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5화 마지막 승부 (4)
손차희와 윤수아는 차도도의 능력을 과학의 발전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써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했다.
“학생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해. 그래야 훌륭한 과학자가 탄생하지. 내가 아니었으면 어쩌면 너희 둘은 과학의 꿈을 키우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래서 학교 선생님의 역할이 중요해.”
차도도는 차마 강우까지 덧붙이지는 못했다. 아마도 강우는 그녀가 없었어도 잘 해냈으리라고 믿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자신의 역할에 슬픔이 일었다. 지난 3년간 그녀가 강우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의문이 들어서다.
자식은 크면 부모의 품을 벗어난다. 학생도 자라면 스승의 울타리를 벗어난다.
“저희야 쌤의 은혜를 잊지 못해요. 아마 평생 기억할걸요? 그래도 쌤의 능력은 너무 아까워요. 쌤? 우리랑 같이 MIT에 가서 핵융합을 연구해요. 분명히 선생님은 큰 성취를 이룰 거예요.”
손차희가 설득을 시작했다.
여전히 고개를 젓는 차도도에게 손차희가 화가 나서 물었다.
“대체 못 가시는 이유가 뭔데요? 쌤은 집도 잘 사시잖아요? 경제 문제는 아니고 진학 의지가 없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가 문제인데요?”
“그냥 개인적인 사유야.”
“결혼 때문에?”
“그 이유도 일부 있고…….”
“유학 가서 배우자를 찾으면 되죠! 전 그럴 건데요?”
손차희가 열심히 반박했다.
윤수아가 끼어들었다.
“차희야, 너 혹시 랜디랑 연락하니?”
랜디는 올림피아드에 갔다가 만났던 그 미국 학생이다. 잘생긴 백인 미남.
강우는 한 차례 보고 말았으나 손차희는 다음 해에도 수학 올림피아드에 참가했었으니 그때도 랜디와 만났었다.
“어…… 연락하는데…….”
어째 우물쭈물하는 게 뭔가 있는 모습이다.
짚이는 게 있는 강우는 급히 물었다.
“랜디는 어느 학교로 입학한대?”
“MIT 수학과.”
같은 학교여서 수상쩍은 감이 더욱 짙어졌다.
“흐음, 그래도 랜디에겐 애나라는 여신이 있잖아?”
강우의 반론에 손차희가 피식 웃었다.
“그 애나가 예쁘긴 해도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르거든?”
그렇게 간주하기엔 애나의 미모가 남다르지 않냐고 반박하다가 차도도의 눈치를 힐끔 봤다. 조용히 커피를 기울이는 안색이 어두워 보인다.
강우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그리고 애나는 대우랑…….”
그때 저쪽에서 최대우가 등장했다. 녀석은 체구 덕분에 어디에서나 금방 알아볼 수 있다.
강우는 손을 흔들었고 손차희도 급히 화제를 돌렸다.
최대우의 출현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주제는 울릉도 이야기로 바뀌었다. 대충 이 동네 오징어는 오징어로 부를 수 없다는 최대우의 주장이 이어졌다.
이어서 오징어 다리가 몇 개인가부터 시작해서 낙지는 어떻게 생겼고 꼴뚜기는 어떻고 문어는 어떻고……. 순식간에 어류 집하장이 됐다.
* * *
즐거운 시간이 지나갔다.
속초의 유명 관광지를 쭉 둘러본 후 일요일 저녁에 서울로 올라갔다.
어차피 모닝에 전부 탈 수 없었기에 올 때처럼 손차희, 윤수아, 최대우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덕분에 강우는 차도도와 함께 둘이서 모닝을 타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속초로 올 때와 같은 상황이다.
중간중간 대화가 뚝 끊어졌다. 몇 차례 어색함을 털어내려고 노력하던 강우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분위기는 결국 시간이 해결해줄 수밖에 없다.
“라면 드실래요?”
이대로 서울에 도착하면 시간이 많이 늦을 듯하여 휴게소에 정차했을 때 물었다.
“라면 말고 우동.”
“그래요. 휴게소 우동도 괜찮죠.”
우동 두 그릇으로 배를 채웠다. 서울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것보다 여기에서 먹는 것이 더 간편하다.
다시 올라탄 고속도로는 예상보다 많이 막혔다. 주말이 끝나고 모두 서울로 돌아오는 시간대에 딱 걸렸다.
