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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73화 (273/325)

제273화 마지막 승부 (2)

“응? 아, 아니, 그건 아닌데……. 여기는 침대도 많은 데다 방이 대충 나뉘어 있으니까 괜찮아.”

차도도가 저렇게 둘러대어도 부담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성인이 된 남학생 제자와 콘도에서 단둘이 보내는 하룻밤을 남들이 알면 구설에 오르기 딱 좋으니까.

물론 차도도의 아파트에서 함께 지낸 것도 이보다 더 어색하면 어색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충분히 단련되었다고 해야 하나.

차도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을 때 강우가 케이크를 꺼냈다. 미리 주문해서 콘도에 배달해두었던 작은 케이크다.

“자, 우리 둘이 먼저 쌤의 생신을 축하해야죠.”

시계를 보니 막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만류하는 그녀에게 강우는 내일 모두가 모인 생일축하 말고 오늘 혼자서 먼저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다고 주장했다.

작년 생일 때 맞선 사건으로 적잖은 부담을 졌던 차도도는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식탁에 케이크를 올려놓고 초에 불을 붙였다.

방에 수면등만 켜고 촛불을 밝히니 분위기가 아늑했다.

“강우야? 노래 불러.”

괜히 쑥스럽다. 지난번 그의 생일 때는 모두 함께 축하 노래를 불렀는데 친구들이 없으니 이런 순간이 고생이다.

어쨌든 손뼉을 치며 노래를 시작했다. 다행히 차도도가 옆에서 거들었다. 과연 그녀는 노래의 달인이다.

촛불을 끄고 케이크를 잘랐다.

“오늘은 조금만…….”

차도도의 사양으로 강우는 케이크 한 조각을 둘이서 나누어 먹었다. 차도도의 환한 미소 덕분에 케이크 맛이 달았다.

“자, 그럼 생일축하를 했으니까…….”

일어서는 차도도를 강우는 창으로 이끌었다.

“잠시 창밖을 같이 봐요.”

어둠 속에 불빛이 가물거리는 밤바다 풍경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잡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그들의 정신을 평온하게 했다. 과연 서울을 벗어나니 세상이 다르다.

“쌤, 고마워요.”

“뭘?”

차도도가 여전히 앞을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그동안 저에게 정말 많은 것을 베풀어주셨어요. 쌤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고등학교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고요.”

“그렇지 않아, 설사 내가 담임이 아니었어도 넌 잘했을 거야.”

그녀는 그의 내면이 손강우임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니 적응하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지 못한다.

강우의 감사는 진정이었다.

“그러니까…… 쌤, 조금만 더 저를 도와주시면 안 돼요?”

“뭐가 필요하니?”

차도도의 목소리는 밝았다. 조짐이 좋다.

“같이…… 미국에 가요.”

그녀의 몸이 미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에게 바짝 붙어 있다 보니 그 움직임이 바로 느껴졌다.

잠시 시간이 정지한 듯 움직임을 멈췄던 차도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우야, 누차 말하는데 그건 힘들어. 난 한국을 벗어날 수 없단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하셨잖아요? 선생님도 과학자가 되고 싶으시잖아요?”

“아니, 난 교사가 천직이야.”

“거짓말!”

강우의 강한 부정에 차도도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진학? 한국을 떠나지 않고 과학자란 미래를 선택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한국대 마도환 교수 밑에서 석박사를 밟는 것. 넌 그걸 원하니?”

마도환이란 소리에 저절로 강우의 손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방금 그녀가 언급한 상황은 유학을 가지 않는 것보다 더 최악이다.

“그건 절대 반대입니다.”

“그러니까…… 난 대학원을 갈 수 없단다.”

조용히 타이르는 음성은 강우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이미 숱하게 유학 거부를 밝혔던 차도도의 선언은 전혀 새롭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강우도 각오했었다.

승부를 걸 시점이다.

새삼 강우는 지금까지 느끼지 못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어쩌면 정말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다. 그래도 마지막 시도를 해야 한다.

