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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보니 과학고 천재-274화 (274/325)

제274화 마지막 승부 (3)

차도도는 눈을 감은 채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이런 상황을 계획한 강우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원망스러웠다. 과학 천재인 그는 이런 일에는 서툴기 짝이 없다.

긴장 속에 나른한 피곤이 몰려왔다.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어 제각각 공간을 부유하는 느낌이다.

강우가 당황했으려나? 무엇보다 그가 그녀를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미국에 가지 않는 이유가 그를 싫어해서가 아님을, 그녀가 없어도 혼자서 잘 할 수 있다고 스스로 깨달았으면 좋겠다.

미국으로 같이 가자고 계속 조를 때부터 언젠가는 이런 순간이 오리라 예상했었다. 다만 그 시기가 그녀 계산보다 빨랐다.

“쌤?”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녀는 외면했다.

시간이 흐르는데도 강우의 움직임이 없었다.

‘이러다가 지치면 옆방으로 가겠지.’

미안함 속에서도 차도도는 강우를 무시하려 애썼다. 피곤한데도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눈썹이 떠지지 않는다.

의식이 점차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강우는 차도도를 내려다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머릿속으로 오늘 계획을 다시 되새겼다. 어떻게든 고집을 부리면 그녀가 허락하리라 생각했었다. 지금까지 그가 부탁한 일을 대부분 들어주었던 그녀였기에 이번에도 결국은 수락하리라고 너무 쉽게 생각했다.

미국에 가는 것이든 결혼하는 것이든.

그런데 오판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그녀가 과학, 특히 물리를 좋아하고 과학도를 양성하는 일에 기쁨을 느낀다는 점은 안다. 그리고 물리에 재능이 있다는 것까지.

그런데 그녀의 사생활을 알지 못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는데 아는 게 없으니 뜻대로 되는 게 없다. 너무 기고만장했다.

왜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았는지, 미국에 유학 갈 수 없는지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았었다. 자신처럼 그녀도 자유롭게 이 땅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솔직히 그녀의 의사를 무시한 행동이었다.

차도도는 눈을 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는 걸까.

강우는 그녀의 옆에 서서 멍한 상태로 조용히 있었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시위나 투정처럼 비치겠지만 지금 그는 반성하고 있었다.

영겁의 시간이 흘렀다.

* * *

차도도의 옆에서 강우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녀를 미국으로 데려가려던 작전은 망했다. 이곳 속초에 놀러 와서도 그녀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진심이었는데도 받지 않은 그녀를 원망해야 할까.

차라리 매몰차게 그를 밀어냈다면 어떻게든 매달리면서 계속 설득했을 것이다. 그의 끝없는 부탁에 결국은 항복하고 미국 유학에 동의하는 그림을 그렸었다.

머릿속은 복잡하고 잠이 오지 않았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면서 결심은 더욱 굳어갔다.

작전을 새로 짜야 한다. 그의 인생에서 그녀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에 그녀를 놓아줄 생각은 전혀 없다.

방안이 점차 밝아왔다.

벌써? 시간이 그야말로 물 흐르듯 흘러버렸다. 잠시 머릿속을 정리한 것뿐인데.

실내가 밝아지자 강우는 몸을 일으켰다.

“쌤?”

반응은 없었다.

강우는 그녀의 손을 끌어 강제로 일으켰다.

“해가 떠요. 해 뜨는 것 보셨어요?”

창밖에 바다가 보이고 저 멀리 수평선 끝자락에서 막 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천지가 붉게 물들고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 붉은 태양이 떠올랐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장관이다.

차도도를 창 앞에 세우고 함께 일출을 감상했다. 붉은빛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녀도 그도 햇빛을 받아 붉었다. 이렇게 같은 색인 것처럼 둘의 마음도 같으면 좋을 것을.

“멋지죠?”

“그래.”

간만에 차도도가 입을 열었다.

“바다에서 뜨는 일출, 처음 보죠?”

“아니. 예전에 많이 봤어.”

“저 태양처럼 앞으로 우리의 앞날에 희망이 가득했으면 좋겠어요.”

대답이 없다.