“처음 쌤 생일 때…… 칠갑산 갔었잖아요?”
“그랬었지. 출렁다리도 건너고.”
“그리고 작년 생일 땐…….”
“내가 너를 쫓아내는 바람에 아무것도 못 했지.”
그동안 금기처럼 여겨졌던 그 일을 차도도가 순순히 대답했다.
“그리고 올해 쌤 생일엔…….”
“같이 속초 다녀왔지. 물론 여러 명이 함께.”
차도도의 말이 뚝 끊어졌다.
“어색해요?”
“내가 어색할 일이 뭐 있어?”
“그럼 다행이고요.”
그도 할 말이 끊어졌다. 그녀의 별명이 차갑고 도도한 미녀임을 절실하게 체감했다.
* * *
2박 3일의 속초 여행이 마무리된 시각은 거의 자정이었다.
막힌 고속도로를 간신히 달려 복잡한 서울 거리를 지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강우는 제집처럼 반가웠다.
가져갔던 짐을 거실에 옮기고 한숨을 돌리면서 창밖을 구경했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속초에서 보던 어두운 밤바다와 지금 내려다보는 서울 야경이 오러랩 됐다.
대충 정리한 후 차도도가 그의 옆에 섰다.
“늦었어. 이만 가렴. 힘들면 여기에서 자고 가도 되고.”
차도도의 반응은 평소와 마찬가지였다. 예전부터 밤이 늦으면 자고 가라고 했으니까. 이번 일로 그녀가 변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해야 하나.
강우는 대답하지 않고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옆에서 그녀도 같은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그녀를 데리고 유학 갈 밑그림을 그렸다.
“여기에서 야경을 볼 때마다 에너지와 인류 문명 발달의 상관관계를 떠올리죠. 에너지난에서 인류를 해방하면 인류 문명의 발전이 가속하는 거고요.”
“그래, 그게 네 꿈이지. 그래서 네가 핵융합을 연구하니까.”
3년간 강우가 숱하게 언급했던 내용이기에 그녀도 충분히 안다. 그 목표가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도.
“그래서…… 어제와 오늘 온종일 생각해봤는데요.”
“나를 미국으로 데려갈 생각은 하지 마.”
눈치챈 듯 아예 시작부터 잘랐다.
“여러 경우를 모두 고려해봤는데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쌤과 함께 하는 연구였어요.”
“너 혼자서도 할 수 있단다.”
“그런데 쌤이 갈 수 없다니까 차선책을 생각해봤어요.”
“…….”
반박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같이 하는 방법이 있더라고요. 저도 미국으로 가지 않고 한국에 남는 법. 제가 한국대로 진학하면 어떻게 될까? 쌤도 한국대 대학원생으로. 그러면 굳이 헤어져서 연구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생각해보니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더라고요.”
“마도환 교수 밑으로? 너랑 나랑? 그게 가능해?”
“그럼 한국대 말고 다른 학교로 가면 되죠. 대학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니까.”
“강우야, 그건 안 돼!”
“헌팅턴사와 잘 조율하면, 또 요셉 교수랑 어떻게 잘 해보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녀가 그의 팔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강우야! 강한 사람은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꿈을 좇아 전진하는 사람이야! 넌 강한 사람이잖아?”
그녀의 말이 옳다. 강한 사람은 꿈을 좇아 전진하는 사람이다. 꿈이 빛나는 것이 아니라 꿈을 좇는 사람이 빛나는 것이니까.
“전 꿈을 포기하지 않았는데요?”
“국내에 남겠다는 게 포기야. 대학은 가야 하잖아?”
“일 년 재수한 셈 치면 되죠.”
“지금 네 내신으로는 한국대를 갈 수 없어. 올림피아드 상은 내신에 기록할 수 없으니까.”
“알아요. 수능 보면 되죠. 혹시 알아요? 차희처럼 전국 수석해서 쌤과 함께 인터뷰할지? 가르치는 학생을 둘이나 수석으로 만든 쌤은 대단한 선생님이 되고요.”
짝!
그의 등에 강한 충격이 왔다.
차도도가 그의 등을 때렸다.
“그런 말 하지 마.”
의도한 반응이다. 적어도 국내에 남더라도 마도환과 연결될 그녀는 아니다. 또 그가 마도환과 연결되도록 놓아두지 않을 그녀다.
