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2화 마지막 승부 (1)
귀를 붙잡혀 끌려나간 강우는 차도도와 함께 학교 주차장에 도착했다.
“얼른 타. 집에 데려다줄게.”
웬일로 차도도가 차를 끌고 학교에 왔다.
“제가 운전할까요?”
“아니, 내가 할게.”
강우는 조용히 조수석에 탔다.
차도도가 시동을 걸고 차를 부드럽게 움직였다. 예전에 비하면 한결 나아진 운전 솜씨다.
“차 안 모셨잖아요?”
“그럼 이 밤에 내가 무슨 재주로 와?”
퇴근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하은찬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했다. 그래서 급히 밤에 차를 타고 학교에 왔다나.
어쩐지 그 밤에 차도도가 기숙사에 나타날 리가 없는데. 그것도 내일이 중간고사인데 말이다.
“재밌었는데…….”
“그거 재미있는 거 아니야. 자칫 학생들이 너 때문에 충격받아서 의욕이 꺾일지도 몰라.”
대부분 학생에겐 도움이 되었을 거다. 만에 하나 강우의 놀라운 실력에 주눅이 든 학생이 있을 수도 있다. 강우를 같은 신입생인 줄 착각했다면 그 쇼크는 상상외였을지도.
괜한 짓을 했다고 반성했다. 최대우를 흉내 내다가 완전히 망했다.
“쌤, 오랜만에 드라이브할래요?”
“안 돼. 집에 가야지. 집 어디야?”
강우가 원룸으로 나온 후 차도도가 아직 방문한 적은 없었다.
“저쪽으로 가시면…….”
강우는 열심히 길을 안내했다.
학교에서 멀지 않아서 금방 도착했다.
적당한 곳에 주차한 후 차도도가 차에서 내렸다.
“어? 쌤? 집에 들어가시게요?”
“왜? 안 되니?”
난데없는 사태에 강우는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집안이 엄청 난장판이라 보여줘도 되는지 의문이다. 아침에 나올 때 제대로 치우고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디야?”
“저기…… 3층요.”
강우는 머리 위 오피스텔을 가리켰다. 주택가 외곽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오피스텔 건물이다.
쫓기듯 강우는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었더니 내부가 가관이다. 혼자 있을 때는 전혀 몰랐는데 온 집안에 정리된 구석이 하나도 없다.
“으악!”
재빨리 들어와서 던져놓은 옷가지부터 치우려고 하니 차도도가 소리 질렀다.
“일단 환기하게 창문부터 열어! 홀아비도 아니고!”
야밤에 집안 대청소를 하게 됐다.
“어휴, 빨래할 옷은 한곳에 모아야지. 입던 옷은 왜 저기 던져놨어?”
“예?”
“그릇은 이게 뭐야? 먹었으면 제대로 설거지해야지!”
“예?”
“책도 좀 치우고!”
“예?”
“담배는 안 피우지? 좁은 곳에서 담배까지 피우면 사망이야!”
차도도의 잔소리가 수시로 터져 나왔다.
강우는 멍한 상태로 ‘예’만 연발하며 눈으로 차도도를 따라다녔다.
차도도는 마법사였다. 순식간에 집안을 완벽하게 정리했다.
“하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네가 사는 게 이 꼴일 줄 예상했지. 넌 수학 문제만 잘 풀지, 다른 건 할 줄 아는 게 없어!”
틀린 말이 아니어서 강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기어이 커피믹스를 찾아낸 차도도가 물을 끓였다.
커피 두 잔을 타서 강우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쌤, 최고예요!”
강우가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어휴, 아무래도 내가 한 번씩 와서 손을 좀 봐야겠네. 돼지우리인지 사람 사는 집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가.”
수시로 차도도 집을 들락거렸으니 집에 같이 있던 시간이 하루 이틀이 아닌데도 좁은 원룸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괜히 가슴이 묘했다.
“신기한데요? 쌤은 요리를 못해서 살림 못 하실 줄 알았는데…….”
“그래도 너보다는 잘하거든?”
차도도가 웃으면서 커피를 마셨다.
그 모습을 쳐다보자니 강우는 괜히 히죽히죽 미소가 그려졌다.
“쌤, 자주 오세요. 가끔 라면도 끓여주시고.”