“쌤, 나랑 결혼해요.”

프로포즈를 받은 차도도의 몸이 한 차례 격동을 일으켰다.

“그건 안 돼.”

“왜요? 제가 싫지는 않잖아요?”

“그래도…… 우리 사이엔 장벽이 너무 많아.”

새삼 설명하지 않아도 무엇을 뜻하는지 강우도 잘 안다. 그는 용기를 냈다.

“쌤! 제 목표는…….”

“그래, 인류를 에너지난에서 구하는 것! 나도 알아.”

“그 목표를 달성하려면 쌤이 필요해요.”

“넌 천재니까…… 나랑 비교할 수 없는 천재니까…… 내가 없어도 잘할 수 있을 거야.”

“아시잖아요? 그 과정에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 일을 부담해줄 사람이 곁에 필요하다는 거. 쌤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다는 것도.”

“난 그렇게 똑똑하지 않아.”

그녀가 거절할수록 강우는 감정이 점점 격해졌다. 반면 그가 고집을 피울수록 차도도는 점점 냉정해지는 것 같았다.

“전 이번에 헌팅턴과 새 프로젝트를 체결할 거예요. 앞으로 5년쯤 후면 상용화 가능한 기술을요.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 공헌으로 노벨상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인류를 구원하는 상온핵융합은 인류의 삶과 문명에 큰 영향을 미칠 궁극의 기술이다. 만일 강우가 그 이론적인 토대를 제공하고 그 이론이 진실로 판명되어 구현된다면 노벨 물리학상도 어렵지 않다.

이를 강우도 알고 차도도도 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 노벨상. 얼마나 좋아요?”

“난 강우가 할 수 있다고 믿어.”

“그 노벨상을 쌤과 제가 공동으로 탄다면요? 가슴 뛰는 미래 아닌가요?”

“너라면 충분히 가능해. 난 그렇게 믿어.”

“쌤도요.”

“난…… 천재도 아니고 너랑 결혼할 수도 없어.”

“쌤? 저랑 함께 연구하면서 저와 쌤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생각해보세요.”

순간 차도도는 가슴이 뛰었다.

강우의 말이 지금까지 어렴풋하게 느꼈던 사실을 확신시켰다. 비록 그녀는 오래전부터 진학의 꿈을 품고 있었으나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했다.

그런데 강우와 함께 연구하면서 크게 달라졌다. 초기에는 강우의 연구를 따라가기에도 벅차서 그 연구를 이해하려고 밤을 새우며 공부했다.

강우에게 드러내진 않았으나 그녀의 고충도 컸다.

그런데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서 점차 연구가 쉬워졌다. 예전에는 접근할 수조차 없었던 고난도 수식이 이제는 쉽게 풀린다. 도무지 알 수 없던 어려운 과학이론을 지금은 손쉽게 이해하고 응용한다.

그 모든 일이 강우와 함께한 다음부터 발생했다.

이제는 자신감이 붙었다. 그녀의 능력을 믿게 되었고 독자적으로 연구를 추진할 자신감을 얻었다.

만일 강우와 계속 함께 연구한다면 그 능력은, 그 자신감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그녀도 궁금했다. 그 끝까지 가보고 싶다. 과연 그녀의 앞에 강우가 장담한 노벨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예상치 않았던 새로운 세상에서 그녀의 존재감을 깨닫게 해준 강우가 고마웠다. 하지만…….

“인류를 에너지난에서 구하고 공동으로 노벨상을 타야죠. 이 목표를 쌤이 도와주셔야 해요.”

차도도의 입에서도 뜨거운 한숨이 쏟아졌다.

“그래도…….”

“쌤? 지금 사귀는 사람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오늘부터 1일 해요. 사귀다가 상대가 싫으면 헤어져도 상관없어요. 괜찮으면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요. 결혼은 떠나기 전이든 떠난 후이든 언제든 원하시는 대로. 쌤만 제 곁에 있어 준다면…….”

“사귀자고?”

“네. 스승과 제자가 아니라. 미국에 같이 가서요.”