해는 금방 떴다. 불과 몇 분이 지나지 않아 해가 바다와 분리됐다. 여전히 위용을 자랑하는 붉은 태양과 그 아래 수면에 비친 붉은 빛, 그리고 넘실거리는 금빛 파도에 천천히 지나가는 어선까지.

한 폭의 그림이었으나 마음은 밝지 않았다. 마음은 여전히 심연의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애들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그때까지 주무세요. 오늘 돌아다니려면 체력을 비축해야 하거든요.”

강우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옆방으로 갔다.

일단 지금은 눈부터 붙이고. 기운을 회복한 후 그녀를 설득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

* * *

대충 일어나서 씻고 정리하니 손차희와 윤수아가 들이닥쳤다.

“쌤? 잘 주무셨어요?”

손차희와 윤수아의 표정이 밝고 해맑았다.

가져온 생수를 냉장고에 채워 넣으면서 윤수아가 짓궂게 물었다.

“쌤! 설마 어젯밤에 강우가 늑대로 변신한 건 아니죠? 저 녀석 가끔 기발한 행동을 해서…… 밤에는 어떻게 변신할지 아무도 몰라요. 뭐, 그래도 우리 쌤이 잘 때려잡았을 테니까…….”

윤수아의 우스개에 차도도가 미간을 찌푸렸다.

강우는 머쓱한 표정으로 한쪽 구석으로 물러났다.

손차희가 눈짓으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강우는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득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쌤? 얼른 나가요. 일단 바다부터 구경 가요!”

손차희가 눈치껏 차도도의 손을 잡아끌었다. 윤수아도 동조하자 그렇게 목적지가 정해졌다.

해변에서 검푸른 바다를 봤다. 하늘과 바다색이 잘 어울렸다.

봄철 바닷가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고 파도 소리가 요란했다.

강우의 과학 정신이 이 순간에 또 도졌다.

“바다가 왜 푸른 줄 알아?”

문제를 놓고 토론을 통해 해법을 찾아가는 과정은 무척 재미있다.

“하늘이 파란 이유는 알아.”

윤수아가 대답했다.

“왜?”

“빛의 산란 때문에.”

“그럼 바다는 왜 그럴까?”

“하늘의 파란 빛이 반사되어서? 아니면 원래 물색이 파란가?”

물 밑에서 찍은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 푸른빛이 돈다. 물색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논란이 일었다.

“물속에서도 빛이 산란하는 거야?”

“붉은빛이 물에 흡수되어서 그런가?”

“저쪽 바다는 초록색인데? 물감을 푼 듯한 녹색…….”

“우와! 다시 보니 바다가 층층이 색깔이 달라. 너무 예쁘다!”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그 장면을 본 차도도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녀도 과학을 사랑하고 과학을 가르친다. 그런데도 이 고곽천재 아이들은 유별난 데가 있다. 특히 강우부터.

“대우한테 물어보자! 어디 갔지? 물리 올림피아드 금메달리스트! 오다가 바다에 빠졌나?”

“강우 있잖아? 금메달리스트.”

“쟤는 물리로는 메달이 하나잖아? 하나보다는 둘이 더 확실하지.”

손차희와 윤수아가 티격태격 말다툼했다.

그 장면이 재미있어서 강우는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바다는 그에게 추억을 안겨준다.

제주도에서 봤던 밤바다와 밤하늘을 잊을 수 없다. 그날 차도도와 해변을 걸었던 기억까지.

오늘도 이곳에서 그녀와 모래사장을 걷고 싶은데…….

그런데 지금은 친구들 때문이 아니라 차도도와의 관계 때문에 서먹했다.

“쌤?”

강우는 휴대폰을 들고 차도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찍지 마!”

“찍을 건데요?”

약간은 난감한 표정으로 손을 젓던 차도도가 어쩔 수 없이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앞장서서 장난치며 걸어가는 손차희와 윤수아의 뒤에서 강우는 차도도를 휴대폰에 담으며 따라갔다.

앞선 두 사람의 다툼이 계속 들려왔다.

“그래서 정답이 뭐냐고!”

“대우가 와야 알지.”

“대우 언제 오는데?”

“지금 울릉도 호박엿 들고 오고 있어. 거의 다 왔다는데?”

“울릉도 오징어가 아니고?”