“어휴, 내 솜씨 알잖아? 그 라면 먹을 수 있어?”
“…….”
발끈하지 않는 것을 보니 차도도가 가끔은 와 줄 모양이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서 강우는 생일날 작업에 들어갔다.
“쌤, 이번 5월 5일 어린이날요. 그날 여행가시지 않을래요?”
“갑자기 무슨 여행?”
“고곽천재가 속초에서 모이기로 했거든요. 차희가 콘도를 빌렸어요. 저랑 대우 둘만 아니라 모두 같이!”
“너희 넷 전부?”
“네, 당연하죠.”
강우가 계속 설득했다.
처음에는 마땅찮아 사양하던 차도도가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4일부터 6일까지 2박 3일?”
“네, 금토일요. 금요일 쌤께서 퇴근하시면서 바로 떠나면 되니까요.”
“그래, 그러자.”
“그럼 4일에는 차 갖고 출근하세요.”
작년 차도도 생일 전날에 그녀는 마도환과 맞선을 봤었다. 다음날 강우랑 싸우기도 했었고. 이래저래 애환이 많았던 작년 생일이었기에 이를 의식한 차도도는 올해 생일에 달리 의견을 내지 못했다.
계획이 맞아떨어지자 강우는 내심 환호했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작전을 더욱 세밀하게 짜면 끝이다. 차도도를 미국으로 데려가는 작전이다.
커피를 마신 후 차도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이만 가야겠어.”
차도도가 소지품을 챙겼다.
강우는 밖으로 나가서 차가 떠날 때까지 배웅했다.
점점 멀어지는 모닝의 붉은 후미등에 강우는 아련한 아쉬움에 잠겼다. 차도도와 그의 거리는 여전히 멀다. 정체가 불분명한 장벽도 느껴진다.
그는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 쳐다보면서 인생의 목표를 확고히 다졌다.
그의 인생 목표는 예나 지금이나 인류를 에너지난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물론 그 목표에 하나 더 붙어 있다. 차도도와 함께 노벨상을 받는 것이다.
* * *
디데이.
어린이날 전날이자 연휴 전날이기도 했고 차도도 생일 전야이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차도도가 퇴근할 즈음 강우는 고려 과학고 주차장에서 모닝을 찾았다.
잠시 후 차도도가 나타났다.
그녀는 평소처럼 사무적인 남색 스커트 정장을 입고 있었다.
“짐은요?”
“차에 넣어뒀지.”
강우도 가져온 가방을 모닝 뒤에 실었다.
손을 내밀자 그녀가 차키를 넘겼다.
“다른 애들은?”
“각자 알아서 올 거예요. 대우는 지금 울릉도에 있는데 내일 속초로 온다네요.”
“그래, 얼른 가자. 너무 늦기 전에.”
지금 떠나도 밤늦어서야 속초의 콘도에 도착한다.
언제나 놀러 가는 날은 즐겁다.
퇴근 시간과 맞물려 서울을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
“놀러 갈 생각은 누가 했니?”
“고곽천재가 지금까지 놀러 간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요? 이번에 뜻이 맞았죠.”
“그래, 미국 가면 아무리 같은 학교라도 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차도도가 이해한다는 듯 수긍했다.
“쌤과 함께 가자는 제안은 제가 꺼냈어요. 잘했죠?”
“그래, 근데 보통은 쌤이랑은 안 어울리려고 하지 않아?”
“저흰 예외죠. 쌤에게 은혜 입은 게 얼만데…….”
강우의 대답에 차도도가 생각에 잠겼다. 강우와 최대우의 3년 담임을 맡았고 손차희와 윤수아의 2년 담임을 맡았다.
그동안 그녀가 해준 일이 많았어도 얻은 것 역시 절대 적지 않다. 특히 강우에게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무척 많이 얻었다.
“어쨌든 고마워.”
“제가 3년간 보니까 쌤도 정말 놀러 가지 않더라고요. 그러니까 이 기회에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야죠.”
강우는 예전에 차도도에게 들었던 말을 돌려줬다. 한때 연구에 매달리는 그에게 차도도가 권유했던 그대로다.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그때를 기억한 듯했다.
“저녁은?”
