한다고 반드시 유리하진 않아.
“유학 생활을 안정적으로 보내고 싶어서입니다.”
강우의 주장에 요셉도 결국 손을 들었다.
프로젝트 문제를 마무리 짓자 요셉이 화제를 돌렸다.
- 차도도 선생님 말인데…….
“예, 말씀하십시오.”
- 여전히 입학하기 어렵다고 하던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헌팅턴과 추가 프로젝트가 논의되면서 차도도의 역할이 훨씬 중요해졌다.
강우와 마찬가지로 요셉에게도 그 중요성이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MIT에 입학한 강우는 학부생이라 요셉 교수의 직속이 아니고 반드시 요셉과 프로젝트를 수행할 의무도 없다. 그러나 석박사과정으로 입학하는 차도도는 다르다. 그녀는 요셉에게 얽매인 몸이 된다.
요셉으로서는 차도도를 잡아두면 강우도 같이 붙잡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차 선생님은 제가 반드시 모시고 가겠습니다.”
강우는 흔쾌히 선언했다.
- 자네만 믿겠네.
간략한 사정을 추가로 설명하고 강우는 전화를 끊었다.
점점 밑그림이 그려진다.
헌팅턴을 국내로 불러들여 어떻게 계약할지가 가장 중요한 일로 남았다.
그 과정에서 차도도가 일정 역할을 해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 반드시 그녀를 설득해야 하는 과제 또한 절실하다.
이 일은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강우는 손차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 강우니? 무슨 일이야?
“차 선생님 생신이 어린이날이잖아?”
- 그렇지.
“그날 우리 함께 놀러 가면 어때?
- 어디로? 멀리 가자는 뜻인가 보네?
“동해안으로. 속초나 강릉 같은…….”
- 1박? 2박?
“가능하면 길게.”
- 모두 같이?
“당연하지.”
고민하는 눈치가 보이던 손차희가 흔쾌히 승낙했다. 유학 가기 전 마지막 추억을 쌓을 여행이라 거절할 이유가 없다.
- 좋아. 마침 내가 속초에 콘도를 빌릴 수 있어. 그런데…… 뭔 일 있어?
갑자기 전화해서 놀러 가자니 이상한 모양이다.
“차 쌤이 유학 안 가신다니까 설득하려고…… 우리 모두 같은 마음 아냐?”
강우는 손차희에게 작전 계획을 털어놓았다.
차도도를 설득할 가장 좋은 방법. 물론 그만의 생각이다.
고곽천재의 도움도 필요하다. 그들도 모두 함께 유학하기를 원하니까.
손차희와 세부적인 작전을 짰다.
디데이는 차도도의 생일. 5월 5일을 위해 5월 4일부터 움직이기로 했다.
강우는 이날 승부를 걸어볼 생각이다. 차도도라면 그를 외면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