굳은 표정으로 몸을 돌린 차도도가 창가에 놓인 침대에 앉았다. 한참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는 다소 화가 난 듯했다.

강우도 재빨리 그녀의 옆에 바짝 붙었다.

“쌤?”

“어린이날을 맞아 속초에 놀러 가자고 한 게 모두 작전이었어!”

“놀러 온 건 맞아요.”

“내일 애들이 오긴 하니? 우리 둘만 2박 3일로 온 것 아냐?”

“애들도 확실하게 와요.”

“그래……. 둘만의 오늘 밤을 위해 작전을 잘 짰어.”

“작전이라기보다…….”

길게 말해봐야 변명일 뿐이다.

강우는 차도도가 놀랄 만큼 평정을 유지하고 있어 실망했다. 지금 상황에 당황하고 어쩌면 들뜬 마음이 되기를 바랐는데 정작 그녀는 처음 말을 꺼낼 때보다 더 차분해 보였다.

그래서 차갑고 도도한 미녀일까. 아니면 그에게 마음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너무 어이없어서일까.

차도도의 시선이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서 강우는 깊은 곳에 숨은 고통을 눈치챘다. 놀랍게도 이 순간의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다.

다음 순간 차도도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리고 조용히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우야, 이 세상에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많단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이상 또 가족의 구성원인 이상 그 책임과 도리를 다해야 하고. 그렇기에 난…… 너를 따라 유학 갈 수 없어. 그러니까 너랑 결혼할 수도 없고. 오늘부터 1일 하자는 제안도 받을 수 없어.”

강우는 고개를 저으려 했다. 얼굴을 붙잡고 있는 차도도의 두 손에 막혀 꼼짝할 수 없었다.

“너의 연구를 도와줄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야. 내가 아니더라도.”

“그렇지 않아요. 쌤을 대신해줄 사람은 없어요. 쌤? 뭐든 다 들어주신다고 했잖아요? 예전에 캐리커처 가져가실 때도 나중에 다른 일 양보한다고 하셨고, 또 다른 내기에서도…….”

잠시 침묵에 잠겼던 차도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나를 좋아하는 마음은 알겠어. 그 마음이 진심이란 것도.”

강우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도도가 강우를 향해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게도 그 표정에서 강우는 처연한 슬픔을 느꼈다. 그 눈빛은 사랑을 보내고 있는데 그녀의 전체 표정은 차갑게 굳어있었다.

“그래, 너를 누가 말리겠니? 하지만…… 인생에서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도 있단다.”

차도도는 조용히 침대에 반듯하게 누웠다.

무슨 뜻인지 짐작조차 못 한 강우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가 눈을 감고 차분하게 감정을 다스렸다.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없어서 미안해. 너에게 무척 많이 받았는데 정작 돌려줄 수도 없고.”

강우는 침대 옆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일까.

“난 너랑 미국에 갈 수 없고, 너랑 결혼할 수도 없어. 네가 보기엔 무척 간단한 일이고 단지 내 결심만으로 가능한 일처럼 보이겠지만, 난 이기적인 사람이라 그것마저 들어줄 수 없단다.”

“인생에서 못할 일은 없어요!”

“그래, 넌 불가능하다는 핵융합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 하나쯤 데리고 유학 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겠지.”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차라리 내가 평범했다면…… 아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나는 내 의지로 사는 사람이 아니어서 어쩔 수 없단다. 난 이대로 잘 테니까 넌 저쪽 방으로 가서 자렴. 내일 애들이 오면 열심히 놀다가 돌아가자.”

차도도는 눈을 감은 채 마음을 안정시켰다. 이게 그가 원하는 답이 아님을 그녀도 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예전에 강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저는 인류의 미래에 빛을 주고 싶습니다.

- 인류를 에너지난에서 해방하는 것이 저의 연구 목표입니다.

- 향후 10년 이내로 저는, 아니 저희 부부는 노벨상을 받을 겁니다.

차도도의 감은 눈썹이 경련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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