“가다가 대충 먹어요. 휴게소 라면이 맛있어요. 예전에 김선호 선생님과 관측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강우는 즐거웠던 기억을 쏟아놓았다.
차는 고속도로에 접어들었고 점점 속도가 붙었다. 연휴 전날이어서일까.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이 모두 경쾌해 보인다. 앞서가는 자동차의 붉은 후미등이 줄지어 달리고 있다.
연휴 전날이라 제법 차들이 많았다.
“강우 운전 잘하네.”
“그렇죠?”
“신기해. 천재라고 운전을 잘하는 건 아닌데.”
손강우 시절 운전 경력이 얼만데. 당연히 그만이 간직한 비밀이다.
“아! 예전에 너 운전면허 한 번에 따면 무엇이든 들어준다고 약속했던 것 같은데…….”
일 년이나 지난 내기를 차도도가 기억해냈다.
“그건 신 쌤이었는데요?”
“난 약속하지 않았어?”
“쌤은 그때 생각해본다고 했었는데…… 아! 쌤도 약속한 거로 해요.”
당연히 불리하지 않으니 일단 우기고 볼 일이다.
차도도가 미소를 지으며 반박했다.
“난 네가 수능에서 전국 수석 하면 소원 들어준다고 했을 텐데?”
“그것도 달성했잖아요? 저는 내기에서 지는 법을 몰라요.”
“뒤에서잖아!”
“그것도 수석인데…….”
“어휴, 말을 말자. 그래서 신 쌤은 뭐 해줬어?”
신새벽은 그 대가를 치르긴 했다. 강우의 뜻에 따라 차도도가 어학시험을 치도록 유도했으니까. 그 시험을 치지 않았더라면 차도도는 MIT에 원서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수도권을 벗어나자 차 속도가 정상을 회복했다.
모닝이 여유롭게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이 그의 마음처럼 경쾌해 보였다.
강우의 마음은 이미 속초의 콘도에 도착해 있었다.
과연 될까? 차도도를 미국으로 데려가고픈 마음에서 무리하는 게 아닐까.
강우는 내심 작전을 점검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이젠 운명에 맡길 뿐이다. 어쩌면 오늘 밤이 그와 차도도의 미래를 결정지을지도 모른다.
* * *
밤이라 멋진 바다 풍경은 사라지고 없지만 선선하게 부는 바닷바람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늦은 밤에 콘도에 도착한 강우는 로비에서 체크인하고 카드키를 받았다.
짐이라고는 그와 차도도의 것이 전부. 차도도의 가방은 제법 부피가 컸다.
강우는 호기롭게 짐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손차희가 예약한 콘도 객실은 넓고 깔끔했다.
큰 방 두 개가 양쪽으로 붙은 전형적인 가족실이었다. 방 별로 화장실, 주방, 식탁과 소파에 킹사이즈로 두 개씩 붙은 더블베드 침대가 놓여 있어 최소 4명, 많게는 8명이 숙박할 수 있었다.
“우리 넷은 여기에서 머무를 거예요. 낮에는 바다에서 놀고 관광도 하고 카페도 다니고.”
“와아! 좋다!”
“저희들이랑 같은 방 사용하기 어색하시면 따로 잡으셔도 돼요.”
“괜찮아. 너희는 이미 졸업했고…… 그동안 함께했던 시간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다행히 차도도는 고곽천재와 함께 지낸다는 점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강우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창밖으로 어두운 바다에 밝은 불빛이 점점이 멀리까지 찍혀 있었다. 날이 밝으면 멀리 바다가 어우러진 멋들어진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짐을 탁자에 대충 던져두고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창밖을 바라보며 감상에 잠겼다. 멀리 서울을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그제야 밀려왔다.
흐뭇한 미소를 짓던 차도도가 이상한 듯 물었다.
“차희랑 애들은?”
“고곽천재요? 내일 온 데요.”
“내일? 그럼 우리만 먼저 온 거야?”
강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심상찮은 기분을 느꼈을까. 차도도가 한참 고민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근데 나에겐 왜 말 안 했어? 난 오늘 모두 올 줄 알았는데?”
“원래는 오늘 오기로 했는데 차희가 일이 생겨서요. 수아는 차희따라 오느라……. 대우는 원래 내일이었고요.”
일부는 맞고 일부는 아니다.
“부담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