갑자기 윤수아가 뒤로 확 돌아섰다.

차도도와 강우를 확인한 그녀가 해변 저쪽을 가리켰다.

“쌤! 저기 카페 멋있지 않아요?”

바다 한쪽에 그림 같은 카페가 들어서 있었다. 뷰가 끝내주는 카페다.

“카페에서 대우를 기다리자!”

윤수아와 손차희가 짝꿍이 맞아서 카페로 뛰어갔다.

“쟤네들은 이제 고등학교 입학하는 애들 같아.”

“쌤은 대학원 입학생!”

농담이라고 받았는데 차도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괜히 말을 꺼내서 본전도 못 찾았다.

* * *

강우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오랜만에 모두가 메뉴를 통일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네 잔이다. 가격은 생각만큼 비싸지 않았다.

“핫초코에서 메뉴가 바뀌었네?”

손차희가 놀렸다.

“나도 이제 졸업했잖아?”

“올! 컸다 이거지?”

사이좋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양손에 들고 차도도와 윤수아가 앉은 테이블로 돌아왔다. 사방의 통유리창으로 햇볕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아늑한 자리다.

유리창 너머 방금 돌아다녔던 해변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저 멀리 수평선이 걸려 있고 흰 구름이 한두 점 평화롭게 하늘을 떠다니고 있다.

끊임없이 밀려온 파도가 백사장을 적셨다. 카페 안인데도 마치 파도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백사장을 거니는 사람들이 점점이 보인다.

차도도와 나란히 앉아 있으니 괜히 어젯밤 생각이 떠올라 어색했다. 강우는 재빨리 화제를 꺼냈다.

“바다가 파란 이유는 대우에게 묻고 파도는 왜 치는 걸까?”

“흐음, 파도가 왜 치지? 호수에서는 파도가 없잖아?”

윤수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쌤은 알아요?”

도발적으로 차도도에게 물었다.

차도도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거부했다.

강우는 열심히 설명을 시작했다.

“그게 바람이 불어서야. 바람이 불면 물 분자가 운동을 시작하는데 깊은 바다에서는 표면에서 원운동을 하거든. 물 분자의 운동에너지와 위치에너지가 교차하면서 에너지 보존에 의해…….”

“어휴, 뭔 소리래? 누가 금메달 아니라고 할까…….”

손차희의 핀잔이 있든 말든 강우는 설명을 계속했다.

“거기에 태양과 달의 기조력도 영향을 미치거든? 기조력이 밀물과 썰물을 만들어내면서…….”

강우의 설명은 물 분자의 운동에서 시작해서 기조력의 원리와 계산 수식으로 이어졌다.

차도도가 미소를 지었고 손차희와 윤수아는 열심히 들었다.

남들이 보면 동해안까지 놀러 와서 공부하냐고 항의할 정도다.

“그럼 호수에서는 왜 파도가 안 쳐?”

“그건 호수가 작아서지. 호수가 작고 얕으면 파동이 증폭되어 파도로 커지기 전에 마찰로 소멸하거든. 호수가 크면 달라. 지구에서 가장 큰 호수인 바이칼 호수에서는 파도가 치거든.”

“가봤어?”

“내가 가봤을 리가…….”

“가보고 싶다!”

윤수아는 꿈이 크다.

먼 훗날 윤수아는 지구를 여행하고 돌아다닐지도 모르겠다.

강우가 터트린 쓸데없는 과학 이야기가 수명을 다하자 그들의 관심사는 다시 미국 유학으로 넘어갔다.

“흠, 그래서 차도도 쌤은 안 가시게요?”

손차희가 작심하고 괴롭혔다.

순간 안색이 변한 차도도는 어색한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은 합격하려고 그렇게 노력하는 MIT인데요? 아깝잖아요?”

“그보단 차도도 쌤의 능력이 고등학생 교육에 머물러야 한다는 게 아깝지.”

강우가 덧붙였다.

손차희와 윤수아가 그렇다고 호응했다.

지금은 그녀들도 안다. 함께 연구하면서 보고 배운 덕에 차도도가 얼마나 뛰어난 인재인지. 고등학교 교과서를 가르치는 차도도는 본인의 능력을 절반도 발휘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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