“내 인생의 목표는 두 가지예요. 누차 말했듯이. 하나는 인류를 에너지난에서 구하는 것, 다른 하나는 쌤과 함께 노벨상을 받는 것. 난 이 둘 중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넌 그래선 안 돼. 나랑 상관없이 유학을 가야지.”
“그건 꿈 하나를 포기하는 거죠.”
강우는 물러서지 않고 그녀의 내면을 자극했다.
말이 안 통한다고 느꼈는지 차도도가 물러났다.
“난 잘 거야.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넌…… 가든지 여기 있든지 알아서 해.”
차도도가 위층으로 올라갔다.
* * *
졸업 후에도 최대우는 물리 문제풀이 센터를 계속 운영했다.
그 블로그에는 예전처럼 애나와 우기준도 자주 등장해서 학생들의 질문에 답해줬다.
과거에 우기준이 던졌던 수준의 고차원적인 질문은 사라졌으나 예전보다 훨씬 많은 학생이 찾았기에 최대우는 관리하느라 바빴다.
이제는 블로그가 과학고 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져서 물리를 좋아하는 과학고 학생 사이에 토론의 장이 열리기도 했다.
오랜만에 블로그에서 놀던 강우는 기발한 생각을 했다.
퀴즈를 내고 정확히 대답한 사람에게 커피 쿠폰을 쏘면 어떨까. 원래 공짜라면 누구나 좋아하니 얼마나 많은 학생이 참여할지 새삼 기대됐다.
며칠 고민하던 강우는 퀴즈를 올렸다.
- 최초의 과학자는 누구일까요? 최초의 물리학자는 누구일까요? 정답을 말씀하시는 분에게 커피 쿠폰을 쏩니다.
질문을 올린 지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여러 답변이 우수수 올라왔다.
- 난중앙과학고 : 탈레스. 기원전 624년생. 기원전 585년에 일식을 예측함.
고대 그리스의 7현인으로 알려진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 주장한 철학의 아버지다. 그는 하늘을 관측하며 걷다가 우물에 빠진 일화로도 대단히 유명하다.
- 물리좋아 : 아낙시만드로스. 기원전 610년에 태어났고 천구의를 만듦.
기록에 남은 대표적인 과학자로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등이 있으니 오답은 아니다.
답변을 본 강우는 지극히 인터넷다운 답이라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해당 질문을 치면 거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풀이를 원하지 않았다.
- 뉴턴만세 : 뉴턴. 물리학의 기초를 세움.
뉴턴도 맞다. 뉴턴 이전의 과학자는 제대로 된 과학자가 아니었으니까. 뉴턴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과학 또는 물리학을 시작한 사람이다.
하지만 강우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뉴턴은 생전에 한 번도 자신이 과학자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는 자연철학을 연구하는 철학자였다. 뉴턴의 명저 프린키피아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뜻이다. 그는 공식적으로 과학자가 아니었고 물리라는 말 자체를 쓰지 않았다.
답변을 쭉 내리며 고개를 젓던 강우의 눈에 한 줄의 영어가 들어왔다.
- goddess : Michael Faraday.
“헉!”
강우가 원하던 대답이 등장했다.
과학자란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1840년대 영국의 자연 철학자인 윌리엄 훼엘이다. 그는 자연과학 지식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사람을 과학자로 표기했다. 즉 이때부터 자연 철학자는 과학자란 말로 대체되었다.
훼엘은 마이클 패러데이의 친구로 ‘이온’, ‘양극’, ‘음극’ 등의 새로운 용어를 만들었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전기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국의 물리학자 패러데이는 훼엘에게 당시 최고의 과학자였다.
즉 오래전의 자연 철학자가 아닌, 훼엘이 명시한 최초의 과학자는 패러데이라 할 수 있다. 물리학자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 또한 훼엘이기에 패러데이는 최초의 물리학자이기도 하다.
goddess란 닉네임을 본 강우는 난감해졌다. 애나는 천재였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애나에게 어떻게 커피 쿠폰을 쏴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풀 수 없는 난제에 빠진 강우는 어쩔 수 없이 최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 하아! 그거? 내가 해결해줄게. 내가 미국에 가서 커피 쿠폰이 아닌 커피를 직접 사준다고 해. 어차피 블로그 주인장이 나인데 상관없잖아? 단 돈은 네가 내고.
지극히 사심이 담긴 방법이었으나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미국으로 건너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할 일이 쌓여 있다.